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에서 찬양으로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시편 5편(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관악기에 맞추어 읊은 다윗의 시)
1[2] 야훼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나의 신음소리를 헤아려 주소서.
2[3]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소서.
3[4] 야훼여, 나의 아침 기도소리를 들어주소서.
아침에 주를 맞을 준비를 하며 기다리겠습니다.
4[5] 분명코, 주님은 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주님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5[6] 오만한 자들은 주님의 목전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가 누구든 행악 자들은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6[7] 야훼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절망에 빠지게 하시고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과 사기꾼들은 싫어하십니다.
7[8] 그러나 나는 주님의 풍성한 자비를 힘입어 주님 집으로 나아가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을 향해 경배 드립니다.
8[9] 야훼여, 나의 원수들을 살피시어 주님의 의(義)로 나를 인도해 주소서.
내가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여 주소서.
9[10] 아, 그들의 입에는 신실한 말이 없고 그들의 심중에는 파멸만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려있는 무덤이며 그들의 혀에는 아첨뿐입니다.
10[11] 하나님이시여, 그들을 정죄하시고. 그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의 그 많은 허물을 보시고 그들을 좇아내소서, 그들은 주님께 반역하였습니다.
11[12]그러나 주님께로 피신하는 자는 누구든 맘 놓고 기뻐하며 길이길이 찬송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누구든 주를 맘껏 반기도록 막아 지켜주실 것입니다.
12[13] 오, 야훼여! 주님은 정녕 의로운 자를 복주시고 은혜의 방패로 감싸주실 것입니다.
이 시(詩)의 중심주제는 <주님의 의(義)로 나를 인도해 주소서>라는 기원(祈願) 속에 함축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즉 이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義, 치드카, 체다카)>에 의거하여 호소의 기도를 드린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 시인이 갖고 있는 바, <하나님의 의(義) 개념>이 무엇인지에 그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두게 된다. 따라서 이 시인의 <의>(義, 正義)에 대한 이해가 구약성서를 일관해 흐르는 <의>(義, 正義) 사상과 상응하는지가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본문인 시편 5편의 구성형식은 우리의 주제 설정의 이유를 설명하기에 아주 용이하도록 그 구성구조가 다음과 같이 아주 잘 편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시편 5편의 그 구성구조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①1-3절, “나의 왕”으로도 호칭되기도 하는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신음하며 부르짖는 기도
ki ②4-6절, “주님”(=“당신”)으로도 호칭되는 야훼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한 신(神) 신앙고백
wow③7-8절, 선하신(=義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시인(=기도인) 자신의 구원 기원(救援 祈願)
ki ④9-10절, 선하신(=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시인(=기도인)의 원수탄핵기원(怨讐彈劾祈願)
wow⑤11-ki12절, 원수로부터 구원받은 자의 구원자 야훼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감사와 찬양
물론 이상의 구성구조는 시 5편 내용을 <내용> 상으로 구획/구분한 것이지만, 또 하나 더 주목해 볼 부분은 5개의 단락(段落, units)들이 질서를 갖추어 히브리어 ki(다양한 번역기능을 가진 히브리어 接續 修辭; cf. J. Muilenburg, “The Linguistic and Rhetorical Usages of the Particle ki in the Old Testament,” HUCA XXXII [1961]: 135-59)를 교량으로 하여 분위기를 점차적으로 급전이(急轉移)시키고 있는 특이한 구조도 또한 갖추고 있다. 즉 단락 ①(1-3절)은 곤궁 속에 있는 시인(기도인)이 자신을 그 곤궁의 처지에서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 단락이지만, ki 접속수사에 의하여 그 탄식기원이 돌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에 관한 신뢰의 확신고백으로 구성된 제2 단락②(段落, 4-6절)으로 급전이(急轉移)한다. 그런 다음, “그러나 나는”(와아니)이라는 반어(反語)접속사로 이끄는 시(詩)의 하반부(下半部)가 소개된다.
이 하반부(下半部, 7-12잘) 전체는 모두 세 단락(3 units), 즉 ⓐ시인 자신의 구원기원(7-8절)과 ⓑ원수멸망기원(9-10) 그리고 ⓒ야훼 하나님 찬양(11-12절)으로 발전해가는 뚜렷한 점층적(漸層的) 전이구조(轉移構造)를 가지는데, 이 시(詩) 하반부의 첫 단락(7-8절; 자신의 가는 길의 평탄을 비는 기원)인 ③시인 자신의 구원기원(7-8절)은 전적으로 ‘야훼의 의(義)’에 호소하는 기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의 자비(慈悲, 헷세드)에 기대어 성전을 드나들고 또 ㉡경외(敬畏, 이르아)의 마음을 가지고 성전을 향해 경배를 드리는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의(義)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만 시인은 기도드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의 의(義)’는 어디까지나 ‘구원(救援)의 의(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제1단락(1-3절)으로부터 제2단락(4-6절)에로의 이행(移行)과정을 보면, 그의 ‘의’(義)는, 그가 ‘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다’는 데에 있다고 고백하는 시인자신의 고백이 그것을 잘 입증하듯이, 야훼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시인(고난 받는 이)의 부르짖는 구원기원에 응답하여 오셨다는 바로 그 구원사적 사실을 통하여! 이미! 입증되어 왔다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ki로 이끄는 ④제4단락(9-10절)에서는 아주 강력한 확신 안에서 원수의 악행을 일일이 다 정죄하고 고발하는 고소형태로 나타난다. ‘원수’의 주요특징은 여기서는 주로 ‘말에 진실성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 원수들은 그들 자신의 권모술수에 스스로 빠지도록 해주시기를 시인은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단락⑤(11-12절)는 마침내 주님(야훼 하나님)만이 인간이 피신할 수 있는 최후 최대의 ‘피난처’되심을 확신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詩) 전체가 종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시 5편)은 ①‘하나님의 의(義)’를 증언하는 것과 ②그 ‘하나님의 의(義)’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비는 기원을 드리는 것을 기본논지로 한 ‘기도의 시’(=‘탄원의 시’)라고 정의(定意)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매우 분명해진 것은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즉 ‘의’(義)의 추상적 개념이 철저히 비(비) 추상화되고 현실화(=구체화)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義)’ 개념은 전적으로 ‘야훼의 [역사적] 구원행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1단락[1-3절]으로부터 2단락[4-6절]에로의 이행 사실)을 통하여 분명히 정의(定意)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은 시의 구조에 대한 수사비평적인 접근이 이룩한 귀중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④단락(9-10절)과 ⑤단락(11-12절)사이에 나타난 뚜렷한 반어적(反語的) 대비(對比)현상도 또한 그러한 수사비평적인 접근법의 정당성과 그 결과의 신빙성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의 의’의 구체적 자리(Sitz)를 전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지켜 본 한 이방인 백부장[로마제국 시대에 100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부대단위의 장을 가리킴]이 확신에 차서 “아, 이 사람은 참으로 의(義)로운 사람이었도다”(눅 23:47; cf.마 27:54)라고 외쳤다는 보도는 이 확신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고 하겠다. ‘야훼 하나님의 의(義)’는 그러므로 ‘구원의 의(義)’인 것이다. 심판으로 위협하시는 신은 결코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