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에 대한 신학적 이해
III. 추석의 기독교 신앙적 의미
1)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3)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표현 4) 공동체의 아픔을 나누는 축제로 승화 5)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6) 영원한 고향 증거 7)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8) 추석 추수감사절 운동
III. 추석/한가위의 기독교 신앙적 의미
▲복음주의 신학자 김영한 박사 ⓒ베리타스 DB |
필자는 자연신학적 접촉점으로서 민속 명절인 추석의 기독교 신앙적 의미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표현, 공동체 축제,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영원한 고향 암시,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추석 명절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기 운동 등 8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명절
추석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민족의 명절이다. 한국인에게는 추석, 미국인에게는 추수감사절, 프랑스인들에게는 투생((Toussaint), 독일인에게는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중국인들에게는 춘절, 일본인에게는 오봉 등이 이들 민족의 축제일로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명절은 지구촌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의 공통적 가치관과 관습을 형성하도록 하고 사회적 통합에 기여한다. 한국 민족에게 추수를 감사하며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이웃과의 나눔을 추구하는 추석 고유의 전통은 민속 절기를 지키는 지구촌의 다른 민족과도 나눌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다.
추수는 모든 피조물에게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특히 농부들에게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가운데 하나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새로운 예루살렘에 각 민족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는 약속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4),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계 21:26)― 을 기록하고 있다. 창조가 비록 원죄로 인하여 죄 권세 속에 얽매어 노예화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창조의 영광은 이러한 인간성과 자연의 부패성 가운데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이 작렬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매일 아침에 동쪽 지평선 위로 넘실거리면서 떠오르는 영광스러운 태양의 광휘 속에서 그리고 저녁 지평선에 붉게 물들면서 지는 태양을 보면서 창조 안에 남아있는 창조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발견한다. 이 태양은 인간이 들어갈 영원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만이 영원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을 농부의 피땀 흘린 노동에 결실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추수감사절로 이해하는 것이 요청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에 농부들의 노력에 결실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 교회는 초교파적으로 기독교적 감사절 예식을 제정하여 동일한 예식서를 통하여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헌신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속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기 때문에 이웃종교가 하는 감사 예식은 우리와 다를지라도 이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동방정교회나 로마가톨릭이 하는 감사예식은 방식은 다를지라도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창조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가족과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한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추석에 가족들 모임에서는 가족들의 관계를 어렵게 할 수 있는 과도한 언행(지나친 자기 사업이나 아이들 자랑이나 상대방에 대한 비난 등)은 삼가야 한다. 추석 명절 가족들의 모임은 어려운 형편을 들어주고 어려운 짐은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헌신의 다짐과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분명한 창조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기독교적 이해는 추석에 나타날 수 있는 허례허식을 바로잡고 민족 최대 명절의 새로운 가치와 의의를 부각시켜 줄 수 있다.
3) 조상에 대한 효는 미신적 제사 아닌 기독교적 추도식으로 표현
<1> 조상에 대한 효성을 반드시 표시
추석에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관습과 전통에 따라 우리들에게 신체적, 물질적 유산을 남겨주신 조상들에 대한 효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아직도 살아계시는 가문의 어르신들을 방문하여 예(禮)와 존경을 표현하고 덕담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격과 성품을 함양하여야 한다. 추석에 자손으로서 표현하는 조상의 은덕에 대한 감사는 조상에 대한 미신적 숭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조상에 대한 효와 감사는 조상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를 전수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전환되어야 한다.
