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교회 설 자리는 고통받는 사람들 곁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편집자 주] 이제 다시 세월호 특별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외신 기자들은 교황의 행보를 자세히 타전했고, 이에 힘입어 세월호 특별법은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제 교황은 떠났고, 유가족들은 다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김근주 교수는 ‘교만과 공의’라는 설교를 통해 교회가 서야할 자리는 아픔 당한 유가족들의 곁이라고 일갈했다. 김 교수의 설교는 8월18일(월)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렸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촛불 기도회에서 행해졌다. 아래는 김 교수의 설교 전문이다.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베리타스 DB
느부갓네살이 높이 솟은 나무와 그 나무가 베어지는 꿈을 꾸었을 때, 다니엘이 그의 꿈을 풀이하였다. 높이 솟은 나무는 왕을 상징하는데, 그 나무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베어지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줄을 깨달을 때에야 회복된다는 것이 꿈의 의미였다.    
왕을 향한 다니엘의 권면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느부갓네살의 잘못에 대해 다니엘서가 교만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4:37에서도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는 느부갓네살 스스로의 언급이 있고, 특히 5장에 가면 다니엘이 벨사살 왕의 교만을 책망하면서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교만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교만한 왕에게 다니엘이 권면한 내용은 공의를 행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왕은 그것을 행하지 않았고, 그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왕의 교만은 공의를 행하는 삶의 정반대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만은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교만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품에 관한 것이지 않다. 교만은 단순히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이지도 않다. 살면서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남들이 알아주고 칭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 수 있다. 그것이 그를 패망케 하는 것이지 않다. 그것을 교만이라 여겨 지나치게 괴로워할 일이지 않다. 정말 문제가 되는 교만은 자신의 마음이 너무 높아져서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가난한 자 긍휼히 여길 일을 하기에 자신을 너무 높다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교만을 자신의 마음 속 수련으로 만들지 말고, 성품 수련으로 만들지 말라. 교만은 공의의 부재이며,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교만은 남을 돌아보고 나누기에 너무 높은 자신이다. 그러니 교만을 버린다는 것은 남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에 대한 회개가 한 없이 자신을 낮춤에만 집중될 수 있다. 자신의 인격 수련이 목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섬기고 나누는 삶으로의 변화가 우리 신앙의 초점일 수 있다.
“공의”로 번역된 아람어는 “찌드카”로, 구약의 다른 본문들의 히브리어 “쩨다카”와 동일한 단어이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대체로 “공의”로 일관되게 번역하였으나, 때로 “의” 혹은 “정의”라고도 번역하였다. ‘(죄를) 사하다’로 옮겨진 단어는 ‘찢다, 부수어 버리다’를 의미한다. 앞문장과 여기에서 “죄”와 “죄악”이라고 번역된 표현은 각각 직역하면 ‘당신의 죄’와 ‘당신의 불의’이다. 여기에 ‘찢다’라는 동사가 한 번 쓰여서 두 개의 문장 모두를 포괄한다. 그러니 이 두 문장을 직역하면, ‘공의로 당신의 죄악을 부수어 버리소서,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풂으로 당신의 불의를 (부수어 버리소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의 권면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었다. “공의”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줄기차게 명령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공의로 다스리시니(시 97:20), 하나님은 그 백성에 공의를 행할 것을 명령하신다(창 18:19). 이스라엘이 공의의 열매를 맺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엎어 버리신다(사 5:1-7). 이스라엘의 왕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이며, 공의를 행할 때 그 나라에 부강과 평안이 임하게 된다(시 72편). 다윗의 후예로 오는 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공의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점이다(사9:7; 렘 23:5). 그리고 이러한 공의 행함의 핵심적인 측면은 바로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이 점은 시편 72편에서 잘 드러난다. 72:12-14에서는 공의로 통치하는 왕의 통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이에 따르면 공의로 통치하는 왕은 궁핍하고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존재 이유인 것처럼 통치한다. 고통 받는 이들의 피가 왕의 눈앞에서 그토록 존귀하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사람의 피 한 방울로 인해 괴로워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실 이러한 왕의 대표는 우리 하나님일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왕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왕이 없었더라면 고통 속에 도움을 얻지 못했을 이들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돕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 만일 왕이 있어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권세를 주신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그러한 왕은 하나같이 패망하였고 심판을 받았다.   
