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정치 혁명가?
III. 아슬란은 역사적 예수를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한다
머리말
▲복음주의 신학자 김영한 박사 ⓒ베리타스 DB |
아슬란은 역사적 예수를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정치혁명가적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예수에 투영시켜 구원과 평화의 왕이요 고난의 종인 예수를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여 “정치 혁명가”로 왜곡시키고 있다.
1. 아슬란의 왜곡: “네 복음서는 로마의 지적 엘리트층을 위하여 예수의 혁명가적 흔적을 제거”
아슬란에 의하면 A.D.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추종하던 유대인들이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교가 추방되었을 때 “혁명주의적 메시아상을 유지하든지 아니면 평화주의 메시아상을 추구하든지 두 가지 선택의 길에 섰다”고 본다. A.D. 70년 이후 기독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와 로마로 옮겨가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의 지성적 엘리트층을 기독교 선교의 핵심표적으로 삼았다. 이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예수의 메시아상에서 본래의 혁명적 흔적을 제거해야 했다는 것이다.
“주요한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특별히 로마에 사는 지적 엘리트층)가 기독교 선교의 핵심표적이 되었다. 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 정도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젤롯』, 225)
아슬란은 마태, 누가, 요한의 복음이 증언하는바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에 깊이 관여하고 예수를 처형한 사실을 이들 기자들이 혁명가적 예수상을 제거하는 가운데서 조작된 것으로 본다. 아슬란은 이들 복음서 기자들의 기사(記事)가 본래의 정치혁명가적 예수상과는 상관없는 후대에 생겨서 로마의 책임을 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사상에 입각한 치장에 불과하다고 본다.
“원래 마가의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의 책임을 벗겨주려는 순전히 선교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에 불합리한 왜곡이 덧붙였다. 이 이야기가 2천년에 걸친 반유대주의의 토대가 된 것이다.” (『젤롯』, 227)
이러한 아슬란의 해석은 그 자신이 세운 “정치 혁명가” 가설(假說)에 입각하여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을 왜곡한 것으로서 4복음서 내용과 상반되고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분명히 그의 복음서에서 그의 기록이 예루살렘 함락(A.D. 70년) 이전인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막 13:1-2)
이 구절은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으로서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하여 함락되기 이전에 한 말씀인 것을 명료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어서 마가는 다가올 이방군대(로마 군대)에 의한 도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막 13:14-20, 마가복음 13장 1-2절, 14-20절에 대한 독일성서공회판 해석관주 [Deutsche Bibelgesellschaft, Stuttgart, 1992] 110, 111)
마태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2)
이 구절에서 예수는 성전 건물의 화려함 따위에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으시며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을 예언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는 다가올 이방군대(로마 군대)에 의한 도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15-22)
여기서 마태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 예루살렘에 다가올 환난과 파멸에 관하여 언급했던 역사적 예수의 예언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기록에서 마태복음 역시 주후 70년 이전에 씌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마태복음 24장 1-2절, 15-22절에 대한 독일성서공회판 해석관주, 58).
누가의 증언도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려지리라”(눅 21:5-6). 이 기록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예술적 가치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시며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하신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 21:20-24)
이 구절은 이미 일어난 예루살렘의 파괴가 아니라 장차 일어날 파괴에 대한 예언이다. 앞으로(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그해 여름에 예루살렘과 성전이 점령되고 파괴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누가복음 21장 5-6절, 20-24절에 대한 독일성서공회판 해석관주, 193).
