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하는 교황을 배척하는 태도는 성도의 바른 태도 아니다(2)
II 부
5)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을 계기로 가톨릭 내에 개혁운동의 급물살
6) 16세기 트리엔트 종교회의: 로마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자체개혁
7) 제1차, 2차 바티칸공의회: 19세기와 20세기 로마가톨릭의 자기 개혁
8)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과 타종교 구원 선언: 종교다원주의 수용
III 부
9)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프란시스코 교황
10) 교황방한을 맞는 자세: 교리의 다름을 인정하는 박애의 신앙
11) 종교 절대주의 시대의 종언: 종교 상생과 관용성 요청
5)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을 계기로 가톨릭 내에 개혁운동의 급물살
▲복음주의 신학자 김영한 박사 ⓒ베리타스 DB |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한 세대 후예인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 때문에 가톨릭교회 내의 개혁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독일에서는 열정적이고 유능한 많은 경건한 주교들이 개혁을 시도했고 각 수도회 안에서도 개혁이 일어났다. 수도회마다 개혁파들이 생겨났다. 황제 카를 5세(Karl V)는 공의회 개최를 위해 역대 교황들과의 투쟁에 나섰다. 황제는 진작부터 공의회 개최를 주장했고 루터 역시 이미 1518년 공의회에 공소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사건을 공의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시 제기됐고 독일의 제후들은 지속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다.
마침내 로마 교황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교황의 권한이었던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교회사에 나타난 몇 차례 공의회를 통하여 로마가톨릭은 많은 변신을 거듭하였다. 16세기의 트리엔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ient), 19세기 제1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 20세기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I) 등을 통하여 로마가톨릭은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자기 개혁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역사적인 자기 개혁운동을 통하여 오늘날의 로마가톨릭은 중세 암흑기(특히 14세기-16세기)의 가톨릭교회보다 개방적이 되었고, 많이 자체 개혁되었다. 물론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앞서 열거한 바같이 교리적으로는 아직도 비성경적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로마가톨릭 내지 서방교회는 비록 11세기(1054년)에는 필리오케(filioque) 교리문제로 동방정교회가 분리해 나갔으나 역사적으로는 사도적 교회에서 발전해 나온 하나의 공교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필자의 해석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역사적 예수로부터 초대 베드로가 받은 천국 열쇠를 계승한 유일한 정통기독교라는 천주교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적 정통교회의 기준이란 베드로와 같이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모든 신자들과 이러한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인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말한다. 그러므로 정교회, 천주교, 개신교 어느 교회도 사도적 계승을 독점할 수 없고, 오로지 바른 신앙을 가진 개인 성도와 그러한 성도들이 모임 단체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6) 16세기 트리엔트 종교회의: 로마가톨릭의 반종교개혁적인 자체개혁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1545년 북부 이탈리아의 트리엔트에서 교황 바오로 3세(Paul III)의 주관으로 개최된 로마가톨릭의 공의회를 말한다. 바오로 3세는 1536년에 가톨릭교회 내의 일련의 개혁 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교회개혁을 위한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 1545년 3월 공의회가 소집되어 12월에 공의회 첫 회의가 열렸다. 공의회는 1545년 12월 13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현 Trento)에서 열렸다. 두 차례 논의가 중단되어, 바오로 3세 때의 제1기(1545~1547), 율리오 3세(Julius III) 때 속개된 제2기(1551-1552), 비오 4세(Pius IV) 때의 제3기(1562-1563)로 구분된다. 교황은 종교개혁이 주도적으로 일어나 이미 루터파 교회가 지배적으로 형성된 독일 영토를 피하여 로마 교황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교황권의 영향이 미치는 북 이탈리아 도시 트리엔트로 공의회 장소를 정했다.
제1회기(1545-1548)에서는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배격하고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아울러 성경의 해석 권위는 교회에게만 있음을 명백히 하고 루터파의 오로지 은총설과 정의 동반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義化) (개신교: 의인[義認])에 대한 정의를 규정했다. 또한 예정설과 믿음에 의한 면죄설을 배격하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과 더불어 선행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고 화체설을 부정하는 등 개신교의 교리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 성경과 교회 전통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 교회가 계시와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 것,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의 실천에서 생겨난다는 것, 외경(『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을 성경에 포함시킴,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a)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선포(J. T. McNeill, “Council of Trent,” in A New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ed. Alan Richardson & John Bowden [London: SCM Press, 2002], 580.), 아울러 교황의 권위와 교황-대주교-지역사제에 이르는 성직계서제(聖職階序制)를 재확인했다.
