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주는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 주간이었다. 여기에 발맞춰 지난 10월30일(목)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루터, 한국교회 사제주의를 다시 말하다”를 주제로 연합포럼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황병구 한빛누리재단 상임이사는 발제를 통해 “성도들이 엄두를 내어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일상이 직업목회자의 일상보다 거룩할 수 있다는 해석을 해내도록 말이다. (중략) 신학과 목회가 직업인 이들 앞에서 삶의 임상을 제공하는 이들로서 자부심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황 이사의 동의를 얻어 발제문 전문을 싣는다.
12년 전쯤이다. 우리에 익히 잘 알려진 한 잡지의 편집위원회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 다소 뼈아픈 이야기를 건네셨다. 유럽지역에 많은 종교개혁의 흐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개혁은 그나마 당시의 사제(지금이라면 목회자)그룹이 자체개혁을 한 경우였다는 것이다. 루터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고 이른바 평신도들의 개혁운동은 협력의 전선과 동력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해석이었다. 약간 씁쓸했던 기억은 그래서 한국교회의 개혁도 아직까지는 목회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치셨던 것이다. 물론 그분도 목사님이셨다.
물론 전략적인 선택으로서 각성된 목회자들의 자발적 교회개혁이 현실적으로 또 상대적으로 더욱 유효하고 절실하다는 메시지로 여길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점진적인 자체개혁론이 얽매일 수 있는 한계는, 정치적으로 비유하자면 정권교체가 아닌 정권재창출이 가지는 한계와 유사한 것일 수 있겠다. 사실 개신교 안의 사제주의, 즉 성직주의의 오해와 편견에 대한 신학적 종교사회학적 논의를 반복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돈된 주장들을 넘어서기 힘들고, 이미 탁월한 관점의 저술과 논의들이 선행되었기에 이 짧은 발제의 초점은 되도록 직업목회자들이 아닌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성도들이 이 과제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에 대해 맞추어보려고 한다.
서로 의존하는 우정 관계의 회복
소위 평신도로 일컬어왔던 일반적인 성도들(성직자와 평신도라는 표현 대신에 이 글에서는 직업목회자와 성도들이라는 표현으로 대치해보려고 한다)은 직업목회자들로부터 전도의 대상, 훈련의 대상, 목양의 대상으로 취급(?)받아왔다. 이 현상은 마치 전도사님께 훈육과 돌봄을 받는 주일학교 학생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성도들 안에서 직업목회자들을 영적 스승, 영적 부모로 인식시키는 주요한 풍경이다. 한 때 이 풍경을 반전시키기 위해 세자로서의 성도와 이를 가르치는 집현전 학자로서의 직업목회자로 비유한 설명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는 또 다른 극단일 수도 있다. 가장 건강한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피차 가르치며 피차 복종하는 우정 관계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일단은 성도들에게 직업목회자들을 친구로 사귀는 연습을 하자는 쉽지 않은 제안을 드린다. 사실 알고 보면 그렇게 외로운 존재들도 드물다. 성도들의 질문에 무언가 늘 답을 마련해야 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윤리적으로 흠 없이 살려고 애쓰며, 경제적인 결핍에도 늠름해야 하는 사람들, 긴장을 풀고 살지 못하는 운명을 자처한 분들에게 과연 속 깊은 친구들이 얼마나 될지 질문하게 된다. 유사목회자의 삶을 살아본 한 사람으로 고백하건대 두루 피곤한 삶이다. 직업목회자들에게도 삶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
성도들에게는 피차 한 인간으로 직업목회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과감하게 이름부터 부르자. 형님 아우, 언니 동생으로 다가가자. 물론 대부분 당황스러운 반응으로 거부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곳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서로에게 의존적인 우정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목숨까지 내어주는 형제우애가 가능한가 물어보아야 한다. 존 스토트가 그의 마지막 저서 『급진적 제자도』에서 이야기한 ‘의존’의 제자도를 잠시 요약해본다. 이 덕성은 직업목회자와 성도들 모두에게 우선적으로 직면할 과제이다.
“굴욕은 겸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전적인 무력함의 심연을 파헤쳐 보았다면 자신감의 언덕을 오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것은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시이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2)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도 갓난아이로 태어나 살다가 죽으심으로 전적으로 피조물의 짐이 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서로를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입체적인 시장 영성의 발견
기독교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대개 우리는 가톨릭 시절에 발달되었던 수도원 영성이 상실되었다고 자책하고, 그 진중한 영적 여정을 회복하기 위해 관상기도라든지 떼제공동체의 찬양을 떠올린다. 초대교부들의 침묵기도와 사막의 영성을 수련한다. 바쁜 도시의 삶이 주는 비인격적 일상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자아성찰을 위한 이러한 고요와 묵상이 절실하다고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에 한 가지 우려를 전한다면, 이러한 영성추구의 과정을 지도하는 것 역시 몇몇 앞서가는 직업목회자들의 전유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참된 영성은 청명한 자연환경 속에서 배어나오는 그윽한 미소와 평온한 어투에 있지 않고, 온갖 유혹과 갈등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를 극복하는 씨름과 땀방울에 있다고 믿는다.
