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복음의 시작"
성경본문
(출 1:15-21, 갈 1:1-10, 막 7:24-30)
창조절 열셋째주일
[방문객들과 향린 순례길]
11월 3일 제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후에 많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일(월) 우리 교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성목사 안수통과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박상규 총회장님과 총회 임원들이 오셔서 교회를 둘러보셨고, 13일 수요일에는 오키나와 교구의 목사님들과 교인들 열네 분이 오셨습니다. 또 멀리 지방에서 방문한 후배 목사,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석박사 동료들, 다른 교단 목사님들과 루터교회 목사님, 성공회 신부님도 우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손님들이 교회에 오시면 시간이 되는대로 제가 향린 순례길을 따라 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교회 역사가 70년을 넘었고, 일반교회와는 다른 점들이 제법 많기에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1층에서 옥상정원까지 올라가는데 30분이 훌쩍 넘습니다. 창립정신으로부터 사회선교, 통일 선교, 우리가락 예배, 향린 민주주의와 분가 선교,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과 생태적 전환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가 사실 모두 치열한 신앙의 고민과 묵직한 책임감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2003년 향린 50주년을 축하하며 향린희년신앙고백으로 만들어 예배 시간마다 부르는 국악찬송 217장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인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며, 주님의 나라가 우리 삶 속에서 이뤄짐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의 몸과 맘이고, 이 땅의 향기로운 이웃이며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생명의 숨결로 성문 밖으로 낮은 자리로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앙 고백에는 "평신도 교회"라는 창립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습니다.
[평신도 교회의 이상과 당면 과제]
'향린희년신앙고백'의 토대가 된 1993년의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의 교회 항목을 보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또한 예수의 복음에 의해 해방된 사람들의 해방공동체이고, 공동체 내의 모든 구성원이 자유하고 평등한 삶을 누리는 민주 공동체요, 정의로운 평화 공동체이다. 부활한 예수의 몸인 교회 안에는 몸이 활동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지체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지체들의 직무와 기능은 각기 다르지만, 각 지체들 간의 관계는 그 지위에 있어 우열이 있지도 않고, 어느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또한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구성원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등하고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며,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위하고 봉사하며,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참 교회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이 선언은 향린의 창립부터 지금까지 이루어가고 있는 현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직(聖職)"이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자신의 생활 터전인 직장이나 가정, 교회와 사회에서 예수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전부 교회 직분에 관계 없이 성직자일 것입니다. 또한 부활한 예수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다양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면, 목회자 또한 신학 쪽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평신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평신도 교회"라는 창립정신은 40주년을 맞으며 발표한 교회 갱신 선언의 두 번째 목표 "2. 교회는 민주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한다"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와 장로 임기제를 두어 권력의 집중을 막고, 목회운영위원회 구조를 만들어 신도들의 의견을 골고루 청취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예배 위원으로 다수 참여하고, 평신도 설교를 도입하고, 공동 축도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자기 십자가를 달고, 교인이 주체적으로 각 부서와 위원회, 각종 소모임들을 만들어 이끌어가는 것이 우리 교회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평신도가 주체가 되어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정의 평화를 위한 평신도 기독인 연대의 탄생에도 우리는 꽤 큰 기여를 했고, 사회적 협동조합 길목의 활동이나, 지금 안병무 도서관 운영 등에 있어서도 평신도 교회의 진면목은 어김없이 드러납니다.
