▲박재순 목사 ⓒ베리타스 DB |
생명의 존엄성
1. 유영모·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민주적이고 영성적인 생명철학이다. 씨알사상은 안창호·이승훈의 민중교육입국운동에서 비롯된 민주철학이다.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민중(씨알)을 깨워 일으켜 나라를 되찾고 바로 세우려는 운동이었다. 사람은 나라의 씨알이다. 나라의 법과 제도, 체제와 권력은 껍데기요 나라의 주인과 주체인 씨알 민중은 알맹이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지키고 기르기 위한 것이다. 나라가 씨알을 지키고 기르지 못하면 나라는 존재할 이유와 목적을 잃는다. 세월호 참사는 나라의 존재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2. 사람의 몸에는 우주의 나이테가 들어 있고 37억년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우주의 별들이 생성할 때 생긴 무거운 원소들(탄소, 산소, 철 등)이 그대로 사람의 몸속에 들어 있다. 사람의 몸은 우주의 별들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별에서 온 그대’다. 한 사람의 몸속에 우주 역사 전체가 들어 있고 유전자와 세포 속에 37억년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우주와 생명진화의 역사 전체를 만나는 엄청난 일이다.
3. 사람의 맘속에 2백만 년 인류역사가 새겨져 있고 5천년 민족사가 살아있다. 사람이 맘을 바로 쓰면 인류역사와 민족사가 바로 살고 맘을 못되게 쓰면 인류와 민족의 역사가 잘못된다. 사람의 맘속에는 영원한 생명의 불씨가 들어있다. 신적인 생명의 불씨는 우주보다 깊고 높은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우주보다 존귀하고 나라보다 존엄한 것이다.
4. 모든 생명체는 씨알서 나서 씨알로 살다가 많은 씨알을 남기고 죽는다. 씨알로 살고 죽는 가운데 생명은 더 높고 깊은 생명으로 진화했다. 생명은 스스로 자라고 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생명은 제가 저를 스스로 낳고 짓는 존재, 저를 만들고 저가 되는 존재다. 씨알은 생명의 스스로 하는 주체성과 자람과 새로움의 변화를 나타낸다. 생명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주체이므로 존귀한 것이다. 생명은 자라고 새로워지는 것이므로 값진 것이다. 생명은 생명을 낳는 존재이고 생명을 낳는 것은 생명을 낫고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나’를 낳는 존재이고 참되고 큰 ‘나’가 되는 존재다. 겉 나(몸 나)는 부모가 낳아주지만 속 나(얼 나, 참 나)는 내가 스스로 낳아야 한다.
5. 생명의 주체는 복제(複製)하거나 복사할 수 없다. 물질과 정보, 기계와 물건은 복제하고 복사할 수 있다. 사람의 맘과 혼과 얼은 복제하거나 복사할 수 없다. 생명의 주체는 생명의 주체를 낳을 뿐이다. 씨알은 저보다 더 값지고 나은 씨알을 낳기 위해 기꺼이 저를 깨트린다. 생물학자들이 생명의 본성을 ‘유전자의 자기복제’로 설명하는 것은 생명을 기계적이고 공학적으로 본 것이다. 생명을 낳고 ‘내’가 되는 일에는 돈이나 기계가 개입할 수 없다. 그것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값진 일이고 기계가 할 수 없는 생명의 존엄한 일이다. 돈과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생명이 ‘나’를 잃고 물화(物化)되고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은 존엄함을 잃고 하찮게 된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바라본 우리사회의 문제점
1.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정부와 재난구조기관들의 총체적 무능과 혼란이 드러났다. 해양경찰은 단속과 통제는 잘 하는데 국민의 생명을 구조하는 데는 한없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이 드러났다. 고위 공직자들의 특권의식과 관행, 악덕 기업과의 야합이 드러났다. 민주적인 공직의식과 관행 민주적인 공직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 민주적으로 포장되었을 뿐 속은 반민주적 특권적 의식과 관행이 국가권력기관들, 고위공직사회에 굳건히 남아 있다. 국가권력과 기관들, 고위공직자들의 의식과 관행은 아직도 민주화되지 않았다.
