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수 믿는 것은 예수의 연민의 시선 배우는 것”

[특별대담] 강남순 교수,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3-1)

[편집자 주]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불거졌고 그다음에 고용허가제법이 개정되어 이주노동자들의 퇴직금 수령이 출국 후로 이월되는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일들은 동성애자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을 이웃으로 간주하지 않는 배타성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사회 일각에서 사마리아인의 이웃사랑을 실천할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던 때에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의 강남순 교수가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을 주제로 국내에서 강연을 가졌다. 본지는 강 교수의 주제가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해 매우 시의적절한 지혜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강 교수와 대담을 추진하였다. 대담은 7월28일(월) 강 교수가 29일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날 편집국장과 지유석 기자가 동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담의 채록은 객원기자인 백결, 이가람 연세대 신과대 학생들이 기꺼이 맡아주었다.   

편집국장(문): 저희가 교수님을 알게 된 계기는 WCC 웹사이트에서 WOCATI(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 World Conference of Associations of Theological Institutions) 관련 뉴스가 나왔는데, 그 뉴스에서  교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세계신학교육기관들의 협의회에서 회장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한국 신학의 위상을 발견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신학대학교의 대표로서 회장직을 맡고 계신가 생각했었는데, 교수님의 소속이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대학교여서 좀 특이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우선 WOCATI가 무슨 일을 하는 기관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세계신학교육기관들의협의회(WOCATI) 회장 강남순 교수(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CU) 브라이트 신학대학원)를 만났다. ⓒ사진=지유석 기자
강남순 교수(강): 제가 WOCATI 일에 관여하기 시작한 게 2002년이에요. 저는 그때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그 당시 PTCA(Programme For Theology And Cultures In Asia)라는 아시아 조직의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 당시 한국신학교육기관 협의회인 KAATS는 아직 WOCATI의 회원이 아니었지만 PTCA는 회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4년마다 한 번씩 회원 단체들을 모아서 총회를 하는데 제가 PTCA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가 WOCATI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2002년부터 부회장직을 맡게 되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인 2008년에 그리스 데살로니키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에서 열린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WOCATI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세계의 신학교육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육이라고 하는 게 어느 지역에서 실시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잖아요? 물론 이 세계 모든 곳의 신학대학들이 점점 이제 북미의 구조를 따르려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사회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혹은 지정학적 문제 등으로 인해 신학교육 자체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부면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WOCATI에서는 세계의 신학대학들이나 신학자들이 어떻게 이 시대의 필요를 반영하거나 대응하는 신학교육을 하고 있는지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 정보를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면서 회의도 열어서 서로 간에 도전을 하게 합니다. 신학교육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주기적으로 학회나 협의회를 개최하지요.  
문: 그 과정에 신학교육기관들에 대한 학력 인증체계도 개발할 수 있겠군요?  

강: 그렇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학대학들은 북미신학대학협의회(ATS: The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와 또한 미국 전역을 여섯 지역으로 나누어 학력인증 심사를 하는 정부기관인 고등교육학력인증협의회(CHEA: Council for Higher Education Accreditation)에서 학력인증을 받습니다. 물론 어떤 신학대학들은 이 둘 중 한 기관에서만 인증을 받기도 하는데 두 곳 모두에서 학력인증을 받아야 학교나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로 유리하지요. 그런데 한국과 같이 신학대학들이 정부기관에서만 학력인증을 받아야 되는 나라도 있고, 어떤 지역은 신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고등교육구조에 들어가지 않아서 소위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학력인증을 받지 못해서 신학생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갈 경우 학사나 석사 학위 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마다 신학교육에 대한 학력인증 구조나 그에 따른 평가기준이 다릅니다. 따라서 세계 각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신학교육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기준들을 설정할 것인가? 또는 그 기준들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신학교육의 질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등에 대해 복합적인 논의를 하는 단체가 필요합니다. WOCATI가 그 일을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개최하는 세미나에 각국의 대표들이 참석해서 발제하고 토론하면서 결과를 산출합니다. 그 결과물들을 e-book이든지 단행본으로든지 출판해서 세계적으로 공유하지요. WOCATI는 이런 작업을 하는 유일한 단체이기 때문에 저는 이것을 일종의 세계신학교육운동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WOCATI의 활동내용이나 목적이 고착된 것이 아니라 신학교육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서로 주고받으며 자국의 신학교육의 표준을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설정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지요.   
문: 세계 신학교육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방향성을 점검하기도 하는 역할을 하는군요?   
