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의 한 장면. ⓒ스틸컷 |
어느 새부터인가 치유를 뜻하는 ‘힐링’이란 낱말이 일상 언어에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무엇을 하든 힐링이다. 여행을 떠나도, 책을 읽어도, 차를 마셔도 힐링을 위해서 한다. 힐링이란 낱말이 주는 이미지는 찌든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벗하면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 해야 힐링을 경험할 수 있을까?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원제: Wild)는 힐링이란 낱말이 품고 있는 참 의미를 일깨워주는 영화다. 이야기의 뼈대는 단순하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방황하던 한 여인이 하이킹 여행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는 이야기다. 얼핏 최근 유행하는 힐링 바람에 편승한 영화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값싼 힐링의 미덕을 설파하지 않는다. 영화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영화의 오프닝은 강렬하다.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의 발은 온통 피투성이다. 엄지발톱은 거의 빠져 나갈 지경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톱을 빼낸다. 이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몸부림치다가 그만 신발 한 짝을 잃는다. 그녀 앞에 펼쳐진 길은 험하기 그지없다. 발톱이 빠진데다 등산화까지 잃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그녀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남은 한 짝을 허공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리곤 절규하듯 외친다.
“빌어먹을!(Fuck you)”
그녀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유년시절 기억이라곤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이 전부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 바비(로라 던)는 상처 입은 마음을 기댈 유일한 피난처다. 그녀가 자라 겨우 가족과 행복한 삶을 꿈꾸기 시작하던 즈음, 바비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이러자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약과 섹스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의 한 장면. ⓒ스틸컷 |
자기 파멸적 삶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로 도보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단순히 찌든 삶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곁을 떠난 어머니에게 다시금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어서, 이를 통해 잃어가는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4,286km의 PCT 코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코스는 흙먼지 가득한 사막이고, 때론 만년설로 뒤덮인 계곡을 지나기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간혹 마주치는 남성들의 음흉한 시선도 불안 요소 가운데 하나다. 여정을 더해갈수록 그녀의 몸은 온통 멍으로 물든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 같이 자기 자신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치유는 아픈 기억을 토해내며 얻는 값진 경험
PCT 코스는 여자 혼자 감당하기엔 험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첫발을 떼는 그 순간부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여기에 하루하루 여정이 더해갈수록 과거의 기억은 그녀를 더욱 괴롭힌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고통을 피해가지 않는다. 오히려 난관에 봉착할 때 마다 에밀리 디킨슨의 “몸이 그대를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싯구, 혹은 “나는 발걸음이 느리다.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구를 떠올리며 자기 자신을 격려한다. 그녀가 남자도 소화하기 힘든 PCT 코스를 극복한 원동력은 내면에서 요동치는 아픔을 이겨내려는 의지였다.
원작자 셰릴 스트레이드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치유의 참 의미를 일깨워준다. 마약과 섹스에 빠져들었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통스런 기억을 한 점 남김없이 끄집어낸다. 발톱이 빠지고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녀는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고 끝내 자신을 이기는데 성공한다.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와일드>의 한 장면. ⓒ스틸컷 |
타이틀 롤 셰릴 스트레이드를 연기한 리즈 위더스푼의 연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흡사 굴곡으로 가득했던 셰릴의 일생을 자신이 대신 살아보기라도 한 듯 혼신을 다해 자신의 배역을 소화해 낸다. 위더스푼은 “모든 이야기에 익숙해지도록 셰릴이 쓴 책을 전부 읽었다”고 밝힐 정도로 이 역에 몰입했다. 특히 자신보다 더 무거운 배낭을 가까스로 짊어지고 험한 여정을 떠나는 장면 연기는 그녀가 셰릴의 인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촬영에 임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역경과 맞서 싸우는 <올 이즈 로스트>의 로버트 레드포드에 비견할 만하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친숙한 장 마크 발레의 연출도 그녀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발레 감독은 셰릴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감정변화의 동선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치유는 단순히 삶에서 잠시 벗어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똬리를 튼 아픈 기억을 모조리 토해 내면서 얻는 값진 경험이다.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드러내고, 상처를 도려내 마침내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연 셰릴 스트레이드의 삶은 그래서 너무나 아름답다.
끝으로, 바쁜 일상에 쫓겨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현대인을 속이려드는 싸구려 힐링 마케팅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자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 & 셰릴 스트레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