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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칼럼] 인간구원은 야훼께서만 하시는 일이니!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시편 3편

다윗의 시,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하였을 때 지은 시.
1[2]* 야훼여!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아, 나를 치려고 일어나는 자들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2[3] 많은 사람들이 내 목숨을 노려보며 빈정거리기를,
“너의 하나님조차 너를 돕지 않는구나!”** 라고 말합니다. [셀라]***
3[4] “그러나 당신은! 야훼이시니, 나를 사면으로 둘러싼 방패이시고,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머리를 높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라는
4[5] ‘나의 소리’(q?l?; my voice)가 야훼께 이를 때에는,
아,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산(聖山)에서 내게 응답해 주십니다. [셀라]
5[6] 나 비록 곤하게 누워 잠들었다하여도
나는 곧 깨어나나니 이는 야훼께서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6[7] 그러므로 나를 대적하여 사방으로 에워싸 진(陣)을 친
천만의 군대라고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7[8] 일어나소서! 야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내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러뜨리셨습니다.
8[9] 구원은 야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 주의 복은 주의 백성에게만 내리시리이다.
* [ ] 안의 절수는 히브리 본문(MT)의 절수를 가리킴. 이하 시편의 [ ] 안의 절수는 히브리 본문의 절수 표시임.
** 이 궁서체의 인용 언어는 마소라 본문 대신 시리아 역본을 따른 것이다. 시리아 역본의 번역은 “네 하나님에게도 너를 구원할 의사가 없구나!”라고 되어 있다.
*** ‘셀라’라는 말은 ‘음악적 지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지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위 본문 중의 고딕체 문구(7[8]절 상반의 ‘외침’)는 시 전체의 3+3리듬을 깨고 갑자기 나타나는 2+2 박자의 짧은 함성(喊聲: “일어나소서!/야훼여!//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라는 짧은 [戰爭]喊聲?)이므로 이것이 바로 그 음악적 지시(‘셀라’)의 ‘내용’, 즉 <셀라>가 있는 곳에서 ‘온 회중’이 ‘유니송 함성’을 외쳤던 내용이 아닌 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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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전반적 분위기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대적(對敵)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의 구원호소로 구성된 아침기도(5[6]b절)였음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고 또 그러한 <고난으로 인한 부르짖음→해방(구원)>의 분위기 전환의 확신을 묘사하기 위하여 구사(驅使)되는 표현들은, 거의가 대체로, 군사적 용어(전쟁용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 시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구성구조는 매우 단조롭고 또 그 구성단락들이 확연하게 구획지어진다는 특징도 드러난다. 즉 그 구성구조는 <신명(神名)을 외쳐 부름(1a절) → 탄식(1a,b-2절) →[1차] 신뢰표현으로의 급전환(3-4절) → 기원(祈願; 7a절) → 확신표현(7b절) → 확신 결구(結句; 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명(神名) 부름 구(句)들은 시편의 탄식기도들에서 매우 흔하게 그러나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나듯이, 그 구성은 매우 단순간명하게, “야훼여!” 또는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만 되어 있어서, 이러한 단순함과 단조함은, 이와는 확연히 대조적인 고대 중동지역의 기도문들, 이른 바, <신명(神名) 부름 구(句)>를 매우 장황스럽고 길게 늘어질 정도로 ‘긴 수사’(修辭, long invocation)들로 꾸미는 고대 바벨론의 탄식기도문들의 ‘서두문’[導入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시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해주는데, 이러한 이스라엘 신앙의 그 고유성과 특이성은 예수님께서도 이미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법’(통칭하여 ‘주기도’라고 부른다. 마 6:9b-13, cf. 눅 11:2b-4)을 가르치실 때, 매우 확실한 언어로(마 6:5-8) 이교(異敎) 기도의 그 ‘위선’(마 6:5)과 ‘중언부언’(마 6:7)을 경계하며 가르치신 바가 있다. 그러므로 ‘모범적 기도’는 그 기도의 대상을 요란스레 수식하여 신의 마음을 이끌어내려는 허례허식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러한 허례(虛禮)는 반드시 극복지양(克復止揚)되어야 한다고 하겠다.
[* 이 분야에 관한 고전적 연구는 H. Gunkel의 충실한 제자, Joachim Begrich가 1928년에 쓴 그의 논문, “Die Vertrauensausserungen im Israelitischen Klagelied des Einzelnen und in seinem Babylonischen Gegenstuck” Gesammelte Studien zum Alten Testament, Munchen: Chr. Kaiser Verlag, 1964, Pp.168-216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의 본문 시편 3편은 ‘모범적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도의 시’ (Gunkel이 말하는 개인 탄원 시 또는 개인의 기도 시)유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매우 짧은 ‘도입 구’(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는 呼訴 句) 다음으로 곧 이어지는 구문(句文)은 대체로 ‘절박한 탄식 또는 기원’으로 표현된다.(‘탄식’과 ‘기원’이라는 두 요소가 이 시양식의 중심적 구성요소이므로, 이러한 시 양식을 나는 ‘탄원시’ [歎願詩; 탄식+기원]라고 명명[命名]한다.) 
