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 2:18-25, 엡 5:21-33, 막 10:1-12
설교문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과 가정의 탄생]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에 단계가 있다는 '욕구단계설'을 말했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그 중요도에 따라 일련의 단계를 밟는다는 것입니다. 탑을 쌓아가듯이 하나의 욕구를 충족하면 다음 단계의 상위 욕구가 나타납니다.
첫번째 단계는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입니다. 즉 따스한 옷이나 거주지, 먹을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이지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극도의 가난으로 굶주림이 일상인 이들에게는 빵 한 조각, 밥 한 끼가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른 욕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생리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2단계인 '안전의 욕구'가 나타납니다. 안전 욕구는 근본적으로 신체적, 감정적인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단계의 욕구는 '소속감과 애정 욕구'입니다. 이것은 관계를 형성하고 동료들과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지길 원합니다. 동료와 친교를 나누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4단계는 '존경의 욕구'입니다.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그 집단에서 단순한 구성원 이상의 존재가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는 내적으로는 자존, 자율을 성취하려는 욕구를, 외적으로는 타인의 인정을 받으며 집단 내에서 어떤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나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자기 계발을 계속하고 싶다."는 지속적인 자기 성장을 도모하고, 자기 잠재력을 극대화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는 욕구입니다.
매슬로우는 앞의 1에서 4단계 욕구는 '결핍 욕구'라고 하였고,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는 '성장 욕구'라고 하였습니다.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앞의 4가지 결핍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자아실현의 성장 욕구 또한 채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의 가장 큰 인생 목표는 바로 자아실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표가 그저 꿈과 희망에만 머물러 있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앞의 4단계를 깊이 있게 고려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르게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단계에서 4단계까지의 결핍 욕구들을 밑바탕으로부터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부부가 양친을 모시고 자녀와 함께 사는 3세대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부부와 자녀가 함께 사는 2세대 가족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합니다(2023년 가족실태조사, 39.6%). 최근에는 부부만 살거나(25.1%) 홀로 사는 1인 가구(33.6%)가 압도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족의 종류도 매우 다양합니다. 한 부모 가족, 미혼모 가족, 무자녀 가족, 노인 가족, 재혼 가족, 입양 가족, 다문화 가족, 맞벌이 가족, 주말부부 가족, 기러기 가족, 미혼독신가족, 동거가족, 동성 가족, 공동체 지향 가족 등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입니다. 이런 가족들 안에서 위에서 말한 4단계의 결핍 욕구들이 온전히 채워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개인의 자아실현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런 모든 가정의 시작은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본문에 모두 나와 있듯이, 두 사람이 각각의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친밀감이며 정서적인 유대입니다. 부모를 떠난 성인들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면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혼인을 합니다. 그래서 한 가정이 태어납니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고 부부가 모두 자신의 일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기를 원하며, 아이를 양육하면서 드는 돈과 시간, 노력을 부부의 행복을 위해 쓰겠다는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들도 많지만, 아이를 얻게 되면 자연스럽게 2세대 가족이 됩니다.
이때 아이는 부모와의 상호 작용 속에서 본래 가지고 있는 욕구들을 하나씩 채워나가고, 부모-자식 사이의 첫 만남이 앞으로 있을 모든 만남의 토대가 됩니다. 어느 가정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대체적으로 4종류의 형태를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혼자서도 편안하게 무엇이든 집중을 잘해요. 물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해서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혼자 있으면 몹시 불안하고 버려진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져요.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요."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저는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이 편해요. 다른 사람과 섞이는 것이 부담스럽고, 혼자 있을 때 오히려 에너지를 얻는 편이에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지요. "저는 혼자 있어도 불안하고 다른 사람과 너무 가까워져도 힘들어요.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내 영역을 너무 많이 침범하게 될 것 같아서 가까이 가기 힘들어요.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버림받은 느낌이 들어서 불안해지고요."
어떤 가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랐느냐에 따라 행복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발버둥치며 초기의 부정적 삶의 경험을 떨쳐 내려는 삶도 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또 완벽한 사람도 없고, 그래서 어딘가는 부족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첫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가정에는 반드시 티격태격하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불화(不和)가 혼수!]