강: 네. 특히 요즘 21세기는 대륙별로 서로 고립돼서 지내는 게 아니라 한 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다른 데하고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WCC도 마찬가지만 세계의 기관들이 다 지금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WOCATI는 재정적 어려움을 타결하는 과제만이 아니라 이제 일하는 방식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환할 것도 요청되는 시기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지도부들이 지속적으로 바뀌는 기관만이 아니라 신학교육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개별 신학대학들의 지도자들이나 단체들도 활동할 수 있도록 WOCATI의 구조 자체를 대대적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3월 달에 제네바에서 열린 임원회의에서 거대단체만이 아니라 개별적 기관이나 학교들도 멤버로 가입할 수 있도록 WOCATI 구조를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신학교육현장에 있는 교육자들과 연계되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문: 중책을 맡으셨고 매우 다양한 일을 하실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신학을 접할 기회 속에 놓여 있으니 혹시 그런 경험들이 코스모폴리탄적인 이웃사랑의 개념을 자극한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강: 분명히 영향이 있습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는 개념은 매우 오래전부터 서구 전통에서는 쓰여져 왔지만 “코스모폴리탄 신학”이라는 개념을 갖고서 책을 쓴 것은 사실 제가 제일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된 동기는 아마 제가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외국인으로서의 경험을 직접 피부로 겪었기 때문에 그러한 필요성을 잠재적으로 느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서 독일에서 3년 살면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학생으로 6년, 미국교회 담임목회 1년, 그 다음에 영국에서 3년 동안 가르치면서 여러 나라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어요. 이러한 삶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씨름해온 물음중의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나 미국, 그리고 영국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해서 접할 기회가 없었지요.       
▲강남순 교수가 자신이 주창한 코스모폴리탄 신학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다양한 신학과 다양한 인종을 접할 기회가 자신에게 있어서 이웃사랑의 개념을 자극한 점에 대해 공감하며, 자신의 경험이 코스모폴리탄 신학의 동기가 되었음을 알렸다. ⓒ사진=지유석 기자

그런데 2007년, 미국 드루(Drew) 대학교에서 열리는 <초학제적 컨퍼런스>(Transdisciplinary Conference)에서 발제해줄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 발제의 주제는 탈식민담론의 대가인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C. Spivak)의 사상과 관련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때 그의 연구업적들을 세밀하게 조명하면서 그의 사상 속에서 나의 학문적 관심들과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인간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외국에서 활동할 때에는 아시아 사람, 또는 코리안이라는 이름표가 붙고 한국에서도 종종 페미니스트 등의 이름표가 붙여지곤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저를 다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특히, 미국에서는 인종 문제, 섹슈얼리즘 문제, 젠더 문제, 지정학적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서 저에 대한 사회적 표지들은 가끔 오해되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하는 개념은 제가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서 예민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은연중에 제가 세계를 보는 시각으로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야트리 스피박을 연구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가 ‘이 세계의 무수한 이론들이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마음을 바꾸는 사랑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글을 읽어보면서 사실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웃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있다고 하는 시각과, 그녀가 플래니터리 러브(planetary loves), 즉, “우주적 사랑”이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바꾸는 것,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그러한 우주적 사랑이야말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데, 그것을 종교적 언어로 바꾸면 기독교의 예수가 말하는 이웃사랑과 다르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러한 우주적 사랑의 개념과 연관된 주제들을 계속 찾아보니까 세계화 이후에 법학, 정치학, 철학 등에서 코스모폴리터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글을 출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 용어로서 명시되지 않았지만 세계화된 일상 속에서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개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에 고용허가제 법을 개정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퇴직금 수령을 ‘출국 후 14일 이내’로 변경한 것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인데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의 접근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강: 맞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이라든지, 혹은 난민들과 같이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해주고 인정해줘야 되는가의 문제, 혹은 전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라든지 코스모폴리탄적인 권리에 대해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고 그에 대해 다 이야기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정작 기독교를 포함한 여타의 종교들 안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2007년 드루 대학교의 컨퍼런스에서 “Towards a Cosmopolitan Theology”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그 컨퍼런스에는 가야트리 스피박도 왔었지요. 그 컨퍼런스 이후 모든 발제물들이 Planetary Loves (Fordham University Press, 2010)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져 나왔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발제한 코스모폴리탄 신학이 그 책의 한 장으로만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점점 그 글을 완성하기 위한 작업을 해 나가면서 코스모폴리탄 사상에 굉장히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범주를 확장하면서 그 개념을 천착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3년여 이상의 연구과정을 거쳐서, Cosmopolitan Theology: Reconstituting Planetary Hospitality, Neighbor-Love, and Solidarity in an Uneven World (Chalice Press, 2013)라는 제목의 영문 서적이 출판되었습니다.   
