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스틸컷 |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용서’의 참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텍스트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어느 날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고 괴로움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차 우연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그는 신앙생활을 통해 아픔을 치유해 나간다. 이어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뜻밖의 상황과 맞닥뜨린다.
유괴범 박도섭(조영진 분)은 너무나 당당하다. 뉘우치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이 유괴해 살해한 아이의 엄마 앞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런 도섭의 모습을 본 신애는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원래 이 영화는 소설가 故 이청준(1939~2008)의 원작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 신애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종교적 갈등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이에 비해 원작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파고들어 간다. 무엇보다 원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의 아픈 기억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난 1980년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권력을 집어 삼켰다. 이들은 이어 민주화를 외치며 신군부의 폭거에 항거한 이 나라 민중들의 열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결과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이었다.
이때 한국 교회는 놀라운 일을 저질렀다. 광주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8월 한경직, 정진경 목사 등이 서울 시내 유명호텔에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불러다 놓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를 연 것이다. 이들의 기도회는 사실상 손에 피를 묻히고 권력을 움켜 쥔 권력자와 손을 잡았음을 의미했다. 이 권력자의 손에 친구를, 형제를, 그리고 가장을 잃었던 이들의 아픔은 외면한 채 말이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는 바로 이런 어두운 역사를 자양분으로 잉태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부도덕한 권력과 손잡은 교회의 행태가 ‘용서’의 정신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꼬집는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산학원 원장 김도섭은 원생이던 알암이를 살해해 암매장한다. 알암이를 잃은 엄마는 타오르는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웃인 김 집사는 이런 엄마를 집요하게 설득해 신앙생활로 이끈다. 엄마는 기독교 신앙을 통해 치유의 은사를 경험한다. 그리곤 용기를 내어 교도소를 찾아 살인자를 용서하려 한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나도 뜻밖의 상황과 마주치고 만다.
80년 광주, 그리고 용서
『벌레이야기』 겉 표지. |
작가가 묘사하는 김도섭은 성인에 가깝다. 그는 엄마의 면전에다 대고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했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마음의 위로가 될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지른 죄과에 대해 어떤 책벌도 기꺼이 감수하겠노라”고까지 고백한다.
엄마는 교도소 면회 이후 절망의 나락에 빠져 해어 나오지 못한다. 그를 신앙으로 인도했던 김 집사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 못한다. 이러자 엄마는 김 집사에게 외친다.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 교도소까지 그를 찾아갔구요.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 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믿음이 약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거에요.”
엄마의 외침은 절규에 가깝다. 그러나 김 집사는 오히려 엄마를 책망한다. 이때 김 집사는 엄마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가해자 편을 든다.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것으로 주님의 사람을 얻고 있었던 거에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에요.”
엄마는 김 집사의 책망에 거세게 반발한다. 엄마의 항변에서 ‘용서’의 참 의미가 진면모를 드러낸다.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1980년 조찬기도회 이후 기독교계는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교세를 불려 나갔다.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급속하게 팽창했던 시기가 1980년대였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작품 『벌레이야기』는 교회가 부도덕한 권력과 결탁해 세 확장에 나선 것이 결국 부도덕한 권력으로 상처 입은 선량한 국민들을 욕보이는 행위였음을 비유적으로 갈파한다. 특히 이 작품은 ‘용서’의 교의가 잘못 설파됐을 때, 인간의 존엄을 짓밟을 흉기가 될 수도 있음을 생생히 드러낸다.
죄의 드러남 없는 용서는 신성 모독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합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고 가르쳤다. 한국 교회는 그 가르침에 따라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감싸줄 것을 권면한다. 죄를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한계로 인해 부족하기 그지없는 인간 존재가 서로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용서에 앞서 반드시 이뤄져야 할 절차가 하나 있다. 바로 죄의 드러남이다.
죄의 드러남 없는 용서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범죄행각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엄마가 찾아 왔는데, 그 앞에서 아무런 참회 고백 없이 용서 운운하는 김도섭의 당당함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이다. 한편 절망감에서 해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가 믿음 없다고 책망하는 김 집자 역시 신성모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의 섭리가 쉽게 납득되고 표현될 수 있는 따위라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귀한 선물이다. 사람들은 평소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 귀한 선물을 건네받으면 애지중지 여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선물을 인간에게 주었다면, 그 선물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용서를 무가치하게 남발해 왔다. 한경직, 정진경의 조찬기도회가 상징적인 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부도덕과 몰상식을 가리고, 심지어 이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한다.
창세기 기자는 “창조주께서 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숨결을 불어 넣었다”는 묘사를 통해 인간 존재에 신성이 깃들어 있음을 일깨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존엄성은 그것이 제대로 지켜질 때에만 유효하다. 존재의 존엄성이 종교적 교의의 이름으로 훼손될 때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하고야 만다. 바로 이 점이 작가 이청준이 『벌레이야기』를 통해 전한 교훈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저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