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목사 ㅣ 2009년 1월 18일
성경본문
이사야서 42:1-4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아멘.
고린도전서 1:26-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3:13-17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아멘.
설교문
아름다운 찬양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이야기가 주 본문입니다. 오르간 전주에서도 요단강에 오신 예수님을 연주하셨고, 성가대 찬양 부르셨고, 후주도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우리 찬송도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겁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장면을 제가 간략하게 재현해 보겠습니다. 예수보다 6개월 먼저 온 세례 요한을 모시고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가 ‘세례’라고 표현하지만 본래 본문대로 하면 ‘침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요단강에 풍덩 들어가서 온몸 전체를 적시셨으니까 침례가 맞는데, 역사적으로 침례 절차 때문에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로 바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에게 엄청난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올라온 순간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그를 좋아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이렇게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이 열리고 난 음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나오기 전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더니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세례 받는 예수의 몸 위에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예수께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늘이 열린 그 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베풀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성부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푸는 이유는, 세례 받는 한 분 한 분한테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를 좋아한다’ 고 말씀하시는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는 자는 마치 요단강에서 침례 또는 세례를 받는 예수처럼 사랑의 고백을 듣고, 그리고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는 그런 사람의 심정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와 똑같은 몸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성령의 이야기는, 그냥 하늘이 열리는 게 아니고 하늘이 열릴 때는 열린 하늘이 성령을 통해서 세례 받는 자 위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요단강에서 합동 사역을 하셨습니다. ‘삼위일체’가 바로 이 말입니다. 세례 받을 때 성부, 성자, 성령이 합동으로 사역하십니다.
세례 받은 자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매일같이 좋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분 모두, 어릴 때 세례 받으신 분, 성인으로 세례 받으신 분, 세례는 교회가 하는 단순한 의례적인 행사가 아니고 지금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기억하는 한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좋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나를 보증해 주십니다. 예수와 함께. 이 사실을 여러분 모두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세례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이 열려야 땅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열어야 사람이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세계의 역사가 출발하면서 모든 종교의 발전을 보면 종교 또는 신앙은 하늘과 늘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우리나라가 생겨난 날을 ‘개천절’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는 날, 왜 그렇게 불렀을까요?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는 땅 아래 지하와 땅 위의 하늘을 함께 누리고 살아갑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이 열려야 축복을 받는다고 옛날부터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하늘이 열려야 이 땅이 축복 받습니다. 하늘을 하나님으로 바꾸시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열어야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임하고, 하늘이 열립니다. 하나님의 가슴이 열린 그 뒤로 예수라고 이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우리보고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하나님이 너희들을 좋아하신단다. 나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탁해서 생긴 것이 교회입니다. 하늘이 열리면 땅이 요동칩니다. 하늘이 닫히면 아마 비도 없겠죠. 햇빛도 없겠죠. 공기도 없겠죠. 땅에 살아가는 생존의 모든 조건이 ‘하늘 열림’에서 나옵니다. 하늘이 열려야 땅이 살아갑니다.
저희들이 늘 예배를 마칠 때 혹은 가정 예배 때, 기회 있을 때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합니다. 기도의 내용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땅 위에서 이루는 모든 역사는 신앙고백으로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하늘이 열려서 하늘의 복음을 이 땅에 심어주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기 전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하늘이 열린단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와서 웅지를 트고 줄기가 되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고 그래서 이 땅에 있는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한다는 고백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무슨 고백이 필요합니까? 사랑한다는 립 서비스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사랑이 열매를 맺어야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데 사랑이 무얼로 귀결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반드시 새로 태어납니다.
이 말을 오늘 이사야 본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건강하신 거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살아가시면서 나는 상한 갈대라고 자책하시는 경우는 없습니까? 싱싱한 갈대가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약해서, 심약해서, 저주를 받아서, 따돌림을 당해서 나는 한 가정 속에 이 사회 속에서 상한 갈대와 같은 심정이라고, 이렇게 자책하는 분 안 계십니까? 나는 그대들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절대로 꺾지 않으신다고, 그리고 갈대를 다시 회복시켜서 싱싱한 갈대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사야의 고백입니다.