문: 그 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주제들이 무엇인지요? 예를 들면, 책의 내용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할 만한 소재는 무엇입니까?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강남순 교수가 자신이 저술한 의 얼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지유석 기자
강: 이 책은 7개의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의 부제에서 보다시피 제가 그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이웃사랑과 환대, 그리고 연대의 문제입니다. 특히, 환대(hospitality)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환대가 아니라는 점을 밝힙니다. 쟈크 데리다 (Jacques Derrida)가 이야기하듯이, 저는 환대의 문제가 어떻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난민 문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의 문제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는가를 세심히 조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코스모폴리탄 신학에 대하여 『기독교사상』에 연재하고 있는데, 가능하면 각주를 최소화하고 학자들만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참조하도록 평이한 문체로 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에 한국말로도 코스모폴리터니즘에 관한 책을 출판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논의가 종교와 사회에서 보다 확산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 그러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이웃 사랑이 예전부터 이야기되어오는 사해동포주의의 어떤 종교적인 버전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개념적인 영역을 언급하는 것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강: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많이 오해되는 점들 중 하나는 전통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와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책의 한 부분에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를 다룬 ‘무엇이 코스모폴리타니즘이 아닌가’라고 하는 부분을 넣었어요. 실제로 코스모폴리터니즘 사상은 참으로 복잡한데 매우 단순한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오해가 생기기 때문이지요. 아마 분명히 간결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보편주의가 위로부터 출발하는 연역적 접근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인간의 개별성 (singularity)을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즉 보편주의는 “인류”와 같은 어떤 거대한 추상적 집단으로부터 시작해요.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같은 구체적인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보편주의와 그 맥락이 유사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그 출발점과 전개과정, 그리고 그 궁극적 목표가 보편주의와 굉장히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인류라고 하는 보편성으로 위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세계안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점에서는, 마치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을 더 귀하게 여겨 찾아다니는 예수의 비유와 같이 한 사람의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 코스모폴리탄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코스모폴리타니즘에서는 그냥 동질성으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사람 간의 다름 자체를 인정합니다. 비교하지도 않고 개별인간들이 지닌 다름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코스모폴리탄 사상은 개별성의 윤리 
문: 다름을 인정한다는 말은 차이성 (difference)을 용납한다는 말이지요?   
강: 다름을 인정한다고 할 때 세부적으로 쓰는 용어 중에서 알터리티(alterity)라고 하는 개념이 있어요. 차이성을 지칭하는 “difference”와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차이성이란 언제나 소위 비교하는 대상을 필요로 해요. 내가 누군가와 다르다고 비교할 때는 비교하는 대상이 필요하고, 비교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할 때는 늘 인간 중심으로 기준을 정해 놓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동물이 언제나 열등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죠. 사람 사이도 똑같아요. 누가 기준을 정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 기준에 비해서 열등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우월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요. 이처럼 차이라는 개념에는 매우 위험한 요소가 있어서 이제 임마누엘 레비나스 등 많은 철학자들이 알터리티라는 개념을 그들 사상의 중요한 전거로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모폴리탄 사상을 간결하게 표현한 어구는 사람들 간의 다름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개별성의 윤리’(ethics of singularity)라고 말할 수 있어요.   
문: 네... 세계화의 과정에서 문화가 집단화되고 동질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경향에 대한 체킹 포인트가 될 수 있겠군요?   
강: 그렇습니다. 세계화의 추세 속에 동질성을 굉장히 많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데 그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왜냐하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성 소수자 문제도 이성애가 기준이 이미 되어버렸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다름’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이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보는 시각이 있어요. 이성애가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성 소수자에 대한 문제는 사실은 깊이 들어가 보면 이성애가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구조에 대해 근원적으로 도전하니까 심각한 문제로 삼는 거죠. 
코스모폴리타니즘으로 들어가다 보면, 법학이나 사회학, 철학 등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언어를 조금 바꾸면 기독교의 예수가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제는 벙커원(Bunker 1) 교회에서 설교를 했어요. 제가 그 교회에서 한 설교의 제목은 “경계를 넘어서는 이들”이었습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타자를 보는 시선이 그 사람의 국적이나 성별이나 인종이나 어떤 육체적 능력이나 성적 성향 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각으로, 연민의 시선으로 보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 연민의 시선은 타자에 대한 정죄의 시선과는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에 대한 정죄란 사실 신의 영역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지 아닐지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신의 일이거든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것처럼, ‘도대체 신이 아닌 내가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Who am I to judge?)라는 태도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매우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문: 이미 설정된 정상성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개별성을 삭제하고 정상성의 기준으로 사회를 획일화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Who am I to judge?의 자세를 실행하는 입장이겠군요?   