그러므로 주후 70년 이후에 마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가 로마인들의 책임을 면제시키기 위하여 씌어졌다는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신빙성 없는 조작이요 허구인 것이다. 영국의 신약학자 브루스가 언급한바 같이 누가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주후 60년경에 저술하여 바울의 친구요 동역자이자 유일한 이방인 의사로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후 일어난 30년간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F. F. Bruce, The New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생명의말씀사 역, 『신약성경문헌』 [1977], 82, 95.). 마가복음은 누가복음보다 더 전에 씌어졌기 때문에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마가, 누가, 마태의 복음서가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한 내용으로 보아 이 세 복음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씌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세 복음서는 후대 교회의 조작이 아닌 역사적 예수께서 앞으로 다가올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신 신빙성 있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2. 정치 혁명가 가설을 복음서 해석에 투명, 날조
아슬란의 접근방식은 역사적 예수를 철저하게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왜곡했다고 보고 이를 제거하고 혁명적인 투사에 적합한 자료들을 조합하여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
아슬란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숱한 침략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과거의 예언을 실행하기 위해 메시아를 자처하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봉기했다. 예수는 그들 메시아적 지도자 중에서도 단연 카리스마가 넘치고 정치 혁명적인 지도자였다고 본다. 예수는 로마 권력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의 메시지는 종교가 되어 로마 권력을 삼켰다고 본다. 절대로 굴복을 모르는 의지, 하나님의 나라가 기어코 오리라는 열정적인 신념, 이것이 젤롯(zealot)이라는 것이다. 아슬란은 젤롯이 열심당(The Zealot Party)과는 다르다고 한다. 열심당은 예수가 죽고 난 후 기원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본다.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열심’이라는 말은 특정 분파나 정치적 당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고, 이때만 해도 ‘열심’은 사상이나 포부 또는 종교적 경건의 모범이었다고 본다. 아슬란은 예수가 그 당시 사회에 널리 퍼졌던 ‘젤롯’의 신념을 간직한 정치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3. 두 가지 반론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는 결단코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나 정치 혁명가로 이해하지 아니했다. 필자는 예수가 ‘젤롯’ 신념을 가진 혁명가였다는 아슬란의 해석에 대하여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1) 아슬란이 말하는 젤롯당의 연대(年代)는 일반신약학자들의 연대와 빗나감
첫째, 개인 신념인 젤롯과 정치적 당파인 젤롯당(Zealots)을 구별하고 젤롯당은 예수 사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보는 아슬란의 견해는 일반 신약학자들의 견해와 빗나가는 주장이다. 스위스의 신약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등을 비롯한 복음주의적 신약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열심당(젤롯당)은 유대 백성의 법률과 그들 고유의 생활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들로서 헤롯시대부터 예루살렘과 마사다 요새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활약한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전투당이었다. 열심당이라는 이름은 원래 종교적 광신주의(religious fanaticism)를 의미하였고, 주전 2세기 마카비 반란 시대에는 우상숭배자와 우상에 대한 유대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유대 율법학자 랍비의 율법을 엄격히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헤롯(Herot the Great, BC 37- BC 4)의 통치가 로마 권력에 동조한 반민족적 행위라고 규정하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열심당의 결성을 촉진시켰다. 헤롯을 왕으로 부르도록 강요하는 어떠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에 반대했던 자들, 히스기야(Hezekiah)와 소위 강도의 무리들(robbers)이라고 불리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사실상 열심당이었다(Oscar Cullmann, Jesus and The Revolutionaries [Gareth Putnam, 1970]; 고범서 역, 『예수와 혁명가들』 [범화사, 1984], 부록: “열심당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76-78).
열심당은 당시 유대의 지배자였던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항거하고 로마로부터 유대를 해방하고자 전쟁을 준비했다. 열심당은 로마 군병들만이 아니라 “이들에게 동조 혐의가 있는 동족에게도 비수를 휘둘렸다. 로마에 협조한 사람들을 하나씩 암살한 후에 그들은 전 백성을 66년의 대전쟁으로 몰아넣었다”(André Trocmé, Jesus et la Revolution non Violente; [English edition] Jesus and the Nonviolent Revolution [Wipf & Stock Publishers, 1998]; 박혜련, 양명수 공역, 『예수와 비폭력 혁명』 [한국신학연구소, 1986], 207).
