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트 로커>에서의 제임스 중사(우)와 샌본 하사(좌). ⓒ영화 스틸컷 |
전쟁은 인간을 극한의 공포로 몰아넣는다. 특히 전장의 군인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처지이기에 이들이 느끼는 공포는 보통 사람의 상상 이상이다. 여성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의 2008년 작 <허트 로커>는 전쟁터에서 겪는 병사들의 심리적 혼란을 그린다.
영화는 이라크에서 폭탄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EOD의 일상을 보여준다. 제임스 중사, 샌본 하사, 엘드리지 일병, 이렇게 3인으로 구성된 EOD의 임무는 위험천만 그 자체다. 자칫 전선 하나만 잘못 끊어도 일대를 다 날려버릴 수 있어서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 적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압권은 폭탄이 터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 모래투성이의 땅은 미세하게 들렸다가 꺼져 내린다. 탄피도 슬로모션으로 지표면에 떨어진다. 이 장면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로 승부를 건다. 제임스 중사로 분한 제레미 레너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제임스 중사는 극한의 공포를 즐기는 것 같다. 폭탄이 가득 실린 차량에 혼자 들어가 해체를 시도한다. 그는 이때 대담하게도 모든 보호 장구를 벗어던진다. 그를 배후 지원하는 샌본 하사의 만류도 뿌리친다. 제레미 레너의 연기는 극한의 공포를 넘나드는 제임스의 심리를 잘 표현해준다.
샌본 역을 맡은 안소니 마키도 제레미의 연기를 받쳐준다. 샌본은 공포를 즐기는 듯한 제임스 중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부하와 짜고 그를 죽일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함께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안소니 마키는 보는 이들에게 샌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변화를 실감나게 전달해준다.
극 도입부와 중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대배우 가이 피어스와 랄프 파인즈는 극의 집중도를 높여준다. 이 두 배우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적의 폭탄과 총탄에 의해 차례로 희생된다. 이 대목은 연출자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연출자인 비글로우는 관객이 극의 전개를 예측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제레미 레너, 안소니 마키 등 조연급 무명배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 나갔고, 가이 피어스와 랄프 파인즈는 그저 양념 정도로만 사용했던 것이다.
섬세한 감정 묘사, 그러나 미완의 걸작
▲<허트 로커>는 이라크에서의 폭탄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EOD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영화 스틸컷 |
전체적으로 완성도는 매우 높다. 특히 여성 감독이 남성의 전유물인 전쟁을 주제로 다뤘고, 전쟁 최일선에 내몰린 장병들의 심리를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린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볼 때마다 불편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먼저 이라크인들의 고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자본이 만든 영화이니 한계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미군 병사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선량한 민간인을 마구 살상하는 게 이라크 현지의 실상이다. 이런 실상이 원천 제거된 점은 아쉽기 그지없다.
이 영화가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왜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 전장에 내몰려 극한의 공포를 겪어야 했던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결여다. 이런 문제의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이라크 전쟁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논리를 해부해야 한다. 미국은 처음엔 대량살상무기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동 민주주의의 정착을 명분으로 내세워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전쟁은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펼친 미국의 승리로 손쉽게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진짜 전쟁은 미국이 전쟁 종결을 선포한 그 다음부터 펼쳐졌다.
미군은 이라크 점령 후 대량살상 무기를 찾는데 총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독재자 후세인이 대량 보유하고 있다던 대량살상 무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후세인 이후 이라크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이 후세인 이후 이라크의 정치적 청사진을 분명히 마련해 놓지 않고 군사행동을 감행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 미군은 이라크에 발이 묶였고, 계속해서 희생자를 내고 있다.
이 영화 <허트 로커>는 이렇게 미국이 불편해할 진실을 잘 덮으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미군 병사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사실 이런 영화는 위험천만하다. 인간성을 내세우는 척 하면서도 오로지 미군의 시선에서만 전쟁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는 2010년 이 영화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줬다. 미완의 걸작에게 준 상 치고는 과분한 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