강: 제 책에서 저는 ‘코스모폴리턴 시선’(cosmopolitan gaz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시선”이란 언어 너머의 강력한 언어라고 저는 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가 삭개오를 만났을 때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는 삭개오를 바라봤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삭개오는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예수는 왜 그 삭개오를 바라보게 됐을까? 우리가 지닌 “바라보는 방식”(mode of seeing)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타자를 또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장소에서도 어떤 사람은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못 보곤 하는 경우가 있지요.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타자를 향해 증오나 정죄의 시선이 아닌 예수가 지닌 “연민의 시선”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가 한 일은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 must stay at your house today”인데 여기에서 “must”를 썼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환대라고 하는 개념이 주인과 손님의 경계를 절대화시키는데 예수는 스스로 삭개오의 집에 자신을  초대함으로써 “주인”과 “손님”이라는 고착된 경계를 단호히 넘어서서 허물어버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과제는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세계를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  
문: 그렇군요. 손님이 환대를 요구하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역할이 역전된 것이군요. 환대의 개념적 경계가 흐려진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강남순 교수의 코스모폴리탄 신학에서 환대라는 개념적 정의는 실로 중요하다. 그녀에게 있어서 환대의 개념은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환대 개념 정립에 있어서 데리다의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 개념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강: 네. 환대의 개념에 대해서 데리다의 생각을 좀 나누고 싶군요. 데리다는 환대를 상대적 환대와 절대적 환대로 나누어요. 상대적 환대는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절대화되어 있어요. 경계가 분명하죠. 주인이 손님을 초대하면서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Make yourself at home”(편하게 지내세요) 그러잖아요? 거기에는 말하지 않은 단서가 늘 붙어있습니다. “as long as you obey our rule”(우리 집의 규칙을 지키는 한에서만)이라는 단서가. 남의 집에 가서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낸다고 해서 그 집 침실 문 열어보고 냉장고 문 열어보면 안 되잖아요? “내 집의 규칙을 잘 지키는 한에서만 당신은 내 손님이다”는 것을 상대적 환대라고 하죠. 이것을 이주노동자들의 법과 연계시키면 국가는 철저하게 그들에게 상대적 환대를 집행하는 것이죠. “우리가 만든 법을 당신이 따르는 한에서만” 그들은 손님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러한 태도니까 코스모폴리타니티의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조건적인 환대죠. 주인이 정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지켜야만 한다면 진정한 환대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건 언제나 제한적 환대로서, 진정한 무조건적 환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의 두 축을 늘 생각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무조건적 환대의 기준을  참고로 하여 조건적 환대를 다각도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현실세계에서 이 무조건적 환대를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완전한 실천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참조해야 합니다. 사실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간의 구체적인 세계를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고 신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지 않습니까?   
문: 그러면, 삭개오의 일화를 통해서 예수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참조체계를 제시한 것이군요? 연민의 시선과 절대적 환대, 혹은 무조건적 환대라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불가능해보이기만 할 뿐인 참조체계일 수 있겠습니다. 
강: 그렇습니다. 저는 이 무조건적 환대의 개념은 예수가 가르치는 이웃사랑의 개념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부합하잖아요? 사실 예수의 이웃사랑은 매우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웃사랑의 말씀은 예수가 처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레위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거기서 이웃은 유대인이고, 소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이웃의 범주에 속하지 않지요. 그래서 예를 들어서 십계명에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을 때 그 이웃은 유대인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제한된 의미의 전통적 “이웃” 개념을 붕괴시켜버립니다. 그 이웃에다 “원수”까지 포함시켰으니까요. 구약성서에서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원리를 역설하는데, 예수는 이러한 보복의 원리가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이 점에서 예수의 이웃사랑의 요구는 참으로 혁명적이지요.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를 예수는 지시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만약 내가 원수를 늘 원수로 본다면 사실 사랑은 불가능하잖아요? 저는 예수가 이야기하는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닌 이웃과 원수의 고정된 인식과 그 경계를 넘어서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니까요. 코스모폴리탄 이웃사랑의 개념은 이 지점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웃사랑의 개념이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을 넘어서서 이 세계의 지역들과 연계된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다양한 타자들에 대한 포용과 사랑의 구체적 실천으로까지 확산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계속)

[대담= 이인기 편집국장, 정리= 이가람·백결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 사진= 지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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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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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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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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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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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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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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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