성도들의 삶이 참된 영성의 주된 현장이라는 구체적인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곳에 거한다는 것이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자부심이 전해져야 한다. 도리어 어쩌면 직업목회자의 일상은 영적 성장의 본류와는 거리가 있다는 자각이 일어나야 한다. 물론 내면세계의 질서에서부터 전문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인생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이 무슨 어려운 목표설정인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왜 내면을 성찰해야 하고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하고 관계의 회복에 애써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깨어진 세상에서 처연히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그 실상에서 도망쳐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는 삶을 살아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성도들이 엄두를 내어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일상이 직업목회자의 일상보다 거룩할 수 있다는 해석을 해내도록 말이다. 심지어는 직업목회자는 모종의 경험이 결핍된 존재여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간접적으로 세상을 경험토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자는 말이다. 마치 수학자 앞에서 공학자처럼, 경제학자에게 반례를 제공하는 경영인의 입장처럼, 신학과 목회가 직업인 이들 앞에서 삶의 임상을 제공하는 이들로서 자부심을 가지자는 말이다. 그것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에 있어서 현장의 일상영성의 가치를 얼마나 부여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미술로 비유컨대 직업목회자들이 영적 도야를 통해 정밀하게 묘사된 회화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면, 성도들이야 말로 일상의 씨름을 통해 거칠지만 3차원 입체조각의 실상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어서 이야기하겠지만 그래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시장영성의 제자훈련은 직업목회자들에게는 넘사벽의 한계가 존재한다. 어쩌면 손을 떼야 하는 영역일지 모른다고 자인하며 겸손히 내려놓아야 한다. 다만 우정의 연대만이 유효하다.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이끌기
성도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는 성도들에게 교회란 피난처도 수도원도 아니다. 한 인격이 변화되고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생활 공동체로 인식된다. 인격의 변화와 공동체의 성숙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어색함이 없다.
교회에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샤만으로서 사제가 아니라 한 인격의 거듭남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공동체에 속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전 과정에 함께하는 자들로서 성도들이 존재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은 성도들마저 자신의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를 급진적으로 떠올려보자.
먼저 과연 성도들은 자신을 구체적인 복음을 전하여 한 인격을 거듭나게 돕는 자로 인식하고 살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물론 직업목회자들도 스스로를 목양전문가, 훈련전문가, 상담전문가로 한정해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사양하는 일이 많다. 전도의 은사가 있는 이들은 따로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참된 사제는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의 복음을 전하고 인생을 건져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직업목회자와 성도의 구별이 없으며 이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사제이다. 양쪽의 삶을 두루 경험해본 이로서 보건대, 비그리스도인들을 만날 기회조차 없는 직업목회자들보다 성도들이 더 사제에 다가선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과연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도와 그들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혹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소그룹 조장이나 일대일 훈련의 리더를 일컫는다면 너무도 협소한 관점이다. 인생을 나누는 친구로서 가끔은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 영적 여정을 함께 걷는 동반자로 서로에게 역할하는가의 문제이다. 일대다의 관계를 맺고 이른바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직업목회자에겐 물리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이다. 앞서 이야기한 시장의 영성을 가꾸는 성도들 간에서 그나마 형성될 수 있는 관계이며,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관계의 전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사제의 역할을 도제의 의미로 해석해본다면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사실상의 사제인 셈이다.
또한 과연 성도들은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자신도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꿈꾸고 세워가는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은 늘 직업목회자들의 몫으로 치부되었었다. 심지어 직업목회자들도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브랜드교회의 조직원으로 일하다가 향후 일종의 분양을 받아 개척하는 소원을 가진 분들이 많다. 성도들도 언젠가부터 이미 번듯하게 세워진 교회에 찾아가서 고귀한 목양의 대상으로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이 되었다. 선교지가 되었든 속한 지역사회가 되었든 온전한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꿈은 도대체 누가 꾸고 또 그 꿈을 누가 실현하는지가 관건이다. 과연 성도들이 이를 구체적으로 꿈꾸고 이루어 간다면 그들이 진정한 사제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사제라는 개념과 정의가 아직도 유효하다면, 직분이나 신분이 아니라 역할이다.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누구의 몫이며 자격 있는 자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 긴급한 역할과 본질적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싶다. 조만간 이름도 빛도 없이 진정한 사제의 역할을 감당한 그들의 수고를 겸손히 인정해줄 수 있는 날이 속히 도래하길 바란다. 아마도 확신컨대 직업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