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싸가지 없는 진보>, "싸가지 없는 보수" 논의와 병행되어야
▲강남순 교수. ⓒ베리타스 DB |
강준만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된 후, 다양한 갑론을박이 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한국에 살고 있지 않으니, 논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책을 바로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제처놓고라도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이러한 센세이셔날한 책 제목을 생각해 낸 것이 저자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마케팅 팀인지 알 수 없으나, 센세이셔날리즘의 선동적 위험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제목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담요 덮기식의 가치판단이 이미 담겨진 이 제목은, 그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자칫하면 모든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라는 중요한 개념, 그리고 이 "진보"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개인이나 그룹 자체에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대중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 책 제목이 지닌 문제는 첫째, "싸가지"라고 하는 한국인들의 의사소통구조에서는 이미 매우 비하적인 부정적 가치판단이 함축되어 있는 용어를 골라, 그것을 "진보"라는 개인/집단 전체를 향한 일반 수식어로 붙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싸가지 "없다"는 말은 하지만, 싸가지 "있다"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싸가지"라는 표현 자체속에 이미 부정적인 의미와 가치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긍정적으로 좋게 보이는 사람에 대하여 "싸가지가 있다"는 표현을 삼가는 것이다. 이미 진보그룹에게 "싸가지"라는 이름표를 붙힘으로서 "있다-없다"와 상관없이 진보에 대한 일방적 비하/비판의 날을 세워서, 강교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정당한 논의의 여지를 이미 배제시켜 버렸다.
둘째, 일반 명사로서의 "진보"라는 용어가 주는 문제점이다. 물론 강 교수는 한국정치라는 특정한 상황속에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일반명사로서의 "진보"라는 이름표와 "싸가지"를 함께 붙임으로서, 한국의 정당정치라는 특수한 분야에서의 문제에만 제한하지 않고 경제, 문화, 종교, 교육, 학술등 한 사회의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소위 "진보주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적 시각을 확산시키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는 "담론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공적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그 책의 저자는 사라진다. 굳이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Death of the Author)"의 논지를 복잡하게 논의하지 않아도 한 책의 저자는 그 책의 "본래적 의도나 의미"를 통제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권의 책은 저자의 "본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독자들에 의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인용되고, 회자되게 되어 있다. 이미 동아일보의 한 칼럼은 "김영오 막말과 싸가지 없는 진보" (http://news.donga.com/3/all/20140831/66129624/1)라는 표제로 강 교수의 책 제목을 역이용하여 세월호 참사관련뿐 만 아니라, 다양한 진보세력에 대한 강력한 냉소적 비난의 도구로 쓰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이 책 제목에 대하여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서 "진보"의 존재는 참으로 중요하며, 그 진보주의적 소리가 사라지면 그 사회는 복합적 의미의 "정의와 평등세계의 확장과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현상유지가 아닌 퇴보하는 사회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교육, 학술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층들에서 "진정한 진보"들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것은 우리 사회를 살아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며, 정의, 평등, 평화의 확산이라는 인류가 추구해 온 "보편적 가치"들이 구체적인 사람들의 일상생활속에서 실천되고, 제도화되고, 살아있게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만약 강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 지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싸가지 없는 보수"에 대한 논의와 함께 병행되어야 그 선동적 제목이 가져올 수 있는 (또는 이미 가져 오고 있는) 무차별적인 "진보죽이기 전략"으로 역이용되는 것을 그나마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보 또는 보수: 라벨링 (labeling)의 한계성
인류의 역사는 보수와 진보, 그리고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끌고 끌어 당기는 긴장의 역사이기도 하다. 보수와 진보를 어떻게 나누는가는 훨씬 복합적인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지만, 간결하게 규정해 보자면 "보수주의자 (conservative)"는 기존의 현실적 구조나 전통을 지켜내고자 하는(conserve) 이들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 (progressive)"는 기존의 현실구조 또는 전통을 넘어서서 나아가려고(progress) 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의 현실주의 (realism)와 진보주의의 이상주의 (idealism)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어 왔으며, 소위 진보한 사회일 수록 이 두 축 사이의 비판적 긴장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공존한다.