2)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 주장은 이미 1960년대 제기되었다가 폐기된 해방신학자의 견해
둘째, 역사적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 영적인 혁명가요, 종말론적 선포의 메시아였다.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였다는 아슬란의 주장은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서구에서 이미 18세기에 라이마루스(H. S. Reimarus)(H. S. Reimarus, Von dem Zwecke Jesu und seiner Jünger, Fragmente eines Ungenanten, vol 7, 1778. 이 저서는 너무나 급진적인 내용이어서 라이마루스는 박해가 두려워 생전에 출판을 못했다. 그의 사후에 그의 딸이 부친의 원고를 레싱(Lessing)에게 주어 익명으로 출판하게 하였다)에 의하여 주장되었고, 그 후에는 카우츠키(K. Kautsky)와 아이슬러(R. Eisler) 그리고 1960년대 영국의 신약학자 브랜던(S. G. F. Branden) 등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에 심취한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한국에서는 1970년대 안병무와 서남동 등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이론이다.
스위스 복음주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라거나 또한 열심당의 동조자라는 주장이 “예수의 종말론적 선포의 테두리 안에서는 도출될 수 없다”(『예수와 혁명가들』, 13)고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미국의 신약학자 존 라빈슨(John A. T. Robinson)도 쿨만의 소책자 『예수와 혁명가들』 추천사에서 쿨만의 입장에 동의한다.
“나는 권위 있는 신약학자로부터 제기되는 이 입장은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최근의 무모한 시도에 반대하여 제기된 균형 잡힌 평가라고 인정한다. 예수는 참으로 혁명가였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가는 아니었다.”
같은 신약학자 쉰(Fulton I. Sheen)도 다음 같이 쿨만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나는 혁명가다 그러므로 예수도 혁명가’라는 주장에서 출발하는 자들은 쿨만에게서 칼(swords)이 이웃보다는 자신을 가리키는 극단주의(radicalism)를 발견할 것이다.”
독일 튀빙겐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도 그의 논쟁적 저서 『예수는 혁명가였는가?』(War Jesus Revolutionär?)에서 예수를 열심당 운동과 관련시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예수는 평화와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아가페(Agape)를 가지고 아주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그것은 바로 비폭력적인 항거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방법, 곧 낡은 야만적인 폭력적인 방법보다 휠씬 더 ‘혁명적인’ 명칭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방법이다.” (Martin Hengel, Was Jesus a Revolutionist?, 고범서 역,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범화사, 1983], 60)
헹엘은 누가복음 6장 27절-37절과 마태복음 5장 38절-48절에 나타는 예수의 선포에서 “예수의 방법은 개인의 양심에 주로 초점을 맞춰 개별적으로 호소하는 비폭력(Gewaltlosigkeit)의 방법이요, 끈질긴 설득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이다.”(Martin Hengel, 『예수는 혁명가였는가?』, 56.)고 말한다.
미국의 진보신약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는 그의 저서 『예수와 비폭력 저항: 제3의 길』(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에서 예수는 “악에 대한 대응방법으로 수동적인 태도와 폭력 모두를 몹시 싫어하셨다”고 지적한다(Walter Wink, 김준우 역, 『예수와 비폭력 저항: 제3의 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3], 31). 예수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태도로, 즉 수동적인 위치에서 운명적인 굴레에 얽매여 사는 삶이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억압에 대하여 투쟁하면서 그 폭력에 대항하는 혁명가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는 폭력에 대하여 적의로 공격하지 않으시고 제3의 길, 평화의 길을 제시하셨다. 마태복음 18장 22절에서 예수는 잘못을 범한 형제에 대하여 용서하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지 않은가?
맺음말
아슬란이 말하는 젤롯당의 연대(年代)는 일반신약학자들의 연대와 빗나간다. 아슬란이 개인 신념인 젤롯과 정치적 당파인 젤롯당을 구별하고 젤롯당은 예수 사후 66년에 생겨난 당파라고 보는 견해는 일반 신약학자들의 견해에 빗나가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신약학자들은 열심당원이 유대 백성의 법률과 그들 고유의 생활에 대한 열렬한 수호자들로서 헤롯시대부터 예루살렘과 마사다 요새 반란까지 활동한 호전적이고 광신적인 전투당이었다.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 주장은 이미 1960년대 제기되었다가 폐기된 해방신학자의 견해다. 역사적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 영적인 혁명가요, 종말론적 선포의 메시아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