시 3편의 경우, 수식 없이 신의 이름을 절박하게 부르는 짧은 ‘호소’ 그 다음에는 ‘탄식’(歎息)이 토로된다. 이 탄식의 주 내용은 “나를 치는 대적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탄식하는 것이다. 즉 “많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므로, 원수는 많고 자신은 ‘소수’(=홀로)라는 수적 대비(數的 對比)가 강조된다. 이러한 강조어법은, 분명, 구약에서는 주로 ‘거룩한 전쟁’[聖戰]에 관한 설화에서 마치 조문처럼 자주 반복되는 어법이다. 마치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 즉 칼과 창과 방패 및 갑옷으로 무장하고 또한 역시 중무장한 부하 마병들을 대동한 그런 블레셋의 거인 장수 앞에 홀로 막대기 하나만을 들고 서 있는 예쁘장한 홍안소년, 즉 갑옷도 너무 커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 어린 홍안소년 다윗(삼하 17:42)의 그 대조적(對照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삼상 17:41-44). 그러나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소년 다윗의 ‘외침’ 내용은, 분명히 놀랍게도, ‘거룩한 전쟁 전승’의 중심신앙과 기본이념을 매우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즉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아 왔으나, 그러나 나는(웨[붸]아노키), 네가 깔보고 모욕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만(beshēm)!!을 의지(依支)하고 너를 향해 나아간다.”(삼상 17:45)라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탄식의 분위기를 급-전도(急-顚倒) 시키고 있는 3[4]절 서두의 수사어투, “그러나 당신은(웨[붸]앗타) 야ㅎ웨!” 라는 어투의 ‘와우[봐브] 반어법’(waw-adversative)은 히브리 개인 탄원시의 경우, 그 기능이 매우 고유하고 특이하다고 하겠다. 즉 이 반어법은 앞에 나타난 <탄식>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反轉: mood change)시켜서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두려움 없는 안전감’>에 이르도록 만든다. 이 분위기 반전(反轉)을 일으킨 그 절대 안전감의 표현은 3[4]의 “그러나 당신은 야훼!”라는 어투로 시작하여 점층적(漸層的, climactic) 발전을 이루며 6절[7절]에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셀라>가 와야 할 자리에서 <셀라>를 대신하여 나타난 (아마 ‘셀라’의 지시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2+2 박자 반복의 짧은 호소 구(句) “쿠마/ 야ㅎ웨// 호쉬에니/ 엘로하이”(2+2) 즉 “일어나소서!/ 야ㅎ웨여!// 날 구하소서!/ 내 하나님이여!”2+2)라는 후렴 형식의 외침(outcry)형 짧은 기원 구(祈願 句, petition)에게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구조(<신의 이름의 짧게 외침+탄식(점층적 확대)+구원 요구의 함성[outcry]→구원확신의 구조)는, 분명, 구약성서의 구원사적 진술의 원형(Urform) 및 기본골격(basic framework)이라고까지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 이 기본골격이 구약 구원사 진술들 속에 매우 널리 나타난다는 것을 밝힌 필자의 논문, “ ‘Outcry’: Its context in Biblical Theology” Interpretation, 42/3, July 1988, Pp. 229-239를 참조하라]
그리하여 이 시의 결론구(結論句)는 매우 확고한 신학적 확신으로 매듭지어진다. 즉 “구원은 야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라는 신학적 결론을 내림으로서, 시(詩)3편 시인은 그의 시(詩)를 마무리한다. “구원은 야훼 신(神)의 것이다.” 이 조문형(條文形) 선언은 ‘인간구원’의 사역(使役)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신’(神)의 비즈니스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구원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할분담을 하실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구원은 본질상 인간 스스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말이다. 일종의 터부(taboo), 히브리어로는 ‘헤렘’(ḥērem; חרם)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은 ‘신의 전리품’ 이른 바 ‘신(神)의 것’‘신의 소유’이므로 한 편으로는 인간이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하지만(마 5:48) 동시에 이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것’이므로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되는 것(anathema; 수 6:17: 7:12; 왕상 20:42), 말하자면, 인간이 손을 대면 <‘부정’(不淨) 타는 것>(신 7:26)이기도 하였다. 
히브리어 ‘헤렘’(ḥērem; חרם)이라는 말이 가지는 이러한 이중적 의미는, 그것이 이중적이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고는 하지만, 여기 시3편 시인이 말하는 바, ‘인간 구원’이란 ‘신(神)의 것’이므로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란 인간구원 사역(使役)엔 신·인(神·人) 협력과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이른 바, ‘시너지즘’(synergism) 사상과 같은 것은 거부한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인간구원의 절대적 주권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고 동시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히 강조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구원은 전적으로 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구원에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라도나이 하여수아!” 직역하면 그 어순(語順)이 “야훼의 것이다! 그 구원이라는 것은!”이 된다. 
“야훼의 것이다!”(“라도나이”)라는 말이 어순상(語順上) 의도적으로 <강조>를 하기 위하여 이 시 결론구의 맨 앞에 온 것은 분명 고난 중의 시인이 오랜 신학적 명상 후에 내린 최종 결산이라고 하겠다. 절실한 인간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과 불가항력적으로 깨닫게 된 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에 대한 대각성(大覺醒)이라고 하겠다. 인간구원은 인간 스스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이다. 인간 구원은 전혀 신의 은총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신의 은총에 대한 ‘절대 의지(依支)의 신뢰’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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