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9월, 송창근은 11개월 간의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활”을 한 그 곳을 떠나서 뉴저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간 것은 ‘1927년 9월 하순’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미주 대륙을 횡단하여 프린스톤으로 향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정식 명칭은 ‘Printon Theological Seminary’로서 1812년에 창설된 장로교 신학교였다. 처음 신학교가 개교되었을 때 교수는 아처빌드 알렉산더 한 사람이었고, 학생 수는 12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1927년 9월 27일에 입학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등록부. |
그러나 곧 ‘프린스톤 신학교의 창설은 미국의 신학교 교육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것과 같은 의미와 비중을 지닌 일이 되었다’고 이야기되듯 빠르게 발전하면서, 칼빈과 존 녹스에서 비롯된 개혁교회에 신학적 전통의 뿌리를 두고 있는 장로교 신학교로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교 이래 1백여 년이 지나 송창근이 입학한 1927년에는 캠퍼스 곳곳에 백 년 이상 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고, 알렉산더 홀을 비롯한 거대한 건물들이 즐비한 대단한 캠퍼스가 되어 있었다.
프린스톤 신학교 재학 시절 송창근은 한국의 기독신문에 4회에 걸쳐 프린스톤 생활기를 담은 기사를 연재했다. 당시 프린스톤에는 5명의 한국 학생들(송창근, 한경직, 윤하영, 이규용, 최윤관)이 있었다. 그 중 한경직과 관련된 내용이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인제 필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 마디 사뢰겠습니다. 이 글이 편지인 것 만치 쓸데없는 이야기 잔소리가 많이 섞이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인제 미국 땅에 발을 부친 지는 만 2개년이 오는 10월입니다. 한데 아직까지 영어난리(英語難離)에 죽어 삽니다. 우리 다섯 가운데는 제가 제일 영어를 못합지요. 나머지 분네는 다들 한 가락씩 듭니다. 해도 잘해요. 최윤관 씨 한경직 씨 같은 이는 백인들도 칭찬이 자자하게 잘합니다. 그 중에도 최 형은 사담(私談)이 능하고 한 형은 강도(講道) 말씀이 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꿔 온 보리자루 셈입니다. 그러길래 제 스스로가 ‘나는 떡 먹는 부처님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잘못해도 하루 세끼 먹는 데야 남 못지 않습니다. 말 없이 양떡에 뻐터기름을 발라 먹기만 하니 그 소위 떡 먹는 부처님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는 미국이 별나라는 별나라이라요 하고 어떤 친구에게 말했더니 웨요? 하고 반문하길래 아니 벙어리 웅변법 연구하는 데야 미국밖에 어디 또 있겠소 한즉 또다시 그 무슨 뜻이냐고 묻기에 그때에 나는 내 자신이 증명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처음 오던 해에 수인사말도 못하는 사람을 강도학(講道學) 시간이면 교사가 강단에 올려 세우고 한 15분씩 죽을 지경을 구니 참 기가 막힙디다.
인제는 만지막으로 한경직 형을 소개하렵니다. 한 형은 정주 오산과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마친 뒤에 ‘엠포리아’ 와서 다시 대학을 마치고 ‘푸린스톤’에 온 지 햇수로 3년입니다. 부인에게서 종종 편지가 오는데 이야기를 듣노라면 ‘언제나 오시겠는지 그때를 꼭 말씀해달라’는 부탁이 있은 지 벌써 오래다고 합니다. 아직도 3년을 더 있어야 귀국할 심산인 것 같으니 구름물 만리를 사이에 두고 가고 싶어하는 마음 기다리는 정이 어떠하오리꺄. 내 남이 피차에 없습ㄴ디ㅏ.
그런데 우리 한 형은 일언( 一言)의 보배덩어리올시다. 미국 온지 몇 해 안되는데 영어는 물론, 이 학교는 끄릭 공부가 특별히 어려워서 작년에 백인 학생도 왔다가 감당을 못하고 다른 학교로 간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데 온 학교에서 첫째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년에 히부루를 시작해서 얼마 하다가 그 중의 잘하는 사람 얼마를 뽑아 특별반을 조직하는데 한 형이 응시한 결과에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를 해놓고 보니 학생 선생 모두가 칭찬에 우리 조선(사람) 모두가 어깨가 읏슥읏슥했댓습니다. 그 날은 백인 학들 중에 어떤 사람은 조선 만세! 만세! 하고 외치면서 길에 다니는 사람이 다 있었고 우리와 백인 학생 몇 사람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다 놓고 감사와 치하(致賀)의 기도회까지 다 했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형은 끝까지 신학을 연구할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절실히 조선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조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길래 그는 본국 있을 때나 미국 와서나 그 한 모양입니다. 우리 조선교회의 앞을 위하여 끔즉이도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형은 늘 몸이 약해서 고생 중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벗네는 전에 못 뵈웠더라도 그를 위하여 특별히 생각을 하시고 때를 얻으시는 대로 기도로 도와 줍시사고 신실한 부탁을 전해드립니다. 진실로 우리는 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여야 할 친구의 하나입니다.
1927년 가을에 프린스톤에서 만나 친구가 된 송창근과 한경직은 서로의 사람됨을 깊이 알아보았고 서로 존경하고 좋아했으며 나머지 평생을 두고 매우 깊고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당시 송창근이 얼마나 한경직의 마음에 들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경직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한 해에 폐결핵 판정을 받고 요양원에 가서 1년 반 동안 요양하고 있을 때, 자신의 방에 가족사진과 함께 송창근의 사진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미국 유학시절 송창근(왼쪽)과 김재준(오른쪽). |
송창근은 1928년 가을 학기와 1928년 봄 학기를 프린스톤에서 마쳤다. 프린스톤에서 만 1년 동안 공부한 것이다. 그리고 1928년 여름 방학 동안에 한경직과 함께 뉴욕에 가서 일자리를 구해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1928년 가을 학기가 되자, 송창근은 펜실베니아 주의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갔다. 프린스톤에서는 2백불 장학금을 받았는데, 웨스턴에서는 3백불 장학금을 받기로 하는 등 조건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송창근은 프린스톤에 있을 때,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김재준이 미국에 유학할 수 있도록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에 교섭하여 허락을 받는 데 성공했다. 김재준은 1928년 3월에 청산학원을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미리 프린스톤 신학교의 ‘입학 허가서’와 200불의 ‘장학금 허락서’를 받아서 동경에 있는 김재준에게 보냈다.
송창근은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무언가를 주선하고 마련하는 데 매우 유능하고 노련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매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김재준을 위해서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 허락서를 받아낼 때 무슨 말로 프린스톤 당국자들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처럼 공부 잘하는 한경직도 ‘150불’의 장학금을 받는 데 불과한데, 얼굴도 본 적 없고 게대가 현재 일본에 있는 김재준에게 ‘200불’ 장학금을 주도록 프린스톤 신학교 당국자들을 설득해낸 것은 확실히 ‘특별한 수완’에 속했다.
송창근은 1927년부터 1년 동안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운 뒤, 1928년 9월 초 그곳을 떠나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전학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