제2회기(1551-1552)에서는 바오로 3세에 이어 율리오 3세 교황이 즉위해 속개됐다. 성체(성만찬), 성사(성례전)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 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됐다. 2기에는 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개신교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이 당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했던 칼빈은 비록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진행과정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개신교 대표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결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통된 토론의 토대가 없었음이 명백해졌고 교황은 개신교 대표들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 토의하는 것을 금했다. 이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공의회가 중단됐다.
제3회기(1562-1563)에서 공의회는 가장 큰 성과를 내었다. 2회기가 끝난 뒤 10년 후에 이어진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심의 대상은 성체 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대한 교리가 규정됐다. 그 외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大赦, 면죄[免罪]),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교구 회의,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됐다. 199명의 주교와 7명의 대수도원장, 7명의 수도회 총장들은 수많은 교령과 개혁령에 서명해 교황에게 보냈다.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 모든 교령과 개혁령을 예외 없이 승인했다.
공의회는 면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이루어지며 그 은총은 성사(聖事, 성례전)를 통해 인간들에게 내려온다고 하여, 성사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을 일반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했다. 성만찬에 관한 화체설(transubstantiation) 확인, 7성사(baptisma[세례], comfirmatio[견진], paenitentia[고해], Eucharistia[성체], ordo[신품], matrimonium[혼인], extrema unctio[종부])는 불가결한 것으로 존속되었으며,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각종 면죄부(免罪符)가 대폭 폐지되었고, 사제(司祭)의 독신이 강조되었다. 성찬 전례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화체설,’ 고해성사의 비밀, 병자성사, 보속(補贖, 보상[補償]), 신품성사, 혼인성사 등의 교리가 명확히 정의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복음서의 진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주교의 권위 하에서 행해져야 했으며, 주교와 사제는 그들 각각의 주교관구와 교구 안에 거주해야만 했다. 나아가 성직자들은 엄격히 선발되어 주교관구와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필자는 이러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역설하고 싶은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루터나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에 상응한 철저한 자기 갱신, 즉 반종교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의 교의를 명백히 했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예딘(H. Jedin)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대응한 최고의 대답”이었다(H. Jedin, Breve histoire des conciles [Desclee, 1960]; http://blog.naver.com/cosmos5619.do).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가 제기한 문제와 관련해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하여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하는 기초를 놓았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로욜라(Loyola, 1491-1556)가 결성한 예수회의 확장과 더불어 개신교의 진출을 막으며 가톨릭 신앙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신학적·교회적인 근본적 재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근대 가톨릭교회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에 맞서 로마가톨릭교회 자신이 스스로를 개혁한 반종교개혁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천주교 신자들도 이 공의회에 대하여 개혁교회가 자신에 대해 사용하는 슬로건인 “항상 쇄신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트리엔트 공의회가 오로지 믿음에다 인간의 선행 부가를 구원 조건으로 확인함으로써 바울이 선언한 “오로지 믿음”(sola fide)에 의한 성경의 복음주의에서 멀어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평가한다. 소아시아 갈라디아교회에 나타난 믿음 외에 행함을 추구한 믿음과 행위 종합주의자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같이 경고하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로마가톨릭교회는 자기편에서 적극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교회일치를 위한 개신교회들(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 등)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교황의 절대적인 통치제도와 성경과 전통의 두 권위, 그리고 성만찬의 화체설 등의 천주교의 교리가 모든 성도 제사장설, 오로지 성경, 영적 임재설 내지 공재설을 믿는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그리하여 서로 간에 좁혀지지 않는 논쟁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7) 제1차, 2차 바티칸공의회: 19세기와 20세기 로마가톨릭의 자기 개혁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 제20회 공의회)는 186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 시대에 열렸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300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는 근대합리주의 ·유물론 ·무신론 등의 근대 반(反)기독교적 철학체계 및 얀세니즘(Jansenism) ·페브로니우스주의(교회에 대한 국가우위설 주장) 등의 이단설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성(無誤性) 교리를 선언하였는데, 교황의 우위성을 교리적으로 확립한 점은 천주교 교회 역사상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의사(議事)를 다루지도 못하고 1870년 10월 20일 정회하였다.