이런 모습이 목회자와 당회원 소수가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한국교회에 경종을 울렸고, 지금은 여러 교회가 목사/장로임기제를 비롯하여 교회운영위원회 등을 구성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교회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도 있습니다. 향린 70주년을 맞이하면서 했던 설문조사 결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향린교회가 해결해야 할 교회 내부의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많은 응답은 '교회 내의 갈등'으로 35%나 차지했다. 다음은 '청년 활동 위축'이 19%, '방만한 조직(신도회, 부서 등) 운영'이 10%였다. 당면 과제에 대한 해결 방안들 중 가장 많은 교우가 지지한 것은 '서로 배려하고 친교하는 문화 형성'으로 68%가 지지했다. 다음은 '교회 내 갈등 예방, 갈등 발생 시 신속한 해결'과 '청년 활동 지원'이 함께 64%의 지지를 받았다. 이 외에 자유롭게 기술한 내용으로는 소통과 화합, 새 교우와 도움이 필요한 교우 지원, 교회 조직 혁신, 청년 참여 지원, 평신도 교회 지향, 목회자 문제 해결 등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과제들을 보면 '평신도 교회'의 이념과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의 '민주적 공동체로의 갱신'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듯이, 평신도 주체성의 고양은 때로 원치 않는 갈등과 분열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 개신교를 비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신교는 교황제도를 비판하더니, 교황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았다." 가톨릭의 개신교 비판이 평신도 목회를 지향하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한다면서 평신도 교회의 이상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성숙한 민주적 공동체를 이루려면 훨씬 더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꿈이 인터넷이나 통신의 발달로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때, 평신도의 주체성 강화를 통한 수평적 교회 구조를 만들고 누구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요청되는 시대적 과제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수직적인 구조는 중세 사회의 재현이었고, 개신교의 장로 회의제도는 근대의 대의정치의 구조를 재현하는 정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할 때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시민이 주체적으로 정당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 대통령이 민본과 민주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서구 민주주의의 이상이 방종이나 방관으로 흐르지 않고, 어떻게 책임을 동반한 자유로서의 '자율'과 기계적 평등을 넘어서는 '상호협력'으로 체현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회를 통해 자기 욕망을 성취하려는 종교적 인간을 넘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참되게 섬기는 제자들로 나아갈 수 있을지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지향인 사회선교만큼이나 교인 각자는 영성의 깊이에 다다르도록 애써 자기를 다듬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바른 이해와 일상의 실천을 통해 참 신앙에 굳게 서 있는지, 하나님과의 지속적 소통을 통해 따뜻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지니고 있는지도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위해 오늘 저는 마가복음서를 만들어낸 마가교회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 교회가 처한 상황]
서력 기원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못하고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의 거룩한 성소를 잃고 혼란에 빠집니다.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자 신앙의 중심지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사라졌으니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로마의 신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패배한 것인가? 유대인에게는 큰 위기가 닥쳐 온 것입니다. 이때 유대교 갱신에 나섰던 예수 운동 가담자들은 성전 멸망에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성전 멸망 이전부터 다른 방식의 공동체를 꾸려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예식을 통해 기존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을 하고, 어느 가정에 함께 모여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눕니다. 물론 이 모임은 늘 위태로왔고, 갑작스런 위기가 닥치기도 했습니다. 44년에 이미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예수의 핵심 제자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순교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던 예수의 동생 야고보도 62년에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습니다. 60년대 후반에는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가장 큰 지도력을 발휘했던 수제자 베드로마저 순교하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지도자들을 모두 잃고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게 됩니다.
유대-로마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고, 지도자도 없이, 유리걸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를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마가교회는 새로운 방식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이 새로운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데, 이 가정에는 이상하게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구절인 마가복음서 3장 35절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아버지가 없지요!
예수는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는데, 이 모습을 본 베드로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막 10:28-30)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꼼꼼히 보면 아버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포기한 모든 것을 돌려받는데 아버지만 빠져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것은 마가교회가 처한 상황과 관계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태동한 초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제자단이었던 사도계 교회들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마저도 그들에게 자신의 선교에 대해 허락을 맡아야 했으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이 사도계 교회는 예수님의 평등한 관계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권위주의 집단이 된 것입니다. 특히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 야고보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이들이 유대의 정결 예법을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와 바나바를 포함하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것을 비난했고, 베드로가 슬금슬금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강력한 권위를 지녔는지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수장이 되면서 유대교 율법을 준수하는 그리스도교로 통일하려고 했고, 야고보의 순교 이후에 예수의 삼촌 시므온이 수장이 되고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예수의 동생 유다의 두 손자가 통치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가족들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근거를 가지고 계속 권력을 가지게 되자 초기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저항과 불신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마가복음서 곳곳에 드러나 있습니다. 12장 35-37절에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문제 삼습니다. 3장 20-35절에서는 "누가 내 가족이냐"며 예수가 혈육인 가족을 거부합니다. 1세기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는 바로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예수 사후 예루살렘 교회가 가부장적 권력의 모습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권력 지향 비판]
마가복음서 전체를 자세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보면 열두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 선교에 대해 얼마나 몰지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그래서 이들을 열둘이라고만 부르지, 제자라는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수행원처럼 데리고 다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주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먼저 하나님 나라 운동에 함께 하자고 초청한 이들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들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제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이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으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를 먹이는 데는 실패하고,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를 고치지 못하며, 세상을 향해 산 밑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고, 산 위에 좋은 집을 짓자고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말씀하셨으나, 열둘 중에 그 길을 따른 남성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의 멱살을 잡고 가로막았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가 왕이 될 때 한자리 차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 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못 오게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는가 하면, 누가 높은지 다투기 일쑤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열두 남자 중 하나가 예수를 배신합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며 괴로워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드리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 함께 해달라는 요청에도 쿨쿨 잠이나 자다가 예수가 잡히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끝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조차도 맹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권력을 추종하고 제 욕심을 부린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보여주었던 행태였던 것입니다.
