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김명혁 목사, 수원 동문교회에서 설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강변교회 원로)가 오는 9월 7일(일) 수원 동문교회에서 ‘열매 맺는 신앙생활’(마7:16-21)이란 주제로 주일예배 설교를 전한다. 설교자의 동의를 얻어 아래와 같이 설교 전문을 싣는다.

“열매 맺는 신앙생활” 수원 동문교회(2014.9.7)

제가 수원 동문교회에 자주 와서 설교를 합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지 두 달 후인 2008년 3월 19일 주일 여기 와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같은 해 12월 28일 주일 "마무리를 잘 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2010년 12월 19일 “기쁘고도 슬픈 사랑으로 오신 왕께 드린 예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2012년 1월 22일 주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같은 해 12월 9일 주일 “제직의 삶과 사역” 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3년 12월 8일 주일 여기 와서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내가 좋아하는 12가지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바로 그 설교가 한 주전에 출판된 저의 책 『’장난꾸러기’ 김명혁 목사의 ‘막가파’ 이야기 모음』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 그 책을 여기 가져왔습니다. 
오늘 여기 와서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오에녹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오 목사님이 “열매 맺는 신앙생활”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오늘 “열매 맺는 신앙생활”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설교 제목을 주신 오에녹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지난 7년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담임 목사님들이 부탁하는 제목과 내용의 설교들을 정성껏 준비하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곤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열매 맺는 신앙생활”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열매”와 “행함”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 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4,45).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는 것처럼 사람도 각각 그 “열매”와 “행함”으로 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선한 사람은 선한 행함을 나타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행함을 나타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버리게 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6-9). 예수님께서는 꼭 같은 말씀을 산상 설교에서도 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 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16-21). “열매”는 “행함”이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거듭해서 지적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7:26).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만"은 아닙니다. “열매”와 “행함”이 중요합니다. 이 진리를 야고보서가 아주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 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17-22). 여고보서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분명하게 지적하고 또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라고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4-26). 사실 예수님 자신이 “행함”의 중요성을 분명하고 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벌에 들어가고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0.45,46). “열매”를 맺는 삶과 “행함”이 있는 믿음이 너무너무 중요함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삶과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영생과 관련이 있고 열매를 맺지 않는 삶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벌과 관련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 그러면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어떻게 하여야 올바른 “행함”을 지니며 나타낼 수가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믿음”과 함께 “열매”와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듣고 행하는 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 라고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은 사도 요한도 나중에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수가성 여인이 귀를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도 생겼고 “열매”와 “행함”도 생겼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자기의 믿음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4:19). 그리고 자기의 행함을 이렇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베다니의 마리아는 “듣는” 귀를 가진 여인으로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주께서 가라사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39,42).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일곱 번 반복해서 하신 말씀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들음”에서 믿음도 나오지만 “들음”에서 “열매”도 “행함”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들음”의 종교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열매”와 “행함”이 생깁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들을 귀가 없는 불행환 신자들이 많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말씀과 목사님들의 말씀을 너무 잘 들었습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 시절 저는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무 잘 들었습니다. 부족한 죄인이 말씀을 사모하면서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이 생기고 “행함”이 생겼습니다. 좋은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비롯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믿음”과 함께 “열매”와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3:8,9). 사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항복하는 “회개”가 “믿음”과 “행함”의 처음과 중심과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꼭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26:20).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행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말씀을 “듣고” “회개”한 삼천 여명이 “믿음”과 “행함”이 충만한 아름다운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믿음”과 “행함”을 바로 지니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여덟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했습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한국교회의 아버지들인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이 평생토록 힘써서 하신 일이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신 일이었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인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이 평생토록 힘써서 하신 일이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회개한 회개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목사님),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목사님).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목사님).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목사님). “나는 고멜과 같은 우상숭배한 음녀입니다.”(김치선 목사님).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님).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께서 회개의 중요성을 아주 강하게 지적하시면서 “회개하라 한국교회여” 라고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회개하라 한국교회여 회개 없는 믿음은 가증한 심령이구요 회개 안한 소망은 무너질 바벨탑이구요 회개 못한 사랑은 제가 속는 외식이랍니다. 회개 안한 목자 떼들은 양의 탈 쓴 이리떼 구요 회개 못한 양의 무리는 교회 탈 쓴 로마 병정이랍니다. 회개 없는 신학교는 이단학설 제조소구요 회개 안한 신학박사는 마귀나라 오열 분자이구요 회개 못한 신학생들은 무신론자 출발이랍니다. 회개 없는 교회 설립은 마귀 떼 양성소구요 회개 안한 주일 예배는 마귀 약에 살찌구요 회개 못한 조직 행정은 마귀 장난 역사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한국 교회여 회개하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여 마귀 장난 버려라 마귀 약에서 깨어라 양성소를 고쳐라 무신론을 막아라 오열분자 치워라 이단 학설 태워라 교회 탈을 무너뜨려라 양의 탈을 벗어라 지옥 탈을 깨뜨려라 신령한 눈을 뜨고 거룩한 귀를 열고 차라리 벙어리가 되어라 눈물을 흘리면서! 한숨을 쉬면서! 기도를 드리면서! 네 아직도 깨닫지 못하겠거든 골방으로 가거라. 아라비아로 가거라. 