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른 다윗의 시.
1[2] 야훼 우리 주[아도나이]여,
주의[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도 위엄스러운지요!
주의[당신의] 권세가 하늘 위까지 뻗어 있고,
2[3]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하여서까지도
주께서는[당신께서는] 그 권능의 초석을 놓으시나니,
이는 주께서 주께[당신께] 대적하는 자들과 원수들,
그리고 복수하기 좋아하는 자들까지 그 어느 누구도
아무 짓거리를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4] 아! 주께서[당신께서] 손수 만드신 주의[당신의] 하늘들과
주께서[당신께서] 펴 놓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바라보니,
4[5] 아,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께서[당신이]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인자(人子)가 감히 무엇이기에 이처럼 돌보아주시나이까?
5[6] 주께서는[당신께서는] 그를 신[神]보다 단지 ‘조금’ 못하게 하셨으니,
참으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왕관)을 씌워주셨나이다.
6[7] 주께서[당신께서] 손수 지으신 것들을 다스리도록[통치하도록] 하시고
모든 만물을 그의[인간의] 발아래 두셨으니,
7[8] 모든 양과 소와 같은 가축들과 들짐승들까지,
8[9] 그리고 하늘의 새와 물길 따라 헤엄쳐 다니는
바다의 물고기들 등입니다.
9[10] 야훼 우리 주[아도나이]여,
주의[당신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도 위엄스러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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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 시(詩)는 첫 절과 마지막 절로 ‘후렴’ 기능을 하도록 하고 또 시의 중심내용(1b[2b]~8[9]절)을 그 앞뒤로 감싸게 하는 형식(inclusio형식)을 이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되, 그 하나님 찬양을 통하여 시인 자신의 신학적 인간론을 풀어낸 신학적 성격을 지닌 시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분명, 어느 한 개인이 노래한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찬양하는 개인 찬양 시>이지만, 그 중심내용(1[2]b절~8[9]절)은 <하나님 찬양의 틀> 안에서 오히려 인간(에노쉬 와 벤-아담[人子]) 자신을 철저히 신학적으로 반성한 한 지자(智者)의 신학적 인간론을 개진(開陣)한 시(詩라고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 시는 마치 욥의 지혜를 생각나게 한다. 즉 하나님과의 오랜 대결 논쟁 끝에, 마침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웅대하고 오묘한 자연 질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지금껏 긴 변론을 통하여 끝까지 버티며 억지를 부려 주장해 온 그 모든 주장을 모두 다 접고는 “아, 나는 깨달음도 없이 함부로 말을 하고, 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구 떠들었던 나의 그 모든 헛된 주장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자기를 던져 항복하는 그 욥(욥 42: 1-6)의 지혜를 생각나게 하는 시(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또는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것일까? 신구약성서 전체의 진술로 미루어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또 심지어는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아남을 수도 없다고까지 하다는데(출 33:20; cf. 신 4:12, 15; 요 14:8f.),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을까?
물론, 현대 신학은 인간의 신 인식(神 認識)이란 하나님의 두 가지 ‘자기계시’(自己啓示) 즉 ①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시 19A; 롬 1:20)와 ②아들(神子→人子=로고스)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요 14:9; 시 19B)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정답다운 정답(正答)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자기계시(自己啓示)는 성질상 흔히는 독립된 두 개의 서로 다른 자기계시라고 생각하여왔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이 두 계시가 절묘하게 하나로 융합(融合)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1)우선, 우리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창조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거기에 절묘하게 창조질서를 부여하셨다는 그 자연 질서(自然 秩序)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실재(實在)를 사람들이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롬 1:20) 체험하게 하고 인지(認知)하게 하셨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다. 예컨대, 시편 19A는 이러한 무언(無言)의 자연이 하나님의 실재를 증언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시적 언어로 노래한 바 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도 또한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분의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분의 말씀 온 세상 끝까지 번져 가도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관한 무언(無言)의 증언자(證言者)가 된 셈인데, 그러므로, 비록 <산을 가르고 바위를 쪼개는 강풍(强風)>, <지각(地殼)을 변경시키는 지진(地震)>, <핵폭발과 같은 화염을 동반한 불> 등등(왕상 19:11-12)으로 시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셔서 친히 펼쳐 보이신 그 자연 질서의 그 오묘함과 그 위엄은 실로 흙으로 빚어 만든(창 2:7) 단순한 흙덩어리에 불과한 허무한 인간을 능히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자연 질서의 그 압도적 위엄만으로는, 또 저 억겁(億劫) 세월의 흐름이 지닌 창조질서의 그 냉엄한 무언(無言)과 침묵(沈默) 앞에서의 인간의 하나님 찬양만으로는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질상 <보이지 않는 하나님>(invisible God)의 그 불가시성(不可視性)의 냉엄함 앞에서 그저 무조건 외치기만 하는 인간의 하나님 찬양이란, 지극히 짧은 순간적인 해결점은 되겠지만, 더 이상 지속적으로 감동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구약성서의 끝부분인 전도서는 모든 교훈과 훈련이란 결국 끝내는 “한 목자”(창조주, 전 12:1)께서 주신 것임을 지적(指摘)한다(전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수집한 명언들은 잘 박힌 못과 같으나
그 모두가 다 한 분 목자께서 주신 것들이다.