혹시 세상에서 훌륭한 일을 하시겠다고 나섰다가 기름이 모자라서, 심지가 다 타버려서,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고백하면서 사시는 분 계십니까? 꺼져가는 등불은 바람이 끌 수도 있고 우리가 입으로 불어서 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꺼져가는 등불같은 인간들을 하나님은 절대로 끄지 않으시고 새롭게 불을 밝혀 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공의를 베풀어서 사랑을 베풀어서 구원을 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진실’이라고 이름하십시오. 그 진실된 하나님이 오늘 하늘 문을 여시고, 자기의 마음을 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꺼져가는 등불같은 역사를 다 다시 구원하시고 상한 갈대 같은 사람들을 다 보듬어서 새롭고 의롭고 복된 인간으로 역사로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습니다. 그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첫 번째로 하나님의 모습을 재현하셨습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공식적 시작입니다. 세례 받으신 분,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하셔야 합니다. 단순히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한다고 하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다고 합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일으켜서 하나님의 귀한 나라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신답니다. 이 사실이 너무나 고마워서 오늘 세례를 다시 받고 싶습니다. 우리 세례를 다시 받읍시다. 물로는 한 번 밖에 못 받지만 성령이 임재하면 성령의 세례는 매일같이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나니 ‘하나님이 사랑한다.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 뜻이 임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라고 여러분들 기도하실텐데 그래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장소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간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하늘이 열리면 뭐합니까?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지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고뇌 끝에 답을 찾지 못해 예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디에 임합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공간화 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몇 월 며칠에 온다고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 측정 단위로 얘기하지 말라. 우리의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를 묶지 말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있다고 하지 말고 여기저기 있다고 하지 말고, 단 한 마디만 하여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의 마음에 있느니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나라는 우리들의 마음에 있답니다.
제가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제 마음 속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으면 저는 천국 시민이 못 됩니다. 남들 보기에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행복이 깃들지 않으면 우리가 복되다 고백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겉은 꾸밀 수 있고 몸은 꾸밀 수 있으나 마음은 꾸밀 수 없습니다. 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이 우리한테 늘 하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사실 큰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소리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읽어봤더니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국 표준 과학원이 조사한 내용인데 소리 중에 주파수가 낮은 저주파 소음이 있습니다. 이 저주파 소음은 실내에서 듣는 것이 실외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면 소리가 크고 안에 들어오면 소리가 없는 것 같은 아주 주파수가 낮은 음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자동차 타고 가다가 조용한 차 안에서 잠을 못 주무시는 분이 계시지요? 비행기 타시면 비행기 타자마자 잠 못 이루는 분이 계시지요? 뭔가 봤더니 주파수가 낮아서 낮은 소리는 귀에는 잘 안 들려도 몸은 더 심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저주파 소음에 노출되면 마치 우리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처럼 심장 박동이 빨라져서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작은 소리가 제 귀에는 안 들리는데 아마 귀가 없는 몸은 느끼나 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작고 나지막한 진실의 이야기, 하늘이 열려서 하는 작지만 심각한 이야기, 세상의 귀들이 잘 못 듣는 것 같습니다. 근데 세상의 몸통은 느껴서 요동을 칩니다. 잠을 자라고 해도 자지 못하고 쉬라고 해도 쉬지 못하고 평화를 누리라고 해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나라가 열려야 행복이 오는데 그 행복은 바로 인간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느니라. 나지막한 소리를 내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느니라.”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속을 한번 다스려 보십시오. 진정한 사랑이 뭡니까?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제가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어떻게 고백합니까? 제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은 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제가 확신하면 저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은 모든 복은, 우선 마음속으로 오고, 마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이 행복해야 그 곳이 하늘 음성으로 가득차야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있습니다.”
간음이요? 몸으로 간음해야 간음인 줄 아십니까?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죄입니다. 실제 사람을 죽여야 살인입니까? 마음속으로 살인하면 그것도 살인죄에 속합니다. 가장 흉악한 죄가 마음에 있듯이, 가장 최고의 축복도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느끼고 감지하고 그래서 우리의 행복을 또는 저주를 가늠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열린 하늘의 음성은 제 마음 속에 왔습니다.