산 속으로 가거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회개가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고 회개가 없는 행함은 가짜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한결같이 평생토록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그리고 “회개”의 메시지를 평생토록 생명을 바쳐 전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믿음”이 충만하고 “열매”와 “행함”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우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회개”가 사라지게 되었고 따라서 “열매”와 “행함”도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울면서 “회개”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시고 명하신 다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에게로 와서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교만을 버리고 마음에 “온유와 겸손”을 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마음에서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상태가 너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4,45). 교만한 마음에서는 선한 열매가 나오지 못하고 악한 열매만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니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사실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낮추시고 낮추신 분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온유와 겸손”의 “마음”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 닮은 복음에 합당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복음에 합당한 올바른 “행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는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마음은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복음에 역행하는 악독한 독소를 뿜어냅니다.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온유와 겸손”의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주님 닮은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니고 사셨는데 아름다운 “열매”를 평생토록 많이 맺었고 고귀한 “행함”을 평생토록 많이 나타내면서 사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니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강조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행함”을 나타내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본받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할찌니라”(마18:22).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기독교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진리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2-14).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면서 사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복음에 합당한 “열매”와 “행함”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이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은 사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러나 “긍휼과 용서와 사랑” 자체가 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았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인 우리 죄인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도 조금씩 변화되어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며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평생토록 염원하며 기도하여야 할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은 기도하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나타내고 실천하면서 살게 하시옵소서! 아름다운 “열매”와 올바른 “행함”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과 몸과 영혼에 지니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 닮은 “섬김”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고 주님 닮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결국 “섬김”의 삶을 사셨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묘사하는 성경 구절이 막10:45 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 말씀은 너무너무 귀중하고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시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고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각색 병자들의 몸에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따르려는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6,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과 손과 발이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짐”과 “착함”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섬김”의 “열매”를 맺고 “섬김”의 “행함”을 나타내며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착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사도행전은 어떤 의미에서 “착한 사람들의 행전”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은 “낮아짐”과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사신 대표적인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결국 “대속”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결국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어린양으로 성부 하나님께 드려진 대속의 제물이 되시므로, 수 많은 영혼들을 지옥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놀라운 대속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맺으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배로운 “열매”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가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 집으로 올라가서 흰옷을 입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죄인들을 구원하신 “대속”의 “열매”요 “구원”의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그 보다 더 귀중하고 더 아름답고 더 신비롭고 더 보배로운 “열매”는 이 세상과 온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찬410장) “큰 죄에 빠진 나를 주 예수 건지사 그 넓은 품에 다시 품으신 은혜는 저 바다보다 깊고 저 하늘보다 높다”(찬417장). 
우리 죄인들을 지옥의 저주와 사망에 구원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도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걸으며 누군가를 구원하는 “제물 되는 삶”을 살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가 “섬김”의 삶을 살았고 “제물 되는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사울을 살리고 안디옥의 이방인들을 살렸고 세계 선교의 길을 열었습니다. 서머나의 폴리캅이 그 길을 걸었고 아프리카의 페르페츄아가 그 길을 걸었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그 길을 걸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9월 9월 5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참수당하며 순교의 피를 흘리므로 그를 참수한 박춘권을 비롯한 수 많은 조선 사람들을 구원하게 되었고 조선 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순교의 길을 걸으므로 황무지와 같은 조선땅에 아름답고 귀중한 “복음의 열매”와 “구원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수원 동문교회에 와서 “열매 맺는 신앙생활”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열매”와 “행함”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어떻게 하여야 올바른 “행함”을 지니며 나타낼 수가 있는지에 대한 성경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둘째로, 가슴을 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항복하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로, 주님 닮은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넷째로,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조금이라도 마음과 몸과 영혼에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다섯째로, 주님 닮은 “섬김”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고 주님 닮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죄인들 스스로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올바른 “행함”을 지니며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올바른 “행함”을 지니며 나타내는 삶을 사신 신앙의 선배들인 스데반 집사님과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부족한 우리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올바른 “행함”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다가 하늘 집으로 올라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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