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태영 칼럼] 역사인식

하태영·삼일교회 담임목사

▲하태영 삼일교회 담임목사
국무총리 후보자였던 문창극. 그가 한때 교회에서 행한 언설로 인한 논란은 본인의 총리후보 사퇴로 일단락 된 듯합니다. 하지만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고 보는 게 좋겠지요. 문창극을 둘러싼 우리 사회 ‘역사인식’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쪽은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으로 한 말을 악의적으로 왜곡한다는 것이고, 반대하는 쪽은 그의 친일적인 발언은 총리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의 요지는, 더럽고 게으르고 자립심 없는 백성, 그의 표현대로 ‘이조 오백년 동안 허송세월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해 섭리하신 것이 바로 일제 식민통치이고, 하나님께서 미국을 붙잡기 위해 주신 게 6 · 25전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6 · 25때 미국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때 분단되지 않았다면 소련과 중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공산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특정한 장소에서 민족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로 수렴하는 그의 논리는 크게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그가 아니더라도 평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의 논리는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침탈을 명분으로 삼은 논리와 동일하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해방교육을 주창한 파울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문화 침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침략자에게 그들이 본래 열등하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일본 우익 인사들은 식민지 지배는 조선을 개화시킨 것이지 수탈한 게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들에게 조선 민중은 게으르고 의존적이고 무식한 백성입니다. 선진 문명으로 개화시켜야 할 미개인들이어서 무력 사용은 질서유지를 위해 불가피합니다. 위안부는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성을 판 것이니 굳이 사과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창극을 친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침략자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가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안중근을 가장 존경한다는 문창극은 나름으로 애국의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애국의 열정은 일제의 조선침탈을 옹호하거나 선도한 자들의 열정과 결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도 그렇습니다. 저들의 논리는 유신독재를 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하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애국이라는 열정으로 자기최면을 건 자들의 친일논리와 유신독재 미화는 이렇게 서로 손잡고 지금도 견고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집단학살한 자들도 애국의 열정만큼은 도도합니다. 
저들은 조선민중이 왜 그처럼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습니다. 조선말기 지배층의 무능 부패 악행 파렴치에 대해서는 눈을 감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문창극의 표현대로 ‘일본이 이웃인 지정학적 축복’ 때문이 아니라, 침략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의 도움이 컸던 건 사실이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국민 스스로 깨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백성을 보는 관점 즉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주신 메시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마태 9:36-38). 이는 당시 유대교는 상상도 못한 민중에 대한 인식입니다. 유대교로서는 더럽고 게으르고 배제시켜야 할 민중이 예수에게는 영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문창극의 자국민에 대한 인식이 바로 유대교 지도층의 민중에 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상당수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유대교 지도층의 인식에서 멀지 않습니다. 매국노라 할지라도 정말 제 나라 망하기를 바란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친일로 변절한 윤치호처럼, 나름으로 애국의 열정이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왜 친일로 매도되고, 왜 변절로 매도되고, 왜 독재 옹호자로 매도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분하다고 항변합니다. 좌파의 책동이라고 입에 버캐를 물기도 합니다. 나라사랑의 열정만으로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바른 역사인식으로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 이 글은 공동체성서연구원이 발간하는 『햇순』 (통권222호, 2014년 8월)에 실렸으며 저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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