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경동] 성육신의 복음

박종화 목사 ㅣ 2009년 1월 11일


성경본문


이사야서 60:1-5

예루살렘아, 일어나서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으로부터 오며,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서 올 것이다. 그 때에 이것을 보는 너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흥분한 너의 가슴은 설레고, 기쁨에 벅찬 가슴은 터질 듯 할 것이다. 풍부한 재물이 뱃길로 너에게로 오며, 이방 나라의 재산이 너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아멘.

고린도후서 4:3-5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14-18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아멘.


설교문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호렙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겠는데 당신 얼굴 좀 보여주십시오. 제가 직접 얼굴을 보고 알현하고 내려가서 당신께서 주신 말씀만이 아니라 당신의 얼굴도 직접 봤다고 증언하고 싶은데 하나님, 얼굴 좀 보여주시지요.” 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여줄 수 없다. 내 얼굴을 보면 너희들은 죽는다. 생명을 택하려면 얼굴 볼 생각을 포기하고 내 말씀을 전하고 내 말씀대로 살게 하여라.” 였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욕구, 요구, 요청을 이런 방식으로 출애굽기, 창세기에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찾고 싶기도 하지만 얼굴도 보고 싶어 합니다. 좋은 말씀, 뜻 깊은 말씀을 듣고 누가 그 말을 했는지 그 말이 진심일지, 그 말씀을 하신 분의 표정은 어떤지 알고 싶으시죠? 당연한 욕구입니다. 하나님은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겨우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이 지나가시면서 모세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으로 모세의 눈을 가리고 나서 그 다음에 지나가면서 ‘뒷모습만 보아라’ 이렇게 모세한테 말했습니다.

모세를 출발점으로 해서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모든 구약에 쓰여진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얼굴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무슨 역사라고 해야 좋냐고 하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이스라엘 백성과 또 말씀이 통치하는 전 세계 사람들 간에 말씀과 역사 간의 직접관계여야하지 누군가 중간에 나서서 연결시킨 일을 한번도 구약 성경에 담아놓지 못했습니다.

성탄절, 크리스마스가 왜 중요하냐고 하냐면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셔서 얼굴을 보여주겠다. 말씀만 가지고 이 땅을 구원할 수가 없다. 얼굴을 보여주겠는데 얼굴 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보여주고 싶다.’ 하나님의 급격한 심경 변화입니다. 세상이 너무 타락했다. 말씀만 가지고 살아갈 역사가 없다. 이제는 혼신을 다한 내 얼굴과 몸과 혼과 육을 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준 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몸입니다. 창세기에 말씀하셨던 그 분이 오늘 아들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출발을 교회력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성탄절이 우리 모든 신앙의 출발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성탄을 지켰습니다.

오늘은 주현절인데 하나님이 나셨고, 나신 그 분이 오늘 우리한테 직접 출현하셔서, 사실 세례도 받으시고 우리한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우뚝 선 날, 주님이 우리한테 몸을 입고 완전히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오셨습니다. 에피파니(Epiphany), 그래서 오늘이 주현절입니다. 상징적인 표현이긴 합니다만, 이제는 말씀을 입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듣고 말씀을 몸으로 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빛을 만드시고 사람까지 만들었던 창세기 이야기, “말씀으로 창조하셨느니라”의 그 분이 오늘 요한복음에 보면 그 말씀이 몸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함께 사십니다. 그런데 육으로 오신 그 말씀, 하나님이 우리한테 오셨을 때 보니까 그 얼굴에는 광채가 가득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 하셨던 하나님의 광채가 너무 크므로 어둠과 죄로 얼룩진 인간들이 얼굴을 보면, 영광을 보면 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얼굴을 봤더니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때와 같이 영광으로 가득한데, 광채로 가득한데, 그 광채가 너무 크고 놀라와서 볼 수가 없답니다. 그럼 안 봐야죠.