<2>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전도의 길을 막는다
제사를 미신숭배로 간주하고 조상 제사에 참석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가족들이 협조하는 제수비용에 참여하기도 거절하거나 인색하게 내는 것은 전도의 길을 막는 길이다. 이것 때문에 조선시대에 천주교 전래시 천주교는 조상을 경배하지 않는 사교(邪敎)로 오해받아 박해를 받은 것이다. 제사에 참여하는 불신가족들도 거의 대부분이 귀신이 와서 먹고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유교 예법이 그러하니 따라 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절은 안한다고 하면 허용해준다. 다른 분들이 절할 때 신자들은 조용히 한 쪽에서 정성스럽게 무릎 꿇고 절하는 대신 조상들의 은덕을 생각하고 저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리는 기도를 하는 것은 전도의 길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과 세 청년처럼 왕의 진미를 먹지 않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반드시 참석은 하되 옆에서 절은 하지 않고 기도를 하도록 가문의 어른들을 사전에 찾아가 잘 설명을 하여 허락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기독교는 효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고, 단지 방식이 귀신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기도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제사를 기독교 추도식으로 바꾸기
그러므로 어느 정도 어른들이 허락해 주시면 추석 명절에 조상에 대한 존경을 유교 제사 대신에 기독교 추도식으로 드리는 것이 요청된다. 따라서 추도 예배를 드린 후에 참가한 가족들이 같이 가족 애찬을 하면서 친교를 나눈다. 추석 추도예배와 애찬식을 준비하고 거행할 때 햇과일들과 음식들은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한 기복적인 제물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솔한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조상들이 남겨준 아름다운 신앙과 유형무형적 가치를 기념하면서 그것을 보다 창조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 유교 제사가 조상에 대한 효성을 표현하는 것은 인정하나 죽은 조상의 혼령이 와서 제사 음식을 먹고 간다는 미신적 의식은 기독교적으로 계몽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4) 공동체의 아픔을 나누는 축제로 승화
추석은 추수의 결실을 함께 나누며 이웃을 돌아보는 공동체적인 명절이었다. 특히 추석이 가진 공동체 정신, 풍족한 추수를 거둔 부유한 농부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추수한 결실들을 함께 나누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상처 받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베풀고 양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최대의 명절 추석을 가족들이 서로 만나고 성공과 기쁨과 정(情)을 나눌 뿐 아니라 아픔과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공동체적 축제로 승화시키도록 요청받는다.
2014년 추석은 우리 민족 안에 남아 있는 많은 갈등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올해 한국 사회는 많은 국내외의 어려움으로 인해 혼란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세월호 사건의 상처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지금도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후 교회와 기독교 단체와 신자들이 쉬지 않고 이들의 슬픔의 현장에 가서 자원 봉사를 한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드러내는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는 함께 아픔을 나누며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하는 상생의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같은 명절을 지내며 결실을 나누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의 억압과 배고파 굶주리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에게 참다운 자유와 인간다운 생존권 보장, 민족 공동체로서의 동질감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5) 소외된 이웃과 나누고 돌보는 실천계기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이라는 공동체 축제를 통해서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나누는 사랑의 실천계기로 삼는 사명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 한국 교회와 신자들은 2014년 추석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풍성한 은혜를 전하고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조상들은 모든 수확의 결실을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기회로 삼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이웃을 돌보는 실천을 통해 표현해 왔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복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데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복을 사회의 소외된 이웃과 나누도록 구제와 사회적 책임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청교도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효의 실천과 가정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전하고 나누어야 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특히 사회적인 갈등 속에서 맞이하게 된 올 추석에 세월호 참사로 인해 꽃다운 아들딸을 잃은 학부모들이 심리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분명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일하고 싶으나 제대로 된 직업이 없어서 비정규직 등으로 전전하는 젊은이들과 우리 사회에 아직도 문화적으로 낯선 다문화 가족들, 그리고 제대로 시민 취급을 받지 못하는 탈북민들의 바른 정착 등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방치하지 말고 자기 교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사회적 도움과 정서적 도움과 신앙적 도움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다.
6) 영원한 고향 증거
추석에 생겨나는 고향 생각은 영적 고향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영원한 고향을 암시한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최후의 본향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원한 나라다. 고향을 찾아가는 우리의 불신 이웃들에게 이 명절의 시기에 영원한 본향을 생각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같이 말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이 영적 고향의 흔적은 인간 영혼의 깊은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주여 우리 영혼이 주님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미국의 상담목회자 헨리 나우엔(Henry Nouwen)은 현대인이야말로 가야할 본향을 상실한 영적 방랑자라고 말했다. 현대인들은 영적인 방랑자로서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그네인 것이다. 방랑자로서 인간은 자기 영혼 깊은 내면에 남겨진 하나님의 관념, 영원의 자취의 충동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영적 고향을 찾기 위하여 각종 종교 요가나 쾌락이나 오락이나 스포츠에 심취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는 종교의 씨가 그릇된 모습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진정한 무신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피력하였다. 인간의 선험적 경험 속에 하나님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추석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가는 저들에게 하늘나라와 그리고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이 영원한 고향을 증거해야 한다.