제가 얼마 나이를 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열 번도 넘는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온 많은 예비 부부들 모두는 결혼하기 전보다는 결혼한 후에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제게 주례를 부탁하면 저는 반드시 두 번 이상 이들을 만납니다. 첫째 만남에서는 두 가지를 묻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결혼을 왜 이 사람과 하려고 하는가?"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서 충분한 대화가 되면 다음번 만남에서는 결혼식에 대해 구체적인 준비를 하지요.
그런데 제가 첫 번째 만남에서 두 사람에게 반드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림도 마련하고, 그렇게 혼수를 준비하는데, 그 혼수에 이 신혼부부가 전혀 준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 못한 한 가지 혼수품이 반드시 들어 있다고 말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불화(不和)"라는 혼수입니다.
보통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서로에 대해서 강한 끌림(infatuation)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는 콩깍지가 눈에 씌웠다고 하지요. 서로 강하게 끌리면 상대방이 끊임없이 생각나게 되는데 일종의 강박장애에 걸린 것처럼 강력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의 이성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상대방과 얽힌 일이라면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상화(理想化) 작용을 하게 되고, 그래서 상대방의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고, 부정적인 면은 쉽게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신경전달물질인 페닐에틸아민(PEA)이 점차 감소하면 상대방과 함께 할 때 느끼는 황홀함은 점점 식어가고 3년 정도가 지나면 홀딱 반함의 유효기간이 만료됩니다. 이때쯤 그동안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혼수품인 불화가 부부의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각각의 상황에 따라 조금 더 빨리 찾아오는 부부가 있고, 늦게 찾아오는 부부가 있지만 불화와 갈등이 없는 부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불화가 혼수품인 줄 몰랐다가 갑자기 불화가 찾아오면 부부는 당황하고 때로 이 둘 사이에 일생일대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이때를 잘 넘기고 성숙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면, 인생의 고통과 갈등을 동반하면서도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한 3단계의 욕구는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원래 부부 사이는 서로 사랑하며 그 누구보다도 친밀함을 느끼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다 보면 부부 사이에서도 이 3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럴 때 부부는 서로 이런 말들을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이 사람은 제가 하는 일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 못마땅해 합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내 의견은 무시해요."
"나보다 텔레비젼을 더 좋아해요."
"아이가 태어난 뒤로 이 사람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어요."
"우리 부부는 한 집에 살아도 서로 투명 인간 취급하며 살아요."
"상대의 목소리가 커지면 싸우는 게 싫어서 그 자리를 피합니다."
"도망가는 저 사람을 보면 말라 죽을 것 같아요."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행복이란 노력 없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특히 함께 사는 사이에 행복하려면 둘 사이에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통을 하면 아프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럼 부부는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요?
[남녀 평등과 부부 사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의 말씀에서 우선 하나의 큰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바리새파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라면, 바리새파는 예수는 당연히 "안 된다"라고 대답할 것을 예상하였던 것이고, 그러면 이혼증서를 주고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올가미에 걸리게 할 심산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파의 질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보면 결혼한 아내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면 이혼장을 써 줌으로서 자기 집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치스러운 일이란 일반적으로 간음이나 간통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학파에 따라 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했습니다. 샴마이 학파의 경우는 아내가 간음했을 경우에만 이혼 사유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음식을 태웠거나 요리 솜씨가 없는 경우에도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하였고, 아키바 같은 학자는 자기보다 아름다운 아내를 발견해도 소박의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대 사회만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도 남자는 "즐기기 위해서는 정부를, 우리의 신체(성기)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는 첩을, 합법적인 자녀를 낳게 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고, 스토아 철학에서도, "어떤 의미에서 여자들은 본질상 공동의 재산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법에 의해 분배되고 난 후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의 몫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 소유를 훔치거나 맛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동양 사회에서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부부 사이에는 특별함이 있다는 말인데, 즉 부부는 다른 직장 동료나 학교 동창생들과 같은 친구들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라는 것인데, 이것을 마치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이라면서 서로 다른 신분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여,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억압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 비하 사회에서 예수를 올가미에 걸려 넘어뜨리려는 바리새파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본래 지녔던 뜻을 알려줌으로써 남녀가 평등한 관계로 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충격인 이유는 당시에 아내가 남편을 버릴 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면 그와 동등하게 아내도 남편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 즉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예수님의 기본적 생각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랑과 존중으로]
행복한 부부생활이 되려면 부부가 평등한 관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가 쓰일 때도 여전히 남성이 우위에 있는 사회였습니다. 남자는 주인이었고, 여성은 종으로 여겨지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배움의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던 여성들은 남자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이 한마디가 가장 핵심입니다.