그 다음 말씀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영광이 가득 한데 가득 찬 그 영광의 속을 들여다 봤더니 그 영광의 이름이 ‘은혜와 진리’라고 되어 있습디다. 영광은 광채가 가득차서 빛이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영광에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담겨 있답니다. 은혜가 아닌 영광은 영광이 아닙니다. 그 영광 속을 들여다 봤더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더라. 은혜와 진리가 영광 속에 풍성하더랍니다.

이 영광은 창세기 때도 있었던 영광이고, 오늘 이사야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오시면 영광이 그대 위에 나타날 것인데 그 영광이 너무 커서 그대들의 얼굴엔 기쁨이 넘치고 흥분한 당신들의 가슴은 설레고 기쁨에 벅찬 가슴은 터질 거라고 합니다. 그런 영광이 올 것이라고 이사야서에서 예언 했는데 그 예언이 오늘 요한복음에 봤더니 영광은 너무 좋은데 가슴 벅차고 터지고 다 합쳐서 ‘은혜와 진리가 가득 찬 영광’이 오늘 나타난 걸 보았답니다. 모세의 간청이 오늘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의 모습을 입고 우리한테 왔습니다.

지금 한참 지났지요. 이천 년 지났는데. 기독교 초기 역사도 보면 영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 타락해서 세상을 좀 등져야, 속세를 등져야 하나님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해서 ‘탁발승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 탁발승 제도는 속된 세상을 떠나자는 뜻으로 탁발을 하고, 수도원같은 곳에 떨어져 살면서 명상도 하고 거기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불교 스님들한테 여쭤봤습니다. 불교에도 탁발 스님제도가 있었는데 삭발이라고 한다더군요. 스님들 말씀이 본래 머리카락은 세상 욕망의 상징이 되어서 불교 용어로 ‘없을 무(無), 밝을 명(明), 풀 초(草),’ 해서 머리카락을 ‘무명초’라고 한답니다. 빛이 없는 풀, 빛이 없으므로 어두움의 풀, 세속적 욕망의 상징. 그래서 청정수양을 하려고 하면 머리를 깎는 것으로 속세와 구분합니다. 그렇게 산다고 해요.

기독교 탁발승 제도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보면 일제시대가 시작되어서 상투를 틀었던 머리를 자른다고 난리가 났었죠. 우리는 머리를 가져야 남성의 경우도 여성의 경우도 체통이 선다고 합니다. 제가 이 탁발, 삭발을 생각하면서, 우리 머리들이 속세의 것이라고 그러면 머리 깎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특별히 나이가 드셔서 머리가 희끗희끗 하시면 속세가 반값쯤 되는 것 같은데 저 같이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새카만 사람은 속세가 너무 많이 묻어서 죄를 많이 짓고 사나보다, 라는 생각도 들고요.

농담 같은 이야긴데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며, 머리털, 머리카락, 외형의 모습, 이 모습이 육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고스란히 육신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왜 거룩하신 하나님이 속세의 옷을 입었을까요? 왜 하늘의 주인이 땅의 모습을 입었을까요? 그래야 구원받는가요? 세상 사람은 타락을 했든 안 했든 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에는 감동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야, 몸을 비벼야, 손도 만지고, 얼굴도 비비고, 가슴도 비벼야 그 진실이 온기로 다가오고 또 몸으로 주시는 말씀이 감동으로 다가오고, 은혜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깨달으시고 오늘 몸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철두철미, 세속의 옷을 입었습니다. 세상의 옷을 입었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타락한 겁니까? 하나님은 진실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은 세속화 되었습니까? 그렇지요. 하나님은 세속을 스스로 입으셨지요. 그런데 그 세속을 입은 그 얼굴을 봤더니 이러하답니다. 얼굴은 까맣지 않고 밝고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더라. 욕심과 세속의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얼굴이더라.

