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정치 혁명가?
IV. 정치 혁명가 예수는 복음서 예수상과 전혀 다른, 낯선, 날조(捏造)된 인물
머리말
▲복음주의 신학자 김영한 박사 ⓒ베리타스 DB |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지구촌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대림절(待臨節, adventus, Advent)이란 성탄절에 오신 역사적 예수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성탄절 앞의 4 주간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인류의 대속주이시기 때문에 온 지구촌 교회가 그분을 대망하는 것이다.
아슬란은 그의 예수 전기에서 그 자신이 설정한 “갈릴리를 배회하던 젤롯(열망)을 가진 민중 혁명가의 이데올로기”를 투영하여 복음서에 증언된 고난의 종, 세상의 구주 예수를 전통교회가 신앙고백한 역사적 예수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서와 전통교회가 신앙고백한 역사적 예수, 고난의 종이요 세상의 구주인 예수는 초대교회가 날조한 인물이며,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정치 혁명가 예수가 역사적 예수의 본래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 복음서 예수상과 전혀 다른 인물: 정치적 혁명가 날조
아슬란의 예수상은 복음서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역사적 예수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하기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논픽션을 창작하듯이 나사렛 예수를 복음서들과는 전혀 다르고 낯선 인물인 정치적 혁명가로서 날조(捏造, fabricating)하고 있다. 아슬란은 머리글에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이 책은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가, 즉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예수의 모습을 되도록 많이 찾아내기 위해 기획되었다. 바로 정치의식이 투철한 유대혁명가로서의 예수다. 그는 2천 년 전 갈릴리 시골 지역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아다닌 인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추종자들을 끌어 모아 메시아 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도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배짱 있게 성전을 공격했으나 선동죄로 로마에 체포당하고 처형당했으니, 결국 그의 활동은 실패로 끝난 셈이다.” (『젤롯』, 29-30)
이에 반해서 복음주의 신약성서학자 에반스는 그의 저서에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상이 진정한 실재의 참 예수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해낸 상을 그의 연구에 투영시킨 “만들어진 예수”라고 지적하고 있다 (Craig Evans, 성기문 역, 『만들어진 예수: 누가 예수를 왜곡하는가』 [새물결플러스, 2011], 275-98).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의 사실과 진실과는 전혀 다른 혁명가 예수를 날조하여 내놓고 있다.
아슬란은 네 복음서(마가, 누가, 마태, 요한복음)가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앙의 그리스도를 제거하고 단지 하나의 혁명적인 열정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골인 갈릴리에서도 더욱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죽음에서 살린 그리스도가 아니라 젤롯, 즉 열망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려고 하는 그 젤롯...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본래 유대인 혁명가로서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를 배회하던 젤롯(열망)을 가진 인물,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의 권위에 반발한 매혹적인 설교자였으며,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예수였는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복음서 필자들에 의해 날조되었다는 것이다. 아슬란은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서가 여러 사람에 의해 각색(脚色)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역사적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실재는 인정하지만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희생과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란 더 이상 순교와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인 사형틀에 불과하며, 예수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열심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슬란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목숨을 보전한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로마에 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선교하기 위해 복음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복음서 집필을 위해서는 유대 민족주의, 혁명주의 색채를 지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예수의 원래의 모습, 정치적 혁명가상도 점차 희석되어 갔다고 본다. 그는 누가복음 24장 44-48절에서 부활한 예수가 말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나 시편에 예수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2. 아슬란의 은폐한 욕망이 그의 예수상에 투영
아슬란이 제시한 혁명적 예수상에는 그의 은폐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아슬란은 젊은 시절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 성경 무오설과 축자성경설을 맹목적으로 믿었으나 그것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성벽 앞에서 좌절을 맛보고 다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좌절은 이제 혁명가 예수의 정치실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문학 교수 출신 목회자 이인기는 『젤롯』 서평에서 아슬란의 예수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은폐된 욕망”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은폐된 욕망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1960년대 해방신학자와 혁명신학자들을 통하여 “이미 알려진 정보를 새로운 언어로 포장하려고 한 시도는 20여 년간 예수를 연구한 진지한 학자에게서 예상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는 그가 자신의 집필의도를 자신의 저서 속에 심어 놓았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이인기, “레자 아슬란의 『젤롯』: 은폐된 욕망 읽기,” 『신학과 교회』 창간호 [2014 여름], 308).
