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얘기, 혹시 지겨우십니까? 지겹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도 왜? 라는 질문은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9월 24일)이 벌써 162일 째인데도 말이지요. 지겨워도 직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세월호 사고 당일로 돌아가 봅니다…” (손석희, JTBC 뉴스 9월 24일 오프닝 멘트 中)
프롤로그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
오늘은 종교개혁 497주기 되는 날이고, 위의 손석희 멘트가 있었던 날부터는 한 달 이상이 지난 날이다. 내일은 세월호 침몰이 있었던 날로부터 200일째 되는 날이고...종교개혁일을 맞아 오늘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의 아픔에 참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이란 슬로건으로 신학자 177명이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기자회견도 열었고, 저녁에는 신학자들이 주관하는 기도회도 열렸다. 광화문뿐 아니라, 청운동에서, 안산에서, 그리고 팽목항에서 그 날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모이고, 내일도 모이겠지만, 이 싸움의 끝이 어떻게 그려질지,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국이 어떠할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부짖어야 이 원한이 들려질까?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이 노래가 들려지고,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그곳에 우리는 닿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에 대해 시인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고 노래했지만, 진정 그것이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면, 그 현실은 얼마나 잔혹하고 희망이 없는 현실일까? 그래서 점점 오기가 생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오기로 글을 쓰는 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오기든, 분노든, 죄책감이든, 감수성이든, 신학적 통찰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언제까지 바람이 불어와 답을 일러줄 그날만을 기다릴 수 있는가? 그래서, 일단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마주하는 사건들과 잡다한 단편들을 마구 기록하고, 나중에 그것들을 복기하면서 지금의 사건을 다시 기억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을 계속 유전시키면서 post 세월호를 준비하다보면 어느새 바람이 불어와 우리 이마에 송송히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지 않을까? 그러하리라.
데리다 사상의 변곡점
나는 지난 4월 16일 이후 웹진<제3시대>를 통해 세월호 관련 기사를 게재해왔다. 이번 웹진도 그 연장선에 서있고, 앞으로 ‘애도의 문법’이라는 제목으로 몇 차례에 걸쳐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말하는 애도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문법을 놓고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흔히 우리가 한 인물의 사상에 대해 전기사상과 후기사상으로 나누어 평가할 때가 있다. 니체 같은 경우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작품의 성격이 다르다. 전기 작품인 『비극의 탄생』, 『즐거운 학문』(The Gay Science)에서는 근대성 일반에 대한 비판이 있고, 『짜라투스트라...』 이후 등장하는 『도덕의 계보학』, 『선과 악을 넘어서』, The Anti-Christ, Ecce Homo를 통해 니체는 점점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더해간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도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를 기준으로 전기 사상은 의식-무의식의 지형도를 그렸다면, 그 이후는 Id-Ego-Superego간의 무의식의 역동, dynamic으로 옮겨가는 사상적인 전이를 보인다.
데리다도 마찬가지다. 데리다 연구자들은 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패망한 이후의 데리다와 그 이전 데리다를 구분한다. 데리다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에 절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1992년에 후쿠야마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썼고, 그로부터 1년 후에 데리다의 가장 문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맑스의 유령들』이 출판된다. 이 『맑스의 유령들』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 데리다와 후기 데리다를 나눈다. 전기 데리다는 주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에 주력하면서 그에 대한 전략으로 언어, 기호, 텍스트에 대한 천착을 그 특징으로 한다면, 후기 데리다는 정치, 윤리, 법, 정의 등 정치철학적인 부분으로까지 자신의 관심사를 확대하여 해체론을 적용하기에 이른다. 『법의 힘』, 『우정의 정치학』, 『불량배들』이 이런 연속성에서 출간된 작품들이다.
‘O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위에 적혀있는 ‘O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다’는 데리다가 『우정의 정치학』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했던 문구다. 이 문장에서 궁극적으로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친구란 없다”였다. 우정이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본심은 ‘우정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정이란 의미론적 범주가 아닌 빈공간이라는 사실을, 친구란 내안에 들어와 있는 빈공간이다’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게다.
데리다는 우정을 의미론적인 자질로, 친구를 우정을 입증하는 현실의 소여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친구를 설명할 때, 혹은 그 친구와의 우정을 설명할 때, 나와 비슷한 입장과 처지와 상황과 배경을 공유하는 자를 친구라고, 그 친구와 맺는 관계를 우정이라 말한다. 여기에는 유사의 법칙과 등가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런 친구는 없다고 말한다. 친구란 유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틈이기 때문이다.
결국, 데리다에 있어 의미란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정과 사랑, 국가와 정의, 신과 믿음은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틈이다. 이것이 대체 무슨 뜻이고, 그것이 세월호를 둘러싼 애도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데리다를 평생 따라다녔던 기본 개념어라 할 수 있는 ‘차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리라 본다.
‘차연’이란 무엇인가?
