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초부터 미국의 대한반도전략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고고도미사일방어시스템(사드, THAAD) 배치 논의가 불거지더니 한미연합사, 한미연합사단 창설 등 굵직한 안보 현안이 잇달아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다가 베를린을 방문 중인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현지시간으로 10월22일(수) 주한미군 감축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케리 국무장관은 이어 미국인 인질 석방에 대가는 없었다고 하면서도 추가로 인질을 풀어주면 ‘혜택(benefit)’을 줄 수 있음을 내비쳤다. 또한 북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협력 중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미국이 거론한 한반도 관련 의제들을 들여다보면 다소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지난 달 불거진 현안들, 즉 사드 배치나 한미연합사단 창설 등은 군사전략상 ‘북한의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이 기본 전제이다. 사드는 미국으로 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고고도 탄도미사일을 탐지해 요격하는 체계로 다분히 북한의 미사일을 염두에 둔 것이다. 실제 한국 군 당국은 사드가 대북 억지력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한미연합사단 창설은 북한 급변 사태 시 신속대응을 위한 포석이다. 그러나 케리 장관의 발언은 궤를 달리한다.
미국은 외교적으로 지난 부시 행정부 시절 당시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 천명한 기조를 줄곧 고수해왔다. 콜린 파월 장관은 “(북핵 문제에 관해) 모든 선택지를 다 검토 중”이며 “잘못된 행실(misbehavior)을 일삼는 북한에게 보상(reward)을 줄 수 없다”고 못 박았고, 이런 정책 기조는 현 오바마 행정부에게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케리 국무장관은 ‘북핵 위협’ 감소를 전제로 주한미군 감축을 언급하는가 하면, 추가 인질 석방에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의향도 드러냈다. 따라서 케리 국무장관의 발언은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일보 진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과연 미국의 정확한 속내는 무엇일까? 먼저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근본 토대를 살펴보자. 사실상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은 없다. 미국은 글로벌 전략이란 큰 틀에서 한반도 관련 현안을 결정해 나갔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미국에 편리한 방향으로 채워져 나갔다. 즉,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종속돼 왔다는 뜻이다.
지금 비쳐지는 미국의 태도는 기존 행동범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드 배치라든지 한미연합사 존속은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위협’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제들은 궁극적으로 미-중 대결구도를 형성하는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동북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보다 자칭 ‘이슬람국’(IS)의 준동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나가야 한다. 석유자원이 갈수록 고갈되는 상황에서 중동 정세의 안정적 관리는 최우선 순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동북아, 특히 한반도에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미국으로서는 난처하기 그지없다. 미국은 비무장지대(DMZ)에 지상군 병력을 주둔시켜 놓았기에 남북간 분쟁이 전면적으로 확대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위기상황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과의 협력은 필수여서 군사적 대결구도는 미국의 국익에 마이너스다. 케리 국무장관의 주한미군 감축 및 대중 협력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주권국가임이 의심스러운 우리 정부
이제 눈을 안으로 돌릴 차례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에 대해 우리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심스럽다. 한국 정부는 케리 국무장관의 발언에 화들짝 놀라며 진화하기에 급급했다. 케리 장관의 발언에 대해 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 “주한미군 감축은 먼 훗날 비핵화가 실현되는 국면에서 논의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더구나 뜨거운 감자인 전시작전권(전작권) 환수 문제에 이르면 숨이 턱 막힐 정도다.
한미양국은 현지시간으로 23일(목) 미 국방부에서 열린 제46차 안보협의회(SCM)에서 전작권 환수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이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원래 전작권 환수는 노무현 정부 때 2012년으로 시한을 정했다가 지난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2015년으로 한 차례 연기한 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사실상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전쟁이 발발해도 미군 장성의 지휘를 받아 병력을 움직여야 하는 처지에 계속 머물게 됐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핵심 주체이고, 그래서 북한의 위협을 완화해 궁극적으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정책적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 안보현안과 관련된 흐름에서 우리 정부는 존재감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이런 무능이 비단 이번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대박’ 운운하며 통일을 의제로 끌어 올렸지만 이렇다 할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또 나라 안팎에서 북핵 포기를 주장하면서도 역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내놓지 않아 결국 자신 스스로 통일‧대북 정책을 공염불로 만들었다.
절호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 지난 10월4일(토)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에 맞춰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등 북한 권력 서열 2,3,4위 인사가 한꺼번에 방한해 북한이 적극적인 대화의지를 나타낸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정부의 대응은 지지부진하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안보 관련 의제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고, 우리 정부는 진화에만 급급한 모양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나라가 주권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있기에 지도자들에겐 전통적으로 남다른 외교노력이 요구돼왔다. 그러나 역대 지도자들은 이런 요구에 대해 강대국에 기대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 기댔고, 구한말엔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굴욕을 당했다. 해방 이후엔 미소 냉전의 와중에서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미증유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냉전은 일찌감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체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체제를 탈피해보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 없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북한의 위협을 감소시켜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미국 등 동맹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지정학적 민감성 때문에 강대국의 이해관계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이번에 미국과 전작권 환수를 무기연기하기로 합의하면서 한국군의 ‘킬 체인’(Kill chain) 및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구축에 필요한 수십 조 원대의 무기를 추가로 미국으로부터 구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사주권 포기 대가로 국민의 세 부담만 늘려놓은 셈이다. 계속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요원하며, 안보에 관한 한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한국 교회는 보수 정권이 내세운 남북대결논리가 마치 성경에 부합되는 메시지인양 선전해 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의 말이다. 지금 우리 스스로 ‘동맹’ 혹은 ‘안보’라는 허울을 내세워 미래를 지워나가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때이다. 또한 교회가 그동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남북 대결구도를 조장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그 마음을 돌이켜야 할 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