이 회의 결과 교황 무오설에 반대하는 사제 ·신학자들에 의해 구가톨릭교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독일의 사제 되링거(Döllinger)는 익명의 책에서 교황무오 교리를 비판했고 헤펠레 폰 로텐베르그(Hefele von Rottenburg)가 7세기에 공의회가 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의 오류를 죄로 지적한 일을 제시했다(Walther von Loewenich, Die Geschichte der kirche. Von d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 『교회사개론』, 전준식 역 [마라나다, 1995], 450). 교황 무오설은 오늘날 천주교와 개신교 간 종교대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걸림돌이다. 필자는 교황 무오설은 교황직을 절대화하고 교황이라는 인간을 우상화시키는 오류가 있다고 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제21회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에 의해 소집되었는데, 회의 도중 그가 별세하자 바오로 6세(1963-1968)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회의는 1959년 1월 교황 요한 23세의 가톨릭교회의 쇄신(현대화)과 교회(가톨릭과 개신교) 일치를 표방한 담화 발표로부터 비롯되어, 개신교 교파들 중 옵서버 60여 명이 참석하는 등 사상 최대 규모의 공의회로서, 공의회 사상 유례없는 열기를 보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반기독교적 근대 사상인 유물론과 무신론과의 대결을 강력히 제시한 데 반하여, 제2차 공의회는 ‘시대에의 적응’을 내세워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완전 탈피, 과감한 교회제도 ·전례의식 ·교육 ·계시 등에 관한 재해석과 개혁의 자세를 드러내 보여 교회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1965년 12월 8일의 폐회식 전날, 1054년에 있었던 동방교회(東方敎會)에 대한 파문(破門)을 피차간에 취소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근 10세기 가깝게 등져 온 동 ·서 교회 간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성과를 보았다. 이 공의회는 교회 ·전례 ·사목(司牧) ·계시 등에 관한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의 교령(敎令), 기독교적 교육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획기적인 교회개혁의 성과를 거두었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열었다. 개신교를 “형제”라고 칭했다. 평신도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 결과 한국 등 세계의 가톨릭 국가들의 전례(典禮)에서 라틴어 사용 대신 모국어 사용이 단행되고, 한국에서는 신 ·구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게 되었다.
필자는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천주교가 스스로 내적 갱신을 시도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천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종교개혁 당시 445년 전 파문했던 당시 천주교의 신부였던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루터교와 화해를 선언하고 루터교와 개혁교회 등 개신교 신자들을 “형제”라고 받아들인 점이다. 그리고 미사를 각국의 모국어로 집행하도록 했으며, 사제 위주의 예배 진행에 평신도를 참여시키고 평신도 역할을 크게 인정했다는 점이다.
8) “익명의 그리스도인” 사상과 타종교 구원 선언: 종교다원주의 수용
필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타종교와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바람직했으나 ‘타종교도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연 것은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이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길에 독일 신학자 카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프랑스 신학자 공가르(Yves Congar, 1904-1996)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선포한 교회헌장은 이슬람, 불교 등 타종교를 통한 구원을 인정하고 있다. “복음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유일신을 신앙하는 유대인들과 이슬람교도들도 구원의 가능성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2장 ‘하느님의 백성’ 15항 ‘교회와 비가톨릭 그리스도인’).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분명히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16항 ‘교회와 비그리스도인’). 가톨릭교회는 이 교회헌장에서 개신교나 유대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슬람교나 불교 등 타종교에도 구원 가능성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라고 한다.
이러한 교리적 전환을 하는 데 있어서 라너의 “익명적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다음 같이 피력한다. “누가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의 숨은 부르심을 받아들여 양심의 선의를 따라 산다면, 그는 이미 신앙과 희망과 사람 안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익명의 그리스도이라고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내포하고 있는 명시되지 않는 신앙이 그리스도교회와 만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든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양심의 선의(善意)를 따라 살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3세기 카프리안(Caecilius Cyprianus)의 유명한 구원의 공식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수정된 것이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타종교 구원의 선언은 성경의 그리스도를 익명의 그리스도 개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며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선언은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증언한 “오로지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이 선언을 통하여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승에서 벗어나서 가톨릭적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