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교수 ⓒ베리타스 DB |
상대방을 "부른다"는 행위는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조우방식이다.
이 "부름" 앞에서 인간은 그리고 사물은 비로소 "나"의 세계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시 "꽂"은, 이 "부름"의 행위가 지닌 존재론적 의미를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부활한 예수를 "정원사"로 생각했던 마리아가 비로소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예수가 "마리아"라고 부르는 행위를 한 지점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언제나 가능한 것이지만, 나는 이 "부름"의 행위가 지닌 상징적/존재론적 의미를 이 장면은 참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 올 때 마다 느끼곤 하는 "벽"은 호칭방식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 한국문화의 소통방식이다. 이 "한국적" 소통방식은 지리적 장소가 미국이든 유럽이든 어디이든 상관없이 함국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예외없이 작동된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아니니, 언제나 상대방을 부르는 것은 2인칭이 아닌 3인칭처럼 늘 느껴진다. 마치 두꺼운 장갑을 끼고서 손을 잡는 느낌처럼, 손을 잡기는 잡는데 정작 잡는 것은 아닌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끼곤 한다. OOO 교수님, 박사님, 목사님, 신부님, 선생님...이러한 3인칭적 "부름"은 이미 그 "사회적 표지(social marker)" 안에서 규정되는 경계안에서 그 관계의 성격이 규정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표지"가 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의 존재는 어떻게 "불러내야" 하는가. 그들은 이러한 소통방식에서는 별안간 "비존재" 또는 "하위존재"가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호칭방식은 사회적 표지가 "없는 이들"과 "있는 이들"사이의 사회적/권력적 위계를 보이지 않게 형성하고 이미 주어진 것 같이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개인들의 의도성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호칭방식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부름"의 행위는 이미 "정치적"이다: 부름의 정치학.
"너," "당신," "그대" 등등 "You"라는 2인칭적으로 타자를 "불러내는" 용어도 이렇게 많지만, 정작 "사회적 표지"로부터 규정되는 소통방식은 이러한 2인칭을 언제나 3인칭으로 전이시키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2인칭이 부재한 호칭방식과 소통방식에 늘 심각한 문제성/한계성을 경험하곤 한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서 만나고 싶은 타자의 손을 잡는 방식-- 그래서 만나기는 하는데 정작 만나지는 못하는 이 "만남의 아이러니" 속에 놓여지는 것이다.
한 존재가 지닌 무수한 층들을 오직 "사회적 표지"로 경계지워진 벽안으로 단일화하고 규정화하는 소통방식을, 어떻게 조금씩이라도 변화시키고 넘어서는가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의 내면속에서 느끼는 절실한 과제가 되곤 한다. 나 혼자만의 이러한 내면적 씨름은 사실상 내가 만나는 이들에 대한 나의 진지한 조우 방식이기도 하다는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한국의 소통문화를 근원적으로 변혁시킬 수 없지만 나 만의 방식으로 그 경계의 벽을 한 귀퉁이에서라도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사회적 표지"를 훌쩍 뛰어넘는 유일한 개별인들, 유일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꽃"들로 나에게 다가오기를,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1월 6일(화)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1월 6일(화)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