2. 개인적으로는 희생과 헌신을 보인 고귀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선장과 선박선원들은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를 철저히 버렸다. 사회질서와 체제, 기관과 단체를 운영하고 책임지는 문화와 풍토가 확립되지 않았다. 한국인은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자발성과 헌신성을 보여주지만 시민사회의 일상 속에서 자발적 헌신성과 민주적인 의식과 생활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
3. 세월호가 속한 악덕 부실기업 뒤에는 놀랍게도 거짓 종교인 구원파가 있다는 사실이 이번 참사를 계기로 알려졌다. 구원파 교주는 가난하고 고달픈 민중의 사회 종교적 불안 심리를 이용해서 신도들의 노동력 착취와 재산 갈취를 통해 엄청난 부와 사치를 누렸다. 이렇게 모은 재산을 가지고 악덕 부실기업을 만들어 운영함으로써 거대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다. 세월호 참사 뒤에는 악덕 기업과 거짓 종교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거짓 종교들이 한국 민중을 지배하고 있다. 거짓은 거죽(거즛)에서 온 말이고 참은 ‘알이 차다’에서 온 말이다. 껍데기 종교는 생명과 정신의 껍데기를 위해서 생명과 정신의 알맹이를 해치고 손상시키는 종교다. 참 종교 알맹이 종교는 껍데기를 희생하고라도 알맹이를 살리고 키우는 종교다. 국가권력과 제도, 돈과 기계, 본능과 탐욕, 지위와 명예, 교리와 성직제도, 교회당과 의식(儀式)은 다 껍데기다. 생명과 혼과 얼, 사랑과 정의는 알맹이다. 껍데기를 지키려고 알맹이를 해치는 것이 거짓 종교이고 껍데기를 깨서라도 알맹이를 살리는 게 참 종교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
1. 국가권력과 기관이 민에 대한 단속과 통제는 잘 하고 민을 살리고 구하는 일에는 서투른 것은 오랜 역사의 뿌리가 있다. 고위 공직자의 반민주적 특권적 의식과 관행도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것이다. 정부의 부실과 무능, 고위 공직자들의 특권의식과 부패는 그 뿌리가 깊다. 조선왕조, 일제식민통치, 남북분단,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권력층의 반민중적 특권적 관행과 부패가 굳어졌다.
민주시대에서 국가의 목적과 사명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돌보는 데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나라인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어떻게 이렇게 서툴고 무능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 권력과 고위 공직자의 반민주적 특권의식과 관행이 오랜 역사를 거쳐 형성된 것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오늘 국가와 공권력의 총체적 무능과 부패를 이해할 수 있다.
2. 서구사회는 2~300년에 걸쳐 정치혁명과 개혁을 이루고 국민계몽과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체제와 질서, 의식과 관행을 형성해왔다. 조선왕조, 식민통치, 남북분단과 전쟁,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반민주적 의식과 관행을 개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의식개혁과 정신혁명이 요구된다. 거짓 종교가 유행하는 것도 민주정신과 철학이 확립되지 않는 탓이다. 정신과 사상운동이 요구된다.
3. 근현대사에서 우리나라는 이제껏 한 번도 민주적인 정치혁명과 의식개혁을 제대로 추진한 일이 없다. 3·1독립운동과 4·19혁명은 거족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나 1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와 신민회의 교육입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나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매우 짧은 기간 지속되었고 매우 제한적으로 전개되었을 뿐이다.
4.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민주정부를 자처했으나 국가의 반민주적 지배 체제와 낡은 관행을 뜯어고치지 못했고 고위 공직자들의 특권의식과 부패를 개혁하지 못했다. 그 동안 한국사회는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럴 듯하게 민주적으로 포장된 법과 제도와 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민주적인 공직문화, 공직의식과 관행을 만들지 못했고 시민사회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식과 기풍, 사상과 철학을 확립하지 못했다. 여기서 민생을 위한 정치가 말만 무성하고 실제로는 공허한 까닭을 알 수 있다.
그 교훈을 통한 우리사회의 의식변화
1. 5천년 마을공동체를 통해 한겨레는 자치와 협동의 삶을 이어왔고 자발적 헌신성을 길러왔다. 3·1독립운동과 4·19혁명은 한민족의 민주정신과 희생정신을 한껏 드러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공적 질서와 체계를 스스로 형성하고 발전시키고 책임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없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정신과 의식 개혁운동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허겁지겁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로 치달았을 뿐이다.
2. 경제는 성장하고 과학기술은 발전했으나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뒤처졌고 합리적 관행과 질서는 마련되지 못했다. 형식적으로 민주화는 진전되었으나 사회적 양극화와 특권적 관행은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걸맞은 국민정신과 사회기풍, 민주의식과 관행, 민주적 공직문화를 확립하지 못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거나 큰 재난을 당할 때 국민들이 떨쳐 일어나 놀라운 자발적 헌신성을 보여주지만 일시적인 활동에 그치고 만다. 민중의 자치와 협동, 자발적 헌신과 참여를 국가와 시민사회 속에서 생활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3. 민중 사이에 공권력과 체제에 대한 불신과 저항의 전통은 뿌리가 깊다. 조선왕조, 일제의 식민통치, 남북분단과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형성된 반민주적 특권적 체제와 질서에 대해서 한국 민중은 깊은 불신과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다. 지배질서와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저항이 민주화운동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체제와 질서에 대한 불신과 저항만으로는 민주사회를 형성할 수 없다.
4. 민주사회에서 민중은 국가의 질서와 체제의 주인과 주체로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사회가 되려면 민주생활철학을 확립하고, 시민생활운동이 일어나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민족정신과 사회기풍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중이 나라와 사회의 주인과 주체로서 나라와 사회를 민주적으로 이치에 맞게 형성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
5. 민족정신과 사회기풍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유럽인들의 정신과 기풍은 1천년 기독교 정신의 영향과 300년 정치개혁과 의식혁명, 계몽운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3·1운동과 4·19혁명을 거쳤으나 민주정신과 의식이 일시적으로 분출되었을 뿐 정치개혁과 의식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민주시민의 생활철학으로서 씨알사상을 확립하고 널리 알려서 민주의식과 사회기풍, 민주적 공직문화를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