그러면 이 국가는 어디가 마음입니까? 국가의 마음은 뭡니까? 국가의 정치가 잘 된다고, 경제가 잘 된다고 그래서 국가가 훌륭한 국가가 됩니까? 선진국이 뭡니까? 모든 국가마다 마음이 있습니다. 국가의 혼이 있습니다. 국민의 혼이 있고 국민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으로 가득차야 그 국민이 국가가 행복한 것이지 외형적인 조건을 가지고 국가가 최고라고, 선진이라고 그렇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늘 세상의 역사와 문명이 발전하면 이 세상은 행복합니까? 소득 수준이 올라가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가 전부 행복 지수가 높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근본으로 이 나라의 정신이, 세계의 정신이, 시대의 정신이, 국가 국민의 기본 구조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하고, 국가의 혼이, 민족의 혼이, 하늘의 뜻을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요즘 위기라고 말하는데, 외형적 위기는 극복합시다. 가장 중요한 위기는 마음의 절망입니다. 우리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하늘 뜻을 담지 못하는 이 절망을 빨리 극복 합시다. 안과 밖이 같이 가야 절망도 극복되고 복이 있는 것이지 밖이 요란하고 안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양 철학을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서양 철학자 중에 신학자이기도 하신 분이 있는데요,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라는 분이 근대 해석학의 태두에 속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이 분이 신학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 신학에 속해서 깊은 보수신앙을 가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보수적인 신학자도 아닙니다. 아주 진보적이고 자유적인 신학인데 해석학자로써 이런 얘기를 합니다. 신앙이 뭐냐고 물으면, 열린 하늘에 하늘의 음성을 진실로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물으면, 그 분의 논리대로 해석학의 가장 기본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절대의존감정"(das schlechthinnige Abhaenigkeitsgefuehl)! 감정이라는 말을 마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내가 느끼고 감지하는 모든 것으로 하늘 뜻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인간 중심이 아니고 하늘 중심으로, 절대 의존 방식으로. 그 대신에 이것저것 따지기 앞서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주심이라고 생각하는 절대의존감정을 한번 가져보시면 하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갖되 따져 느끼는 신앙도 있지만 한 번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으로 감성을 가지시면, 절대적으로 맡기는 마음을 가지시면 그 마음속에 하늘이 열리고 말씀하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신학적, 철학적 해석학의 모델입니다. 비판은 여러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늘 뜻은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 뜻에 완전히 맡겨 보시지요. 그래서 따지지 않고 절대 의존하는 감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 감정을 예수님 당시에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이 아니고 당신 뜻이 한번 임해주십시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슐라이에르마허의 얘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독일 출신 미국 신학자 중에 틸리히(Tillich)라는 분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 분은 오늘같이 이렇게 험난하고 아름답지 못한 세상에서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자기 질문을 던졌습니다. 물론 2차 대전 이후에 암담한 세상을 향해서 던진 질문입니다. 신앙이란 우리 삶의 모든 관심사 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관심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이름합니다. 이 분의 말로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랍니다. 그 분에 따르면 신앙이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 나라가 뭐냐고 물으면, “제 관심사 중에 가장 깊은 것, 가장 높은 것, 가장 궁극적인 관심, 그 관심을 신앙”이라고 대답합니다.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나 절대의존감정, 궁극적 관심, 굉장히 복잡한 용어를 썼습니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합니다. “네 마음에 있느니라” 제 마음에서 가장 깊은 마음, 그것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서 느끼는 절대 의존의 감성, 감수성, 감정을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국가의 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역사의 가장 깊은 정신 속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시대의 마음을, 가정의 마음을, 우리 모든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님은 주관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열린 그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히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분은 이 땅에 와서 구세주가 되셨고, 이 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고 올라가시고 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나는 하늘과 땅을 매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땅에서 풀면 하늘이 풀리고 땅에서 열면 하늘이 열릴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늘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영생까지도 제 신앙 가지고 좌지우지 한다는 뜻입니까?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이, 하늘은 이미 열린 채로 와 있다. 그래서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도 주시고, 비도 내리시고 은혜도 주시고 이미 하나님은 열려있다. 땅이 매면 열린 하늘의 비를 그대들이 닫으면 못 받는 것뿐이지 이미 열려 있는 햇빛을 그대들이 닫으면 못 받는 것뿐이지, 하늘은 열려 있다.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열려 있습니다. 믿는 자, 안 믿는 자, 다 열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햇빛 받고 싶으면 열려있는 빛을 향해서 당신의 마음의 빗장을 여십시오. 은혜를 받고 싶으면 빗장을 여십시오. 마음도 닫아놓고 비가 안온다고 하지 마시고 마음의 빗장을 풀고 하늘을 향해서 열린 자세로 가십시오. 그 뜻입니다. 이제는 결단 밖에 안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해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라고 얘기했듯이 오늘 열면, 가장 깊은 곳을 여시면 열린 하늘이 그냥 우박처럼 쏟아져 내려온답니다. 열고 안 열고는 우리의 자유적 결단입니다. 신앙적 결단입니다. 우리는 물로 세례를 한번 받고 신자가 됐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열린 가슴마다 불로, 성령으로 우리한테 오셔서 사랑을 사랑하는 아들, 사랑을 듬뿍 부어주신답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매일같이 세례 받으십시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십시다. 순간순간마다 엽시다. 그리고 오신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한번 맛봅시다. 이것이 신앙결단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