구약의 역사는 이러한 끊임없는 반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공의의 삶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인데, 다니엘이 이방 왕을 향해 조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약의 규례들이 흔히 이미 믿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주어진 규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다니엘은 하나님 백성의 규례를 이방 왕의 통치에 고스란히 적용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서의 삶과 이스라엘 땅에서의 삶을 구분시키지 않고 통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의 권면은 구약 신앙의 핵심을 일상과 세속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니엘이 왕에게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을 조언했다는 것은 이제까지 왕의 통치가 그러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개역 성경은 ‘사하다’로 번역했지만, ‘부수다, 찢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니 이 구절에서는 사람의 행동이 죄 사함을 가져온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공의로운 행동을 통해 이전에 행했던 어리석고 불의한 행동을 바로 잡아 나가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죄 사함의 방법이나 비결을 말하고 있다기보다, 왕이 어떤 통치를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왕을 향한 강력한 명령이다. 왕은 가난한 자보다는 하늘에까지 닿는 나무로 상징되는 크고 강력하고 화려하고 군림하는 나라를 추구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실 두려운 미래 앞에서 이제라도 왕은 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더 높고 강한 것을 세울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땅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니엘의 권면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의 통치는 강력하고 위세가 대단하였지만, 왕의 진정한 권세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니엘은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공의의 실천 그리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기임을 분명히 한다. 권세는 공의로, 가난한 자 살피기로 드러나야 한다. 그렇지 않은 권세는 결국 가난한 자와 약한 이들을 실제로는 짓밟고 구속하면서도 제국이 주는 평화랍시고 그 가운데 강제로 붙잡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만의 반대말은 겸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니엘에 따르면 그러한 겸손은 높이 솟은 나무처럼 위로, 위로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느부갓네살을 비롯한 모든 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권력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낮추실 것이다. 그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단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제국의 힘이 그들을 지키지 못한다.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권세,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권세는 반드시 신속하게 멸망하고 말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이러한 위기 가운데 거의 망할 뻔했고, 그 아들 벨사살에게도 동일한 위기가 닥쳐왔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을 향해서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되 공의를 행할 것을 권면하였고, 이제도 벨사살을 향해 교만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느부갓네살도 벨사살도 이를 듣지 않고, 마침내 그 멸망의 날이 임하게 되었다. 강한 제국이라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무너지고 패망하게 된다. 제국의 안녕은 그들의 우상 숭배로 지켜낼 수 없으며 그들이 지닌 군대와 부귀로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는 어떠한가? 지금의 권력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력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을 감당하고 있는가? 지금의 권력은 공의를 행함으로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그런데 아직도 광화문에서 어제까지 30일이 넘도록 단식하는 김영오씨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만일 권력이 있어 고통 가운데 죽어간 가난한 아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권력을 어떻게 다루실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왕을 죽이시고 그 나라를 없애실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국가의 위세와 힘을 가진 이들의 위세는 그들의 권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 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경우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세월호 진상규명과 이후의 대책이 반드시 유가족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내가 유가족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어떻게 그 큰 배가 침몰하게 되었는지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는 것이 필요하다. 사고가 난 지 100일이 넘어가는 데도 진상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이 나라 정부와 국회가 이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제라도 국회와 대통령은 세월호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을 실질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속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고,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한 사람의 억울함을 해결하지 않는 대통령이 무슨 경제를 살릴 수 있으며, 상황을 고쳐나갈 수 있을까? 현재까지의 상황은 대통령과 국회가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감당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교만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 반드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 낮추시며 패망케 하실 것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심을 드러내실 것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의 독재자들을 심판하셨듯이, 이제도 대통령과 국회를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권력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가? 시편이 말하는 왕은 단지 통치 권력이 아니라 우리 교회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왕인 우리는 고통 받는 이들의 피 한 방울이 정말 우리 눈에 소중한가?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유가족들이 부르짖는 한, 교회 역시 함께 악한 재판관을 찾아가는 과부의 마음으로 외치고 부르짖고 소리 질러야 할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통해 이 나라가 얼마나 불의하고 부당한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교회가 설 자리는 그 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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