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공 수업에서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0)을 각색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6)을 만날 수 있었다.
원작 『장미의 이름』은 위대한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작품이다. 이는 중세사, 기호학, 포스트모던 이론과 방대한 지식을 녹여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에 담아낸 작품으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적, 철학적, 기호학적, 문학적 시각 등 다양한 시각으로도 그 복잡한 의미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영화는 1327년 ‘아비뇽 유수’ 당시 교황과 황제 간 권력 다툼이 정점을 이루고 있었으며, 동시에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던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윌리엄은 권력화된 교회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로, 수도승 아드조와 함께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을 찾는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6)의 한 장면. ⓒ스틸컷 |
이 때 수도원에서는 두 사람의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장서에서 사본 채식(책을 필사하고 글자나 테두리, 삽화를 그리는 작업)을 담당하던 젊은 수사 아델모와 최고의 그리스어 번역가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로, 아델모와 필사실에서 함께 일하며 형제처럼 지내왔던 베난치오 수사. 윌리엄은 필사실에서 암호가 적힌 양피지 조각을 발견하고 아델모의 자살과 이번 살인사건 사이에 어떤 책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내게 된다. 하지만 도서관 사서는 장서고에 접근조차 못하도록 막았고, 그 와중에 베난치오 수사의 비밀을 감추고 있던 보조수사 베링거가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윌리엄은 수도원장을 찾아가 세 수사가 사망한 이유가 바로 장서관의 금서라고 주장하며 장서관 출입을 허가해 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수사의 중단을 요청하고, 앞으로의 수사는 종교재판관 베르나르도 기 수사에게 맡길 것이라고 말한다.
윌리엄은 수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장서관으로 연결되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그는 아드조와 함께 장서관에 침입한다. 그 사이 종교재판관 베르나르도 기가 수도원에 도착한다. 그는 마구간에서 악마를 부르는 제의를 벌인 곱추 살바토레를 목격하고 현장에서 증거물들을 확보해 수도원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바로 이 제의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튿날 밤, 베르나르도 기의 주재 하에 이단 심판이 집행된다. 심판의 대상은 살바토레와 그와 같은 이단 돌치노 파 소속인 식료품 창고지기 레미지오 수사, 그리고 마녀로 지목된 여인 이었다. 혼란한 틈을 타 윌리엄과 아드조는 장서관으로 향한다. 그들은 마침내 서적이 있는 방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장님 호르헤 수사였다. 윌리엄은 호르헤에게 모든 사건의 근원인 금지된 장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곡 편을 보여 달라고 한다. 호르헤는 “이 책이 세상을 혼돈에 빠지게 하지 못하게 자신이 그 책을 봉인하는 무덤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책을 찢어 먹으며 장서관에 불을 지른다.
수도원 바깥에서는 이단 판결을 받은 세 사람이 화형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그 때 수도원 꼭대기에 불길이 치솟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소녀가 마녀로 몰린 것에 분개하며 베르나르도 기와 기사들에게 대항해 소녀를 구한다. 기는 급하게 도망치던 중 마차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된다. 결국 수사들이 수 백 년 동안 감추어 전해온 모든 서적들이 불타게 되고, 윌리엄은 몇 가지 서적들만을 구해냈다.
윌리엄과 아드조는 다시 길을 떠난다. 아드조는 도중에 여인을 만나 사랑과 신념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지만, 결국 그의 스승을 따른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 1986)의 한 장면. ⓒ스틸컷 |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중세는 하나의 영토 아래 하나의 신앙을 지닌 기독교 국가를 추구하는 가운데 오히려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 위에 서게 되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회의 시대’였다. 실제로 호르헤로 대표되는 교회 권력은 완고한 교리주의와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의 기반에 터 잡아 모든 것 위에 군림한다. 이들에게 희극적인 것, 이성적인 사유, 지식의 추구, 여성 등은 모두 ‘비정상적인 것들’로 세 수사들처럼 죽어 마땅한 사유들이며, 종교재판의 대상, 화형의 대상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회는 세속화된 모습의 진수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우린 완고하게 교리를 강조하면서도 면죄부를 팔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1966)에서 ‘담론(discourse)’을 정의한다. 담론은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에 있는 미묘한 것들로, 특정한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켜 현실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을 뜻한다. 담론은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담론은 일방향적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는 점에 있다. 실제로 ‘식민지인들은 열등하다,’ ‘서양 사람들은 동양, 제3세계 사람들보다 뛰어나다’와 같은 언술들은 19세기 서구의 식민지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 여러 지식의 체계들, 남성, 서양인 등과 같이 정상에 속해있는 존재들은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어냄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으로 이 타자들을 열등한 존재들로 기술해왔고,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가하는 폭력일 따름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단과 종교재판, 교회의 지식에 대한 억압과 통제 등은 교회권력이 담론들을 통해 타자를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구분 지으면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호르헤는 독실한 신앙과 엄숙한 교리를 하나의 담론으로 만들어내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면죄부’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담론을 통해 교회의 재정과 종교적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에코는 그의 책 서문에서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을 인용한다. 구절처럼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것은 거울 속에 있는 희미한 것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한 분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내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교파들이 서로 갈등하고 있다. 물론 교리적 다양성으로 인한 갈등은 자신이 본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점, 하나님의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건강한 갈등이다. 하지만 오늘날 교파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의 교리가 마치 절대적 진리인 양 다른 집단을 이단으로 규정해 배척해버린다는 것에 있다.
과연 자신들의 교리적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타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사사로운 ‘담론’으로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교계는 성찰이 필요하다.
글/ 최웅재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
글/ 최웅재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