(전 12:11)
(2)그리하여 우리 본문(시8편)의 시인은 야훼(창조주=한 분 목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 중의 하나인 인간, 그 인간을 다른 모든 창조물과 비교하여 주목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침내 ‘한 깨달음’(ki, rhetoric ki, 3[4]절 서두)에 이른다!!
아! 주께서 손수 만드신 주의 하늘[들]과
주께서 펴 놓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니
아! 인간이 무엇이기에, 또 人子가 감히
무엇이기에 이토록 까지 생각해 주시는지요?
감히! 그를 神보다 ‘조금’ 못하게 해 주셨으니
영광과 존귀의 冕旒冠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3-5[4-6]절)
그렇다! 저 광대무변한 주의 창조물을 우러러 둘러보니, 창조주의 위엄과 권위가 우주에 가-득하여 참으로 놀랍기만 한데, 그런대, 거기에 비해서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건만, 히브리어 수사 어투 “마-”(mah, 과연 무엇이기에!!)라는 어투도 이미 그것을 암시하고 있듯이, 그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감히 그 모든 창조물을 창조주를 대신하여 인간이 통치하도록 통치권 위임의 그 큰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라는 것이다. 창세기 1: 26-28이 반복해서 웅변적으로 증언하였듯이, 이 면류관은 감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리도록”(창 1:26,28; radah의 반복사용) 위임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야말로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외감(敬畏感)은 오히려! 신비하고 놀라운 그 <자연 질서>의 오묘함에만 그 무게를 둔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오히려, 히브리어 ‘마-’(mah)의 냉소적 기능(인간 따위가 감히 무엇이기에! 라고 인간을 폄하하는 표현)이 잘 말하고 있듯이, ‘인간’(뒤이어 반복된 人子[‘사람의 아들’]라는, 이른 바, ‘사람’을 좀 더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 앞에 나온 ‘인간’이라는 말도 ‘아담’이라고 칭하지 않고! 허약함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에노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참조할 것), ‘에노쉬’의 그 허약성과 허무성의 ‘조야’(粗野)함을 보고 느끼는 놀라움이 오히려! ‘창조주’의 위엄과 권세가 지닌 것에 대한 놀라움과 그 경외심(敬畏心)을 더욱 강렬하게 충동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에, 이 시(詩)는 오히려 저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인간을 <신(神; [LXX, 헬라어 구약성서에서는 ‘神’이라는 말 대신에 ‘천사’라는 말을 사용])보다 단지 조금!! 못하게만 창조하셨다는 데>에 대한 의외성(意外性)과 그 충격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서 감히 <신학적 인간학>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실로, 저 허약하고 조약한 <인간>을 통하여! 감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볼 수 있다는 것, 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 유추>(類推, analogy)가 가능하도록 하셨다는 것, 그리고 <인자>(人子: son of human, 성육[成肉]한 인간: incarnated God)를 통하여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요 14: 6-14) 놀라움 중의 놀라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다.
그렇다면 시인의 이 놀라움과 이 감격(!)은 창조주 하나님의 어떤 면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 것일까? 물론 위에서 이미 자세히 언급한 것처럼 창조주가 만드신 저 대 자연의 질서의 오묘함 때문만은 아닌 것! 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역시 “감히 무엇이기에?” 또는 “감히 무엇이라고?”라고 말할 때의 그 히브리어 ‘마-’(mah; what? 무엇이기에?)라는 수사어투의 의미와 기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주께서 만드신 하늘과 그 하늘에 매달아 놓으신 천체의 오묘한 조화에 비하면, ‘인간’이야말로, 이 허무한 인간이야말로, 과연 무엇이기에 저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위임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배려(配慮)란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이요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하는 깨달음의 감격이라고 하겠다.
이로서 난해의 구절인 본문 2[3]절에 대한 주석적 해법이, 비록 부족하고 불완전하나마, 이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어느 정도의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통하여서까지도”(시 8:2[3]a) 주의 위엄과 권능을 찬양할만한 이유가 저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유한성과 동시에 존엄성을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설적 창조의지를 통하여 비로소 비쳐 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먼 후일 사도 바울도 절실하게 깨달은 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弱)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시어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몸을 가진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전 1: 27-29)라는 신학적 각성과도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허무하고 연약한 인간 따위에게 “신(神)보다 조금 못한”(시 8:5[6])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신 그 깊으신 뜻이 이로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