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오스카 그랜트는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살던 평범한 흑인 청년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보고 돌아오던 중 변을 당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미국 사회의 화약고와 같은 인종문제에 불을 댕겼다.
신인 감독 라이언 쿠글러는 데뷔작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원제: Fruitvale Station)를 통해 그가 죽음을 당하기 전 상황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오프닝은 다소 혼란스럽다. 휴대폰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화면에서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실랑이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이어 영화는 주인공 오스카 그랜트가 이생에서 남긴 마지막 삶의 궤적을 시간대별로 추적해 나간다.
그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처지다. 22살의 젊은 나이이지만 벌써 네 살 난 딸을 둔 아빠다. 그러나 직장이 없다. 대형 마트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한 상태다. 여자 친구인 소피나는 이런 그가 못마땅하다. 그래서 그만 보면 성화를 부린다.
그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마트 주인에게 사정한다.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냉대일 뿐이다. 이러자 마리화나에 손대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는 이미 뒷골목에서 마리화나를 팔다 경찰에게 붙잡혀 철창신세를 진적도 있었다.
일자리가 없어 마리화나에 다시 손대려는 순간, 그의 내면은 혼란에 휩싸인다. 타이틀 롤 오스카 그랜트 역을 맡은 마이클 B. 조던은 자신의 캐릭터에 빙의된 모습이다. 특히 오스카가 마리화나의 유혹을 받는 장면에서 보여준 내면 연기는 보는 이들의 내면마저 요동치게 한다.
오스카는 기나긴 고민 끝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집에 숨겨둔 마리화나도 버린다. 그리고 이 사실을 소피나에게 고백한다. 그녀는 그의 정성에 감동한다. 그래서 그와 결혼을 약속한다. 마침 이 날은 2008년의 마지막 날이다. 이에 그녀는 그와 다른 친구들을 불러 불꽃놀이를 보러 가자고 한다. 오스카·소피나 커플,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불꽃놀이와 함께 한 해의 마지막 밤을 흥겹게 보낸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 다른 승객들도 들뜨긴 마찬가지다.
사건은 바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벌어진다. 오스카가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 자신과 세력을 다투던 백인 건달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지고 끝내 주먹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자 즉각 경찰이 달려온다. 그런데 경찰은 백인들은 놔두고 그랜트와 친구들만 체포한다. 이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한다. 지하철 안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승객들도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인증샷을 찍으며 경찰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그러던 찰나, 총성이 울린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그랜트의 여자 친구는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못한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밤을 넘기지 못하고 그는 과다출혈로 숨을 거둔다.
대다수 흑인은 여전히 차별 당해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영화의 러닝타임은 85분으로 여느 극영화에 비해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이야기 자체에 극적 요소가 별로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미국 사회에서 오스카 그랜트와 비슷한 처지의 흑인은 너무나도 많다. 흑인 대부분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리고 성장해서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사회 언저리를 맴돌다가 이따금씩 범죄의 유혹에 빠져 철창신세를 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나마 오스카는 정상적인 삶을 살고자 발버둥 친 선량한 흑인에 속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공권력이다. 공권력은 흑인에 대해 가혹하기 그지없다.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총탄 세례를 받는 일이 허다하다. 오스카 역시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체포돼 총을 맞았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먼저 시비를 건 백인들은 무시한 채 흑인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이런 흑인의 처지는 미국의 정치권력지도, 그리고 문화현상과 대비해 볼 때 더욱 비참하게 드러난다.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연거푸 미국 권력서열 3위인 국무장관을 지낸데 이어 마침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에릭 홀더 현 법무부 장관도 미 헌정사상 최초의 흑인 법무부 수장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흑인 지휘자와 백인 부하의 구도가 일반화됐다. 롤랜드 에머릭 감독의 영화 <화이트 하우스 다운>, 드라마 <24>에선 흑인 대통령이 등장하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에선 흑인 총사령관이 백인 부하들을 진두지휘한다. 그리고 흑인 자유인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다룬 <노예 12년>은 보수성향이 강한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당당히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흑인이 정치, 문화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강해진 듯 보인다. 그러나 오스카 그랜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최근의 문화현상이 선택받은 소수의 전유물일 뿐 대다수 흑인의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폭로한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
최근 미국에선 또 한 명의 오스카 그랜트가 죽임을 당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9일(토) 미국 미주리 주의 소도시인 퍼거슨 시에서 열여덟 살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이클은 사망 당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고, 두 손을 들었으나 경찰은 이에 아랑곳없이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또 부검 결과 마이클은 머리에 두 발, 네 발은 오른 팔에 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죽음은 격렬한 항의시위를 몰고 왔다. 비단 어린 흑인 소년의 참혹한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횡행했던 공권력의 과잉 단속과 차별, 폭력이 흑인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오스카는 죽기 전 다양한 모습을 남겼다. 마트에 장보러 온 예쁜 백인 여자 손님에게 작업을 거는 한편, 마리화나의 유혹 앞에 고뇌하기도 하고, 딸 앞에 아빠로서 부끄럽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무일푼이지만 여자 친구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고, 연말을 맞아 친구들과 불꽃놀이를 보며 새해를 맞이했다. 이런 모습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삶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일상은 일순간 산산조각 났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피부색이 검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또 다른 이름의 오스카 그랜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의 하루는 더더욱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