하나님은 본래 자기가 창조하신 자기 혼을 담은, 형상을 담은 인간의 이미지를 담은 그 모습대로 새로운 인간의 모습대로 육을 입었습니다. 모범입니다. 은혜가 없는 인간, 타락한 인간 대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 인간이 되고 세속적이 되고 세상적이 되는 것이 옳으나 영광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은혜로 가득 찬 얼굴이어야 한다. 진실을 바라는 얼굴이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이지, 탈속적, 세속적, 세상적인 세상이 아니라 이런 뜻을 가져야 참으로 인간적이고 세속적이고 역사적이니라.”

저는 하나님을 찾자고 모인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이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진실된 인간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보니 그 얼굴 속에는 은혜가 있습디다.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육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 무엇으로 말씀하십니까? 입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저는 오늘 입으로, 말로 설득합니다. 우리 성가대는 찬양하셨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음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의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모든 인간이 하는 위대한 사업들, 이 모든 것이 육이 되었다는 말씀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된 음악 속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러면 그 음악은 말씀이 육신이 된 음악입니다. 아픈 사람 치유하고 돌봐준 의술 속에 그 의술이 진실합니까? 의술은 감동을 줄 만큼 은혜가 충만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술이 되었습니다, 라고 기쁘고 즐겁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얘기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고, 세상이 만든 것은 문명이고, 과학이고, 기술이,이런 식의 구분은 신약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육을 입고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기술 속에도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문명의 옷도 입습니다. 하나님은 정치의 옷도 입습니다. 하나님은 문화와 역사와 경제의 옷도 다 입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죽이 아니고 머리카락을 깎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진실입니다. 가슴이 크고 작으냐는 외형이 아니라 가슴 속에 따뜻한 은혜가 충만합니까? 우리가 만드는 모든 문명이 모든 역사 속에 진실과 은혜가 충만합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육화되었지 거죽의 모습으로 육화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문명 속에서 언어치료, 음악치료, 미술, 의술, 사업, 정치 이 모든 속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보고 주시는 말씀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과거는 언어로 살았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펼치는 과학 기술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 진리의 역사를 담고 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렇게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하는데 아는 것만 아니라 알면 깨달아서 진리의 창고 속에, 은혜의 가슴 속에 깨달은 바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안다는 말 중에 희랍 말로는 ‘gnosi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독일말로 하면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안다’는 ‘kennen’ 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읽어서 아는데 아는 것을 지식의 창고, 지혜의 창고, 가슴 속에 품어두는 것을 ‘er kennen’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몸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하는 인식 ‘erkennen’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식의 언어를 이해하는대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않으면 우리가 제대로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말은 아는 것을 깨달아서 제 창고에 두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듣고 깨달은 대로 행동으로 옮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kennen` 이라는 말 앞에 `be`를 붙여서 `bekennen` 이라고 하면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er kennen’은 알고 깨닫는다는 말로 신앙의 첫 번째 단계이고, ‘bekennen’은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입니다. 삶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식의 언어를 통해서 말하는 것도 신앙입니다. 신앙에 더 중요한 것은 알았으면 아는 대로 고백하고 실천하는 ‘bekennen`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 뜻은 “나는 그대들에게 몸으로 와서 가르쳐주마. 깨달아 알아라. 알았으면 실천해라.” 는 것입니다. 의술하시는 분이 최대한 의술로만 사람을 고치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의술 속에 담긴 혼이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고 그림 자체가 감동적인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림 속에 담긴 작가의 혼이 있습니다. 음악 속에, 그림 속에, 언어 속에, 의술 속에, 사업 속에, 정치 속에도 혼이 들어가 있습니다. 혼의 이름은 은혜와 진리,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면 그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오늘 우리 세상에 위기가 닥쳤다고 고민이 많으시죠? 하나님은 직접 경제정책을 세우시는 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속에 들어와서 은혜로 채우시고 진리로 채우셔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축복을 은혜와 진리로 풍성히 하는 역사가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도 그렇고,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 가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하늘과 땅을 자의적으로 구분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땅 속에 왔습니다. 땅 속에 온 하늘은 이제 우리가 말하는 혼으로, 영으로, 정신으로, 가장 밑받침 되는 윤리로, 도덕으로, 이 땅을 구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가 오늘 말씀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으로 받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신이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신이 종교적인 신만이 아니라 모든 신은 이 땅에 세상의 옷을 입은 육화된 신일 수 있습니다. 욕심의 신, 절망의 신, 이것들이 와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늘의 신을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방해받지 말아야 복을 받습니다. 진실된 복이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하늘의 뜻을 담은 역사가, 우리 속에 있는 인간의 모든 역사 속에 하늘 뜻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육의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살려는 영으로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를 구원하실 때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역사의 정신, 혼을 하나님이 오늘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이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하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주현절에,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역사대로 살아갑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멋입니다. 원래의 하늘 뜻을 이 땅에 심도록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만이 아니고 가정의 역사만이 아니고, 우주 역사만이 아니고, 모든 역사가 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힘입니다. 엄청난 힘으로 이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참고로 이 힘이 뭘까에 대해서 최근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느 학자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조셉 나이’라는 분을 아시지요? 하바드의 케네디 행정대학원 원장도 지내셨는데 이 분이 쓴 용어 중에 이 세상을 통치하려는 힘이 있는데 그 힘에는 하나가 무력도 있고, 권위도 있고, 경제력도 있고, 또 누르고 버리는 카리스마의 힘이랍니다. 그 힘을 ‘하드파워’라고 이름합니다. 그런가하면 전문가 시대, 인터넷 시대, IT문명 시대에서 더 중요한 것은 외교적인 힘, 부드러운 힘, 설득하는 힘, 과거에는 상하로 움직이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지배하는 시대였다고 하면 지금은 수평 속에서 서로 관계가 좋게 설득하는 힘, ‘소프트 파워’.랍니다.