[열둘의 잘못과 우리의 실수]
평신도 교회의 이상이 무너지는 자리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차분하게 말없이 봉사하는 실천보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만 남발될 때, 또 그것이 저마다 자신이 옳다는 방식으로 "나를 따르라"고 앞장서서 다른 이들을 이끌려고 할 때, 평신도 교회의 이상은 권력 투쟁과 각자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다툼과 분열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것을 가장 경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막 11:42-43a)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교회가 빠지기 쉬운 실수가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는 함성과 요구가 오히려 믿음의 형제자매를 정죄하고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마땅하지만, 만약 정의와 평화, 생명과 정의가 서로 부딪힌다면, 과연 무엇이 먼저여야 할까요? 좋은 가치들,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 사이의 선택은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할 수 없습니다. 차분히 숙고하고 남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대화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와 같은 편을 '옳다' 생각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틀리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남은 잘 모른다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 내가 모르고 있던 것은 내가 정말로 몰랐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다고 착각했던 것인데,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너무나 강한 자기 확신에 빠져들게 됩니다. 실제는 자기가 틀렸는데, 남 탓을 합니다.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서로 예수님의 뜻을 따른다면서 이런 자기 확신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바울 사도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바울의 심정은 압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력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이 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A에게 없는 것이 B에게는 있고, B에게 없는 것이 A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유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 나에게 뭔가 없는 것이 있다는 것, 즉 나는 유한한 존재이며,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인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질 때면 자신이 완전하게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마가교회의 도전과 노력]
우리의 이런 권력지향적 모습, 자기가 옳다는 확신의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가복음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마가복음서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당시 힘없고, 약하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자들의 활약입니다. 특히 여성들이지요. 제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사서삼경을 배울 때 한양대 철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선배와 마가복음서를 함께 읽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다 공부하고 나서 그 선배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그 선배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여자들이 엄청 나오네. 논어에는 여자가 등장하지 않잖아" 그렇습니다. 논어에는 딱 한 번 여인에 관한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이렇습니다. "공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가르치기가 어렵다. 친밀하게 대해주면 불손하고, 좀 엄격하게 하면 원망한다"(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陽貨-25-01)
예수의 사도들은 죽고 그들이 이끌던 공동체들은 유대교의 가부장적 제도와 권력으로 변질되는 상황에서 마가교회에는 평등한 하나님 나라의 밥상공동체를 준비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갈릴리의 예수 운동에 처음부터 함께 했던 여성들입니다.
마가복음서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인은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그는 열병을 앓고 있었고, 예수께서 열병을 고쳐주자 일어나 곧바로 그들을 섬깁니다. 건강하게 된 자가 첫 번째 할 일은 제일 낮은 자리에서 시중드는 것입니다. 그다음 주목해 볼 여성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월경하는 여성은 부정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예수께로 나아가 구원을 얻습니다. 남들에게 부정을 전염시키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지만, 반대로 "더럽다/깨끗하다"라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부작용을 깨뜨린 것이기에, 예수는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세기는 엘리트와 대중으로 철저하게 계급을 나누고 계급에 따른 규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성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자는 강하고, 용감하고, 관대하며 신중하고 이성적이며 절제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여성은 약하고 겁이 많고 소심하고 수다스러우며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여겼지요. 그래서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가정의 영역에 갇혀 지내야 했고,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는 것은 자신에게 수치이자, 자기 남편 그리고 모든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물론 여기서 사람은 남자들이겠지만) 이런 시대적 인습을 깨고 나온 여성이 바로 혈루증 걸린 여성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성은 배울 만큼 배우고 상류층의 문화를 향유하던 헬라 여성이었고,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대 제국을 세웠던 페니키아 왕국의 후예였습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딸, 즉 병들어 있는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해 모욕적인 언사를 참아가며 얼마나 지혜롭게 예수와 논쟁하는지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제1성서에서 히브리 산파들이 이집트 대 제국 황제의 명령을 그들의 기지와 재치 있는 말로 거부하고 출애굽의 첫 관문을 여는 것처럼,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인내와 지혜로 이방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가복음서에서는 이 여성만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다음 등장하는 여인은 과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보상을 바라던 열둘과는 달리 그녀는 구차한 중에도 모든 것을 바칩니다.