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신명기 7:17-19a, 디모데후서 2:8-10, 누가복음 24:5-9
설교문
예루살렘에 가면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는데 그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드 바쉠'(Yad Vashem)입니다. '야드'는 '기억'이라는 뜻이고, '바쉠'은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념관의 출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로 이끌고, 기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성서는 '기억하다'로 시작해서 '기억하다'로 끝나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서를 통틀어 '기억'과 관련된 말은 328번이나 나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홍수로 땅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땅 위의 물을 빼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노아와 방주에 함께 있는 모든 짐승들을 기억"(창세기 8:1)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들을 해방해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출애굽기 2:24)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잊기를 잘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 모세가 가나안으로 향하는 기나 긴 광야 길에서 백성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이집트에서, 곧 너희가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라"(출애굽기 13:3)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질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천 명이 먹은 그 빵 다섯 개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마태복음 16:9-10) 하나님 나라(통치)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예수님이 내내 안타까워하신 것은 사람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것"(마가복음 8:17-18)이라고 말합니다. 실로 예수님은 '기억'과 '믿음'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시며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누가복음 22:19)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한 죄수가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간청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 응답하셨습니다. 부활의 새벽에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의 무덤으로 올라가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누가복음 24:5-6)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들은 모두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사도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부활의 청 증인들이 되었습니다.(누가복음 24:8-9)
신약성서 27권 중 거의 절반을 쓴 사도 바울은 이 한 구절로 자신의 메시지 전체를 요약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디모데후서 2:8)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그 가혹했던 박해의 시절, 그리스도인이 비밀리에 서로 나누던 인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Remember your death)입니다. 죽음은 앞으로 다가올 일인데 과거의 일처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라디아서 2:20)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그가 내 안에 살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렀기에 더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힘으로 그 모진 박해를 이겼습니다.
이렇듯 성서 전체에서 '기억'은 '믿음'과 동의어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남에게 잊히기는 싫어하면서도 잊기는 잘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육신이 쇠약해져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요즈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리면 한 개인의 정체성은 무너집니다. 한 집단이 공동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하나의 세계는 붕괴합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겁게 수다를 떤 기억, 살림이 어려워졌을 때 함께 인내하며 서로를 도왔던 기억, 병상에 누운 가족을 밤새 간호하며 고락을 함께 했던 기억, 그 기억들이 모여 하나의 가족을 만듭니다. 인간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여도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진 아이들도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떤 행복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은 '공동의 기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자유롭게 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그 숭고한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믿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만약 이런 공동의 기억이 없으면,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는 붕괴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이화는, 그리고 이화의 대학교회는 어떤 공동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공동체입니까?
오는 5월 31일은 이화가 이 땅에 태어난 지 139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화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선생님은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한국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 당시 53세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70대 중반이 됩니다. 나이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왜 한국 선교사가 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들과 함께 따르려 합니다. 우리는 안전하지도 않고 완벽히 한국어를 구사할 수도 없지만 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혜보다 높은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지혜보다 높습니다.
1885년 11월 9일의 일입니다. 이 날은 매우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화라는 씨가 잉태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늦추어진 스크랜튼 선교사님은 우선 지금의 정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함께 입국해 옆집에 살고 있던 헨리 G. 아펜젤러 목사님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 아기가 한국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인 앨리스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1885-1950)입니다. 그분은 나중에 이화학당의 제6대 당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가 태어나던 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습니다. 날씨가 어찌나 춥던지 스크랜튼 선생님은 그 갓난아기를 바닥에 누이지 못하고 밤새 품에 안아서 재웠습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추위에 벌벌 떨며 갓 태어난 생명을 품에 안고 있던 바로 그날 밤, 스크랜튼 선교사님의 머릿속에는 불현 듯, 계시처럼 그 시간에 자신과 똑같이 어린 자녀들을 품에 안고 추위와 싸우고 있을 조선의 수많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들의 어린 자녀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스크랜튼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작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화의 시작은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라함'입니다. 어원은 '어머니의 모태'입니다. 생명을 품어 아픔으로 낳았기에 모든 생명을 불쌍히 여기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긍휼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강대국에 패망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잊으시고 버리셨다고 슬피 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이 마음이 바로 이화가 존재하게 한 마음입니다. 이화가 기억하는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에베소서 2:4)입니다. 버려지고 차별받언 여자 아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 앨리스 아펜젤러는 후에 이화학당의 제6대 당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이곳 신촌에 이화의 새 캠퍼스를 만든 사람이고 한국 최초의 여자대학인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스크랜튼 선생님이 한 명의 학생으로 이화를 시작한 이래 이화학당에 '대학과'가 개설된 것은 제4대 당장 룰루 프라이(Lulu E. Frey, 1868-1921) 선생님 때입니다. 당시 학생들은 조혼(早婚)의 풍습 때문에 15세나 16세가 되면 학업을 중단하고 교정을 떠났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프라이 선생님은 대학과정을 만들어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학과정의 설립은 많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한국인과 선교사 모두 시기상조라 반대했습니다. 여성이 20세가 넘도록 학교에서 공부만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성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 라는 게 반대의 이유였습니다.