하드파워도 소프트 파워도 사실은 따지고 보면 외형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이런 용어를 개발했습니다. 하드파워가 필요할 때가 있고 하는데, 소프트 파워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 둘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합하면 ‘스마트 파워’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에 가장 필요한 스마트 파워는 뭡니까?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좋은 의미에서 같이 응축된 스마트 파워는 뭡니까?

이 분의 용어를 빌어서 오늘 성경말씀을 보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에게 온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이루어졌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2:2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오늘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왜 갑자기 십자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의 몸을 입었다고 하는데 육이 뭡니까? 육은 십자가가 원형입니다. 십자가는 뭡니까? 헌신입니다. 절망입니다. 죽음입니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몸이라고 말하는 마지막 단계가 죽음이잖습니까? 죄의 값으로 죽잖습니까? 매 맞았잖습니까? 피를 흘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조롱도 받았지 않습니까? 인간사회가 감지하고 있는 모든 것의 총합체가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이 된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죽었습니다.

육화된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통치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통치했습니다. 엄청난 하늘의 권위를 가진 하드파워를 설교 하셨지만 소프트파워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스마트 파워를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인간이 되신 모습의 원형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진실 없이는 부활의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를 구하십니까? 부활을 원하세요? 경제위기의 극복을 원하세요? 십자가의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십자가의 진실은 뭐냐? 우리가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는 것이, 참회하는 것이 십자가의 진실입니다. 그 속에 오면 부활이라는 은혜가 넘쳐나서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육화된 하나님의 원형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믿으면 그 속에서 부활이 잉태되고 새로운 생명이 잉태됩니다.

역설적이지만 진실, 역사적인 진실, 신앙의 진실, 고백하는 진실 속에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빛을 받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들을, 십자가의 현실로 받아드립시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는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다시 용해되어 회개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죽음을 이긴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고 계십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으십시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마. 십자가에서 몸이 되마.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몸이 되마. 십자가와 부활의 진실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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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