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가 연일 화제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는 11월15일(토) 현재 누적 관객수 4,151,762명으로 1위를 질주하고 있다. 2위인 <나를 찾아줘>가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1,655,547명을 기록한 데 비추어 볼 때 실로 압도적인 흥행성적이다.
이 영화의 강점은 IMAX 카메라로 구현한 우주공간과 웜홀 등 천체물리학, 그리고 놀란 감독 특유의 인문학적 감수성 등이다.
사실 놀란 감독의 문학적 감수성은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배트맨 리부트> 3부작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배트맨 리부트> 3부작은 우선 뛰어난 법철학 텍스트로 해독이 가능하다. 특히 무정부주의를 신봉하는 악당 조커가 법질서의 화신인 하비 덴트를 타락시키는 대목은 법철학의 사유를 풍부하게 해준다. 문학적인 면에서 <배트맨 리부트> 3부작은 영웅설화의 모티브를 ‘배트맨’이라는 만화 캐릭터에 이식시킨 작품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스틸컷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설화의 주된 모티브는 통과의례다. 어느 특정 부족이나 종족의 미래를 짊어질 영웅은 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통과제의 모티브를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의 타이틀 롤 브루스 웨인 / 배트맨 캐릭터에 접목시킨다.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 1편 <배트맨 비긴즈>에서 유년의 브루스 웨인은 연인 레이첼과 숨바꼭질 놀이(Finder, Keeper)를 하다 우물에 추락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는 그곳에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그는 성인이 되자 ‘어둠의 사도들’(The League of Shadows)이란 비밀 그룹에 입교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그를 훈련시키던 교관 듀커드는 끊임없이 어린 시절 느꼈던 공포감을 넘어 아예 공포 그 자체가 되라고 주문한다. 결국 어린 시절의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그를 배트맨으로 거듭나게 한 동기로 작용한 셈이다.
서양에서 숫자 ‘3’은 완전수다. 놀란 감독은 이를 의식한 듯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주인공 브루스 웨인을 다시 한 번 우물 밑으로 밀어 넣는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영웅설화의 완성
리부트 시리즈 3편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브루스는 은둔하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악당 베인이 고담시에 마수를 뻗쳐 오자 하는 수 없이 배트맨 가면을 쓰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야 만다.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도 없이 곧장 격투를 벌인다. 결과는 배트맨 완패였다. 배트맨은 베인에게 허리가 꺾이는 수모를 당하고 지하 감옥에 갇힌다. 초라한 패배자가 된 배트맨은 지하 감옥에서 고담시가 파멸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할 운명에 처한다. 브루스는 수차례 탈옥을 시도한다. 그러나 매번 실패하고 급기야 서럽게 울부짖는다.
재밌는 점은 브루스 웨인이 갇힌 지하 감옥이 어린 시절 추락 사고를 당한 우물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루스 웨인의 탈출 시도는 그래서 더욱 영웅설화의 통과제의와 판박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마침표를 찍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한 장면. ⓒ스틸컷 |
베인은 고담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를 물리치지 않으면 고담시는 아예 사라질 운명이다. 그래서 브루스는 마음을 다잡고 탈옥을 시도한다. 그는 이때 아무런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않는다. 실패하면 곧장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 그러나 그는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탈옥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이는 아버지였다. 그리고 고담시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브루스는 스스로를 구원해야 고담시를 베인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결국 그의 목숨을 건 도박은 성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배트맨이 되어 베인을 무찌르고 고담시의 진정한 영웅으로 등극한다. 또한 그의 지하 감옥 탈출은 그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화제작 <인터스텔라>에서도 인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 특히 나자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인 브랜드 박사가 기약 없는 성간여행(인터스텔라)을 떠나는 쿠퍼에게 웨일스 출신의 시인인 딜런 토마스의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라>(원제 :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를 낭송해주는 대목은 문학적 감수성이 잘 드러난 대목이었다. 이 시는 시인이 아버지의 임종에 부쳐 지은 시라고 한다. 시의 분위기와 절절한 가락은 <인터스텔라>의 주제의식, 즉 생존 위기에 맞서 우주를 개척해 인류의 씨를 지키려 하는 인간존재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한 마디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상의 문학가다. 그가 만약 영화매체가 없던 19세기에 태어나 활약했다면, 필경 카프카가 조지 오웰에 버금가는 역작을 다수 써냈으리라고 본다. 사실 그의 작품엔 얼핏 몽환적이면서도 놀랄 만치 현실의 부조리를 갈파했던 카프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 2편 <다크나이트>에서 가상 캐릭터인 조커를 고담시라는 현실로 끌어 들이는 오프닝은 특히 그렇다.
그의 활약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인문학적 감수성은 곧 ‘수익’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