여기에 일제의 고등교육 탄압도 가세했습니다. 일제는 1911년에 '조선교육령', 1915년에 '전문학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해 대학 설립을 막았습니다. 민족교육을 탄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에서의 교육을 보통교육, 실업교육, 전문교육 세 가지로 구분하고 대학교육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에서 실시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전문교육으로 국한한 것입니다. 우리를 열등한 민족으로 남겨두려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일제는 1924년에 설립된 경세제국대학 이외에는 아무 대학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고등교육'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22년에 제6대 당장으로 취임한 아펠젤러 선생님은 우선 당시 조선인에게 허락되었던 최고의 교육인 전문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전심을 기울였습니다. 대학과는 정동에 있었지만, 아펜젤러 선생님은 대학교육을 할 수 있는 캠퍼스가 필요하다고 보고 전력을 다해 이곳 신촌에 캠퍼스 대지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25년 4월 23일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인가를 얻어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대학이 설립된 것입니다. 아펜젤러 선생님은 이화가 '전문학교'가 되어 기쁘다고 말했지만 이는 일제가 강요한 전문학교가 되어 기쁘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펜젤러 선생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학교의 영어 이름은 Ewha College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짧고 단호한 문장을 통해 이화는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한국 여성을 위한 대학교육을 반드시 실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입니다.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5년의 3월 9일에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곳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습니다. 그해 5월 31일 창립기념일에 본관, 음악관, 강당, 그리고 체육관 네 개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을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올해로 9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대학교회는 바로 이때 봉헌한 강당(에머슨홀), 즉 지금의 중강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36년 창립기념일에 아펜젤러 선생님은 네 개의 또 다른 석조 건물을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이 위풍당당한 학교 건물들이 사용될 수 있게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일제에 의해 조선의 "여성 고등교육은 전쟁 기간 동안에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아펜젤러 선생님은 회고했습니다. 1885년 11월 9일의 그 추운 겨울날에 태어나 스크랜튼 선생님의 품 안에서 잠자던, 그리고 자신이 한국 땅에서 태어난 첫 번째 서양 아기였던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한국인'이라 불렀던 아펜젤러 선생님은 그렇게 이화의 대강당을 제외하고 신촌 캠퍼스에 있는 아름다운 석조 건물 모두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성도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할 일이 조금도 당연하지 않던 그때, 더욱이 일제의 탄압으로 대학교육을 할 수 없던 그때, 아펜젤러 선생님을 이끈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 승리한다"는 그의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1서 5:4)라는 말씀을 그는 기억했습니다. 그라고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 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가 보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사랑했던 찬송은 오늘 우리가 예배 중에 부른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나 알 수 없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열악한 재정 상황 속에서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을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보십시오. 이 믿음이 승리했습니다.
물론 일제 말기에 이화여자전문학교는 큰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총독부는 1944년에는 전문학교 교육과정마저 폐지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를 1년제 지도자양성과정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예 '이화'라는 이름을 빼앗고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화는 여성 고등교육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순수 민족자본을 기반으로 재단법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여성의 대학교육 실현을 위해 계속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된 직후인 1945년 9월에 이화는 곧바로 문교부에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을 신청했고, 1946년 8월 15일, 곧 광복 1주년이 되던 그 기쁜 날에 우리나라 제1호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이로써 이화는 해방 이후 최초의 종합대학교로 발돋움했고 이 나라에 여성 고등교육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는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신촌 캠퍼스를 봉헌할 때 캐더린 베이커(Catherine Baker) 선교사가 쓴 축시, <문 The Door>입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시입니다. 어떻게 이 땅에 여성 고등교육의 문이 열렸는지를 밝혀주는 기도시입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 안으로 / 문이 활짝 열린다" 했습니다. 이 학교 안에는 "지식으로, 책의 기쁨으로, / 천지의 경이로움으로, / 수백 년의 지혜가 / 두렴 없는 구도자를 문 앞에서 기다린다" 했습니다. 그 "안에는 나아갈 채비를 하는 / 젊은 모험 정신으로 / 진리와 아름다움을 교실 너머에서 발견할 조언자들이 있다" 했습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찬송과 기도로 함께하는 유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향하는 이 문은 "풍요로운 삶으로 향하는, 빛나는 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문은 하나님입니다. "문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다"입니다.
이 문은 "밖으로"도 활짝 열립니다. 밖으로 열린 이 문은 "오래 전에 갈릴리의 한 사람이 걸었던 것과 / 같은 길들로" 열립니다. 이 밖은 어떤 밖입니까? "성장하는 영혼이 꽃을 피우는 밖"입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 언뜻 보이는 /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 기쁨을 맞이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문은 하나님입니다. "문이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다." 그렇게 이 기도시는 끝납니다. 그랬습니다. 여성 고등교육을 향한 문은 단지 지식과 성장을 향한 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린 문입니다. 이 문이 하나님을 향한 진리의 문, 생명의 문이었기에 선교사님들은 그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다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한국에 돌아온 아펜젤러 선생님은 1950년 2월 20일에, 그토록 사랑하던 이화의 대강당에서 채플을 인도하던 중 쓰러져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이화에서 마지막으로 하던 그의 설교 제목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였습니다. 그의 영구차가 떠나던 날, 긴 장례 행렬이 평생 한국과 이화를 위해 헌신한 그의 떠나는 길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이 땅에 태어나던 날, 그 추운 겨울날, 그를 품에 안아 재웠던 메리 스크랜튼 무덤 곁에 묻혔습니다. 부모의 무덤 옆이 아니라 스크랜튼 선생님 곁에 묻혔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기억은 힘입니다. 기억은 믿음입니다. 기억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는 구체적인 힘입니다.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신비한 힘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신명기 7:17-19a)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의 강한 손과 팔을 펴서 우리는 불의와 억압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지혜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이 숭고하고 따뜻한 기억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두려움을 이기십시오.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이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이사야 12:2) 이 노래가 오늘 여러분의 노래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