당시에 이 편지를 읽는 남성은 이 말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순종하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분명히 서로 섬기라고, 서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남편들을 설득하기 위한 고도의 수사법을 사용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하면서, 일단은 당시 가부장주의에 물든 남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주님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주님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태도와 행동과 자세로 그렇게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는 말은 아내도 남성과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은 아내들보다는 남편들을 설득하기 위한 장치로 가득합니다. 편지의 수신자도 여성이 아니라 주로 남성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각각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놀랍게 이 마지막 충고에는 순종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는 "사랑과 존중"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근거로 아내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에 빠져서 눈에 콩깍지가 씌면 상대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이듯이, 친밀한 관계여야 하는 부부 사이에 서로 사랑을 느끼지 못하여 애정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의 장점은 보이지 않고 온통 단점만 보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일부러라도 상대의 좋은 점을 계속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것을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 영국의 런던대학,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대학 연구진들은 '미켈란젤로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버려질 수도 있는 돌멩이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조각상을 보면서 대리석을 깎아 나간 사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돌을 보면 그 안에 숨겨진 멋진 조각상이 눈에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조각상 이외의 부분만을 제거하여 너무나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장점을 자주 얘기하고 서로의 미래를 그리며 서로의 비전을 조각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곰과 여우가 한 집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로 반응하는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감정이 깊어지고, 친밀감도 높아집니다. 이런 반응을 공동반응성이라고 하는데, 공동반응성은 다섯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배우자의 필요에 맞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아플 때 약국으로 달려가 약을 사오거나, 임신 중인 아내를 위해 원하는 음식을 사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지요. 서로 잘하는 것으로 상대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지요.
둘째는 배우자의 장래 목표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하고, 관심을 갖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자의 삶이 풍성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 협동하며 더 나은 삶의 가치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함께 여행을 하거나, 같은 취미생활을 하거나, 의미 있는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도 정말 좋은 일이지요.
넷째는 배우자의 실수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장점은 높여주고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자신이 채워가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특별한 요구가 없더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거나, 감사 편지를 쓰고,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이나 몸짓, 사랑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방실거리는 아이에게 사랑 표현을 하듯 그렇게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사랑에 '빠져' 버리지만 성숙한 부부는 사랑을 '이루어' 냅니다.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의 불화는 결혼의 실패가 아닙니다. 불화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이며 부부는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독립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관심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단단한 삶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 떨어져 있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며, 변하지 않는 부부는 없습니다. 방법을 바꾸고 용기를 내어 배우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좋은 부부가 되고, 그러면 전혀 다른 성격도 행복의 상승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이 그냥 지나치던 모든 가족의 역할에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벌고 아이를 양육하며 서로 도와 가정을 세워가는 각각의 역할들을 너무 당연시하지 말고, 그 모든 것에 서로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자기에게 다가오는 하와를 본 아담의 입에서는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우리 모두는 함께 사는 자기 가족들을 보면서 기쁨의 노래와 사랑의 탄성이 나와야 합니다.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줘서 고마워! 오늘 저녁은 특별히 맛있는데!"
"오늘도 애썼어요! 당신은 언제나 믿음직스럽고 당신이 있어서 든든해!"
말로 하기 어렵다면,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이들이지만, 가족의 안녕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것만큼 우리 가정의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것을 고민하고 볼 줄 알아야 하지만, 작은 것도 챙기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큰 배움에 대해 말하는 동양의 고전 <대학(大學)>이라는 책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작은 물건 하나부터 제대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온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은, 뜻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몸을 닦아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합시다. "하루에 세 번은 우리 가족을 꼭 안아 주자!" "누구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들어주자" "틈이 날 때마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꼭 하자!"
오늘 제 설교에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임하고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따듯한 말 한마디가 생명을 살립니다.
어깨를 토닥이는 격려는 큰 용기를 주고,
믿어주고 사랑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뤄집니다.
사랑과 존중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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