7) 고향교회로의 관심 환기
추석에는 도시교회에서 고향교회로의 감사가 전달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추석 명절은 도시 교회가 시골 교회로 일시적이나마 교인들을 되돌려 주는 절기다. 대다수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 그래서 ‘교회의 뒷문을 막아라’는 섬뜩한 책 제목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열린 목회자는 정성껏 목회하면서 ‘교회 뒷문은 열려 있다’고 가르친다. 필자의 제자인 어느 목회자는 말하기를 자기 조부 목회자는 4천명, 부친 목회자는 1천5백 명까지 교인수를 성장시켰지만, 다음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뒷문이 활짝 열렸으니 좋은 교회로 언제든지 가라.” 이 말은 목회 태만이 아니라 양들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조부와 부친의 목회 철학을 따라서 명절 때 가르친다고 한다. 그는 추석 명절에 자기교회 신자들이 고향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고향 교회에 생기를 주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양진우, “추석 연휴 기간 고향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운동해야,” 『교회연합』, 2013.09.13.).
추석 명절에 대도시의 중·대형교회는 시골 농·어촌의 고향교회인 작은 교회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방법을 취해 도시교회와 시골교회가 상생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도시교회의 성장은 산업화로 인한 농촌, 산간, 어촌교회 성도들의 도시진입에 빚지고 있는 면이 있다. 설 명절이나 추석 명절은 이러한 빚을 되돌려 주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향 가는 신자들을 통하여 도시교회와 농촌, 산간, 어촌교회 사이에 자매결연을 맺고 신앙적 교류와 농수산물 사주기 운동 등을 통하여 상생하는 길을 모색하면 어떨까? 이번 가을에도 농촌, 산간, 어촌의 작은 교회들은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고, 폭우로 인해 형편이 어려운 교회도 많다. 이렇게 지치고 힘들어 일어설 힘이 도저히 없을 때, 스스로 일어서거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을 때,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바로 같은 신자로서의 배려와 격려다.
그래서 추석 명절에는 농촌, 산간, 어촌교회로 가라고 적극 권유해야 한다. 이러한 명절을 기독교적으로 유도해 ‘추석 가정 예배 모범’을 배포하고, ‘고향교회에 헌금 듬뿍하기 운동’과 ‘고향 교회에서 온 종일 봉사하기 운동’을 펼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펼치려면, 대도시 대형 교회들이 본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기를 강요하지 말고, 교회 차량운행을 중단하고 고향교회에 감사 선물이나 헌금을 드리도록 권장해야 한다(양진우, “추석 연휴 기간 고향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운동해야”). 이러한 고향교회 도우기 캠페인은 85%가 아직도 미자립인 한국교회의 기형구조를 정상화하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추석 추수감사절 운동
교회와 신자들이 중심되어 추석 추수감사절운동을 전개하기를 제안한다. 이제 기독교 신앙은 우리 민족의 삶 속에 상황화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가배, 한가위, 중추절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년 지켜온 민속의 명절은 바로 당시에는 천지신명에게 감사드리던 우리 선조들의 추수감사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우리 조상과는 상관없이 미국 청교도들이 지켜온 11월 추수감사절만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상황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있는 자연신학적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결과에 이른다. 기독교 신앙의 형식은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왔으나 그 신앙의 자연신학적 접촉점은 천지신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는 신이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바 같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연신학적 접촉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 조상이 고백했던 천지신명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매년 추석 명절에 한국교회는 우리 선조들이 중추절에 감사드렸던 ‘천지신명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는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전단지를 눈에 띄는 곳에 붙이고 전도하며 미디어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추석 명절을 이러한 복음 전도의 절호의 기회로 선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