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십자가의 도상에서 열둘은 모른 체 하거나 회피하거나 전혀 딴소리를 해댔으나, 무명의 한 여인은 노동자의 1년 품삯이나 되는 향유를 마련해 예수의 메시아 등극을 준비합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왕의 임명식에서 하는 행위였습니다. 여인은 예수에게 기름을 부어 진정한 메시아가 져야 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열둘은 도망가고 아무도 남지 않은 십자가 아래,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들개들과 까마귀만이 우글거리는 곳에 갈릴리부터 예수를 섬기며 따랐던 여성 세 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들은 이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대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이들만이 갈릴래아에서 다시 예수 운동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향린교회 교인들 정도면 목회자 없이도 마가복음서의 여성들처럼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사실 목회자 평신도 구분 없이 정말로 열심히 목회와 선교에 동참하는 분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금만 더 노력해 봅시다.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시대의 인습을 깨는 일은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믿음으로 12년이나 닫혀 있었던 생명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려면 시로페니키아 여인처럼 무엇보다 인내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의 모욕에 같이 화를 내고 싸웠다면 병든 후세들을 치료할 길이 없어집니다. 예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한 바울 사도가 말한 사랑의 요체가 오래 참는 것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딘다는 말로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청년들이, 요즘 대학생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민족과 사회의 문제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윽박만 지르고 한숨만 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때론 과부처럼 모든 것을 아무 보상 없이 내어놓은 순진함과 신앙의 결단도 필요합니다.
여인들만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섬기러 오신 예수를 끝까지 섬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섬김부터 십자가 죽음의 현장의 섬김까지 새로운 마가교회 교인들의 핵심 키워드는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영광을 바라던 열둘은 실패하고, 자기를 비워 사랑으로 남을 돌보는데 익숙했던 여성들은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없이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왜냐하면 조용히 남을 시중드는 일은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고, 또 겉으로 드러나는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일을 하는 이들은 지치기 쉽고,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왼손이 모르게 하는 오른손들이 많을 때, 그 공동체는 온갖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됩니다. 드러냄 없는, 말 없는 봉사가 많아질 때 그 공동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열매는 30배, 60배, 100배가 됩니다.
마가복음서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복음(福音)"은 한자 그대로 풀면 "복된 소리"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원어로는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로마 황제와 관련해서 쓰였습니다. 황제 임명식을 할 때 그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유앙겔리온"이라고 선포합니다. 제국의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가 궁전으로 입성할 때면 나팔을 크게 불며, 옆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이 "유앙겔리온"하고 외쳤지요. 또 황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손에 들고 "유앙겔리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황제의 "유앙겔리온"은 바로 폭력과 억압과 권력의 승리를 뜻하는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기원전 1년 6월 18일 힐라리온이라는 이집트의 한 노동자가 자기 아내 알리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힐라리온이 알리스에게 진심으로 안부를 전하오. 또 나의 존경하는 장모님 베로우스와 나의 아들 아폴로나리온도 잘 있는지요? 우리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다오. 나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돌아갔는데,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은 것을 걱정하지는 마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하는데 내 아이를 잘 돌보아 주오. 이제 곧 내가 받은 품삯을 당신에게 보내리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이면 그대로 두고 여자 아이라면 내어버리시오. 이하 생략"(존 도미닉 크로산/김준우 옮김, <역사적 예수>, (2000, 12. 9.), 82. )
평범한 노동자의 편지에서도 나오듯이 당시의 기쁜 소식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소식이 될 수 있던 것입니다. "사내 아이면 그대로 두고, 여자 아이거든 <죽도록> 내어버리시오" 황제의 경우 여자아이면 그 아이를 낳은 대리모와 함께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참된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뭐가 "유앙겔리온"입니까? 마가는 말합니다. "예수를 통해 사랑으로 섬기는 나라가 시작되었다. 지배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은 회개하여라.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이제 사랑의 자유로 섬기는 평등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야말로 참된 복음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전한 이 소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본론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여인들이 두려워서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못한 것으로 마가복음서가 끝나기 때문입니다(막 16:8). 독자들만이 갈릴리에서 본론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럼 본론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해답은 바로 저와 여러분 손과 발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손과 발로 마가복음서가 쓰지 못한 그 복음의 본론을 써봅시다. 바로 이것이 평신도 교회인 향린교회가 지녀야 할 이상이자 목표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주위가 어둡다고 불평하기 전에 한 자루의 촛불을 켜십시오.
백 척 벼랑 끝에 섰을 때 오히려 한걸음 내딛으시오.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사랑으로 세상을 변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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