이러한 은폐된 욕망을 지적하는 이인기의 통찰은 주목할 만하다. 아슬란은 “『젤롯』을 통해 정치혁명가적 예수를 재구성한 의도가 이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혁명적 욕구와 그것의 좌절을 형상화하려는 것”이다. 아슬란이 “자신의 저술 곳곳에서 부각시킨 난공불락의 공고한 로마제국과 지배세력에 항변한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이슬람으로부터의 개종자가 느끼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의한 좌절과 혁명적 욕구를 투영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이인기, 309) 것이다.
3.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구약이 예언한 사건
아슬란의 혁명가 예수상은 복음서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와는 전혀 다르다. 아슬란이 인용하는 마태복음 10장 34절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기존 체제의 전복을 말하는 혁명가로서의 예수의 말씀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복음의 전파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영적 갈등과 가족의 갈등을 수용내지 감수해야 하는 복음 극단주의(Gospel radicalism)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당시 로마시대에서 이미 세상의 평화가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고 세상의 이치와는 다르게 이루어짐을 지적한 것이다.
아슬란의 이러한 신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오해는 그가 지식적으로는 신약학자라고는 하나 신구약의 구속사적 체계의 연관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오순절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예언하는 시편을 인용하였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편8-11절).
그리고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편 1절)를 인용하면서 다윗이 예수의 높이 올리우심과 승천을 예언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다”(행 2장36절b)고 시편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 관하여 누가는 사도행전(행 2장 25-28절; 행 2장 34-35절)에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기록하면서 구약의 예언과 신약의 성취를 해석학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언약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그 예들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장 15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출 18장 18절);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시 110편 4-5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편 7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장 14절).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이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성취되었음을 복음서 필자들과 사도들은 그들의 서신에서 증언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메시아 예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증언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장 1-3절)
총결론
초대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자들의 예수상이 사도적 교회에 도전했으나 사라졌고, 19세기에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예수상이 나타났으나 오늘날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20세기 말 이래는 영지주의 예수상이 현대의 역사비판학의 방법과 결합하여 다시 나타나고 있다. 해방신학의 혁명가적 예수상은 1960년대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2010년대 오늘날 아슬란의 저서 『젤롯』을 통하여 다시 잠깐 주목을 받고 있다. 혁명가적 예수상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일어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 알카에다의 테러가 오늘날 미국인과 유럽인들의 위협이 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안티기독교적 공격에 민감한 사람들에게 종교적 관심을 끌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상은 이미 1960년대 풍미한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의 예수상처럼 오늘날 9.11 테러 이후 시대에 관심을 끌고 있으나 시대적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 같이 아슬란의 예수상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지난 것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적 유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충실히 머무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1세기에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영감적 통찰을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히 5장 10절), “하나님의 아들”(히 5장 5절)이요, “영원한 구원[자]”(히 5장 9절)이시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그것은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서구와 북미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사실이나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주의 기독교는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이후 시대가 도래하자 기독교의 축이 북구 및 북미와 북반구에서 아시아와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기독교에서 역사적 예수는 바로 신앙의 그리스도로서 신자들을 통하여 경배되고 선포되고 있다. 지금 12월 세계적으로 온 기독교가 대림절을 지키고 있다. 세계교회는 단지 지나간 기록상의 예수만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대림절과 성탄절에서 현재적으로 오시는 구세주로서 교회의 신앙과 신자들의 인격적 체험 속에서 오늘도 살아계시는 구주(Kyrios)로서 증시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