데리다는 시종일관 ‘차연’라는 개념어를 가지고 자신의 이론적, 실천적 작업을 진행하였다. 데리다가 사용하는 differance는 우리나라에서 ‘차연’으로 번역되었는데, 어원적으로는 Differ(다르다)와 defer(연기하다), 이 둘이 합쳐진 조합어다. 영어로 번역된 데리다의 저작을 보면 불어인 differance를 그냥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영어로 differance를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데, Differ와 defer의 의미가 다 들어간 단어를 만들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까닭에 굳이 그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불어인 differance를 그대로 쓰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연’이라는 말 안에 들어있는 느낌을 영어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영어 단어 중에 낱말의 뒤에 붙어 명사화시키는 접미어 중 나중에 보면 동사의 느낌이 나는 접미어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단어 뒤에 -(a)tion을 붙이는 케이스이다. 예를 들어 像을 뜻하는 image에 –ation을 붙여 ‘이미지화하기’(imagination)라는 단어가 파생되고, ‘개념’을 뜻하는 concept에 –tion을 붙이면 ‘개념화하기’(conception)라는 뜻이 생긴다. 둘 다 형태는 명사형이나 동사 feel이 나는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차이화 하기’라는 말도 있지 않을까? 영어로 차이를 뜻하는 difference에 –ation을 붙이면 differentiation이라는 말이 파생되는데, 수학용어로는 미분이다. 미분이 무엇인가? 계속 잘게 쪼개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계속 무엇인가를 쪼개어나가지만 그 쪼개짐이 끝나지 않음을 전제한다. 이렇듯 Differentiation은 사전적으로는 ‘미분화하기’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차이화 하기’로 치환할 수 있다고 본다. 미분했다는 말은 쪼개어져서 이전 형태와 다른 차이가 발생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차이화 하기’라는 말은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차이’와 ‘연기’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말이고, 차이를 계속 생성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틈과 여백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이며, 해석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해석에 대한 독점 없이 해석의 준거점들이 계속 바뀌는 것이다. 그 과정 일반을 데리다는 ‘deconstruction’이라 불렀다. 이를 우리말로는 ‘해체’라는 다소 흉측한 말로 번역했는데, 이보다는 더 부드럽고 본래 의미를 잘 살리는 번역어가 등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는 ‘차연’에 대한 사전적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지니는 해석학적 의미까지를 간단히 살펴보았고, 그것이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시작되는 진앙이라는 사실 또한 확인하였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데리다의 논의가 현실생활과 현실정치에서 어떤 포물선을 그려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차연’에 대한 오해와 변명
흔히 현대 사회를 설명하면서 제일 많이 쓰이는 단어가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가 아닐까 싶다. 이 둘을 지목하는 이유는 양자는 단순히 한때 몰아닥쳤던 이론의 유행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읽어내는 묵직한 화두를 우리에게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각론으로 들어가 이 두 시대정신의 부각과 함께 등장했던 개념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아닐까 싶다: 차이, 다양성, 다름, 타자, 욕망, 해체 등.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하고, 나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압된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시대 중요한 과제다. 특별히 차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상대방과 나와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간격을 유지한 채 나이스하게 서로의 다름을 넉넉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 이것이야 말로 바로 이 광명한 글로벌하고도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살아가는 명법이라 우리는 훈육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법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현대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을 왜곡하고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식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별히 맑스주의 계열의 학자들로부터 이런 비판은 드세었는데, 그 중에서도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수평적 다양성이 혁명에 이르는 수직적 적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 지적하였다.
데리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로 지목되었고,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집중 포화의 대상이 되었다. 『맑스의 유령들』 출판이후에 이런 오해들이 다소나마 풀리기는 했지만, 데리다를 향한 이런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에는 다소 곡해가 있다. 데리다의 차연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차이 자체에는 방점이 없다. 차연은 엄격히 말해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데리다의 본심
그렇다면,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성되고, 그 자본의 법칙만이 유일한 정언명법이 되어버린 이 세계 속에서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일까?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이 견고한 텍스트에 균열을 내고, 주름을 만들고, 틈을 내고, 그래서 이 시스템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데리다의 차연, 즉 ‘차이가 생성된다’는 말 속에 담긴 정치적 함의가 아닐까? 그리하여 체제로 하여금 뭔가 불순한 세력과 음모가 이 사회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고, 뭔가 상스럽지 못한 기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고, 거리에선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주문이 환청이 되어 들리면서, 이 사회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유포시키는 것! 그것이 데리다 말하는 차연, 즉 ‘차이생성’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데리다식 정치적 음모라 한다면? 나는 그렇게 데리다를 읽고 싶은데...
에필로그: 이런 시각으로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바라보면 어떨까? 이제야 비로소 워밍업을 끝내고 세월호에 대한 ‘애도의 문법(文法)’으로 들어가는 문(門) 앞에 당도했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 2014년 12월 2일에 실렸으며 저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한다. 이 글의 ‘오늘’이 지금과 시차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웹진의 편집부 사정상 이 글의 상재가 늦어진 것 때문이므로 이의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