그런데 보수 또는 진보라는 명칭을 누군가에게 붙여서 그것을 항구화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를 양산한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무수한 층들을 형성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관습등 이 모든 측면에서 100 % 진보 또는 보수인 경우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정당정치와 같은 어느 특별한 분야에 "진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도 그의 의식에 젠더, 인종, 종교, 섹슈알리티등의 문제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경우도 허다하며, 반면에 정치에서는 기존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보수"인 사람들도 종교나 성적 소수자 문제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미국에서 초기 여성운동은 노예제도 폐지운동과 함께 부상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문제에 관심하던 여성들은 백인과 흑인의 평등성을 주장하는 "진보주의" 운동가들과 뜻을 같이 했으며 이러한 백인과 흑인의 인간으로서의 평등성을 인식하는 이들은 당연히 여성과 남성으로서의 평등성의 문제에도 열려있다고 믿었기에 노예제도페지운동은 곧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평등권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1840년 런던에서 열리 노예제도 폐지세계대회에서 그 자리에 모인 여성들에게 발언권이나 결정권을 주지 않았고, 다시 그 결정을 번복하기 위한 전체투표에 붙여졌지만 부결되었다. 즉 인종문제에 매우 "진보"적이던 남성들은 젠더문제에 대하여는 이전의 전통과 기존의 사회구조를 지켜내고자 하던 "보수"적이 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후 미국의 여성운동은 기존의 "진보운동"으로부터 나와서 독자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남성 진보주의 그룹의 가부장제성에 대한 비판은 다양하게 제기 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소리에 의하여 진보주의 진영의 지속적인 의식확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각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미국에서 초기여성운동의 초석을 놓았던 이들은 백인-중상층-개신교-여성들이었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담론들이 활발하게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이 주요 여성운동가들의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내부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했다. 즉 그들이 지닌 인종문제나 사회적 계층의 문제에 대한 "보수성"이다. 젠더문제에 가장 진보적인 이들이, 인종이나 계층 문제와 같은 다른 문제에는 기존의 사회구조에 아무런 비판적 시각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교는 특히 신학대학원은 미국 안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학교중에 속한다. 성, 인종, 계층적 정의에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는 극보수주의 학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교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미국의 대학교에서, 요즈음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중의 하나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이다. 즉 성적 소수자인 교수, 직원, 학생들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라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서 그 대학이 성적 소수자인 교수나 직원을 채용하는가, 그리고 채용한 후에도 그 사람의 배우자/파트너에게도 건강보험이나 연금혜택이 가도록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진보-보수" 기준에서 보자면 내가 일하는 대학교는 매우 진보적인 학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강의실에는 매우 다양한 학생들이 들어온다. 내가 늘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진보" 또는 "보수"라는 이름표를 고정화하여 붙이는 것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페미니즘 담론이나, 해방담론등에 대하여 아직도 거부감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신학적으로는 매우 보수인 학생이, 성적 소수자문제에 대하여 매우 진보적인 경우다. 흥미롭게도 그 학생을 진보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복음주의 신앙적 보수성이다. 그는 예수가 이웃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다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의 범주에 성소수자를 포함시키면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적 진보의 입장을 갖는다. 반대로 인종차별에 대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치면서 신학적으로도 매우 진보적인 한 나의 학생은, 성소수자의 문제에 대하여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서 정치적-보수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누군가를 또는 어느 집단을 향해서 이러한 이름표를 붙일 때에는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만 제한되어 불일 수 있으며, 보편적 이름표로서의 진보 또는 보수란 여러가지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가 살아있는 사회를 향하여
인류의 역사를 보면 교육, 정치, 문화, 예술, 종교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과 변화를 일으켜 온 주체세력들은 대부분 언제나 "진보"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이들 이었다. 한 사람이 태어난 사회적 계층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체적 존재로서의 권리, 평등의 가치를 정치사회적으로 제도화 시킨 프랑스혁명의 주체자들도 "진보"였으며 (물론 그들의 남성중심성은 또 다른 사각지대였지만), 여성들의 참정권, 흑인들의 참정권,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같이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새로운 세계의 이상을 위해, 그리고 이 세계가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세계, 포괄의 원을 확장시키기 위한 작업을 해 온 이들도 각 사회속의 "진보"들이었다. 귀족/양반들만이 아니라 보통 서민들에게도,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공교육의 문을 연 이들도 그 시대에서는 "진보"라는 이름표가 붙여진 이들이었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의 지도자로서의 역활을 인정하는 종교, 사회, 제도, 법규를 만들어 내 온 이들도 "진보"였으며, 남아공의 혹독한 인종차별주의와 저항하여 싸워 온 이들도 "진보"라는 이름표를 지닌 이들이었다. 이 21세기에, 인류의 역사속의 이러한 다양한 "진보"들이 뿌린 변화의 씨앗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사는 이들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이 "진보"에 대하여 무비판적 옹호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인식론적, 사회문화적 한계를 지닌 이들이기에 지속적인 자기훈련과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진보의 이름으로 다양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진보라고 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진보"가 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치와 같은 한 분야의 진보가 종교, 예술, 교육, 문화, 젠더, 섹슈알리티 등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의 진보를 자동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진정한 진보"가 늘 기억해야 할 할 몇 가지 원리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는,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지 않아야 한다; 절대화하자 마자 그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오류에 빠진다; 자신속의 있을 수 있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늘 생각하면서 비판적 성찰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라는 이 두 축 사이에서 비판적 긴장관계를 스스로 속에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전통/과거"에 대한 두 가지 책임적 과제인 "보존 (conservation)"과 "창출 (innovation)"의 문제를 끊임없이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성찰해야 한다. 과거/ 전통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예민한 비판성의 촉각을 늘 가지면서 무엇과의 연속성(보존)을 지켜내고, 동시에 어떤 측면에서 과감한 불연속성을 가지면서 새로운 전통을 창출할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성찰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들이, 그리고 자기 개인만의 이득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삶에서의 "공공의 선 (common good)"을 확장하고 확산하고자 하는 그 진보적 정신들이 정치, 문화, 경제, 교육, 종교, 예술 등 사회 곳곳에서 활성화되고 살아있게 만드는 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 제목을 접하며,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9월 6일(토)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9월 6일(토)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