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북 리뷰] 분단 70년 한반도가 곱씹어야 할 특별한 기억

에곤 바 지음, 박경서·오영옥 옮김,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북로그컴퍼니)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겉 표지.
에곤 바(Egon Bahr)는 독일의 키신저다. 두 사람 모두 동시대를 살며 각자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냉철히 인식한 가운데 혁혁한 외교성과를 냈다. 키신저가 베트남전 종전, 미-중 국교정상화 등을 성사시킨 일등공신이라면, 에곤 바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기조로 모스크바 조약, 동서독 기본조약 등 독일 통일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협약의 산파역을 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엔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키신저는 힘의 정치가였다. 반면, 에곤 바는 외교 협상의 달인이었다. 이 같은 차이점은 미국과 독일이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충분히 강한 나라였고, 키신저는 이 힘에 편승해 세계지도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반면, 에곤 바가 활약했던 시절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미국, 구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대 전승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였다. 에곤 바의 위대성은 독일의 힘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했고, 그런 인식 하에 4대 강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외교노력을 치열히 전개해 독일 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는데 있다. 
올해로 93세(1922년생)를 맞는 에곤 바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그 책이 지금 소개할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원제: Das musst du erzählen: Erinnerungen ad Willy Brandt)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쟁쟁하다. 먼저 주인공인 빌리 브란트다. 그는 ‘동방정책’으로 동서 화해에 앞장섰다. 독일 통일이 그의 화해정책의 값진 열매라는 평가엔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다. 각각 브란트의 전임과 후임인 콘라드 아데나워, 헬무트 슈미트 총리, 미국의 케네디-닉슨 대통령, 키신저,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이 세계사 자체였던 셈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외무부에서 사실 최고의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이 되었다. 외무부 직원들은 각 나라에 있는 대표부를 통해 모든 전보를 받았다. 외무장관이나 국장들도 전보를 받지만 그들은 그것을 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 내 사무실 직원들은 내가 알아야 하는 많은 정보들을 취사선택해 가져왔다. 브란트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이 그와 같은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또한 나는 외무부에서 깊이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그런 일을 하면서 월급까지 받는 호사를 누렸다.” (본문 71쪽)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브란트와 에곤 바가 독일 통일을 위해 얼마만큼 치열하게 고민했고, 이런 고민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또 얼마만큼 치열하게 행동했는지 깨닫는다. 두 사람의 고민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애초부터 거창한 목표를 두고 통일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다. 아래 인용할 에곤 바의 회고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오늘날에도 믿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다. 독일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한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본문 71쪽)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브란트와 에곤 바는 그저 4대 전승국의 권한 아래서 독일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문제의식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언명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인식은 베를린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베를린 장벽은 일촉즉발의 긴장을 불러왔다. 베를린 위기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독일은 아무런 지렛대를 행사하지 못했다. 브란트만 기민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는 당장 베를린의 연합국 사령부로 달려가는 한편, 미국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혼자 동분서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에곤 바의 회고다. 
“브란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킬로 가는 밤열차 안에서 소식을 들었다. 브란트는 기차에서 내려 하노버 비행장으로 가서 베를린으로 날아가자마자 즉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브란트는 어쩔 줄 모른 채 분노하는 베를린 시민들과 마주했다. 브란트는 그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합국 사령부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는 아무 훈령도 받지 못한 직원만 남아 있었다. 세 명의 연합국 사령관들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소련 측 지휘관의 사진만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었다.” (본문 38쪽)    
이런 경험은 4대 전승국의 이해 없이는 독일 통일은 요원하다는 교훈을 일깨웠다. 에곤 바는 “승전국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회고했다. 
브란트와 에곤 바의 경험은 올해로 분단 70년을 맞는 한반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사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이 이 책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브란트가 추구한 ‘동방정책’의 대전제는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앞서 언급했듯 브란트와 에곤 바는 애초에 통일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단지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는 일이 불가피했음을 인식했고, 이어 두 독일의 하나 됨(Einheit)을 이루기 위해선 4대 전승국의 이해 및 동서화해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런 인식을 신중하게 행동에 옮겼다.  
“우리(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는 4개국을 조심스럽게 장악하여 노련하게 이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빌리는 자제하고 신중할 것을 충고했다.” (본문 114쪽)    
빌리와 에곤의 경험은 미-일-중-러 4대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한반도의 서로 다른 분단 당사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경험이다. 분명 한반도에 중대한 이해를 가진 4대국의 양해가 없다면 한반도 분단 고착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물론 지난 현대사에서 남북 화해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른바 ‘햇볕정책’을 통해 ‘접근을 통한 변화’가 조심스럽게 시도됐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2008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현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대박’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정부가 공공연히 북한을 적대시한다는 인상이 짙다. 이 같은 양상은 1972년 스파이 파문으로 브란트가 불명예 퇴임했음에도, 그의 외교정책을 고수한 독일의 경험과 사뭇 대조적이다.  
“브란트의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후임 외무장관들인 셸, 겐셔, 킨켈과 피셔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이어졌다.” (본문 70쪽)    
에곤 바의 어조엔 세계사적 사건을 일궈낸 주역으로서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의 자신감은 특히 한국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더욱 강해진다. 
“민족이 갈라지고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비극을 우리는 겪지 않았다.” (본문 153쪽)   
에곤 바는 회고록 말미에 금융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과제가 ‘정치에 일치하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며 독일은 “유럽의 경제대국으로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냉철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모습은 놀랍다.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에곤 바를 더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이 회고록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말 귀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준 그가 고맙다. 이 회고록은 분단 70주년을 맞는 한국인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로 기억될 것이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AI의 가장 큰 위험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죄"

옥스퍼드대 수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존 레녹스(John Lennox) 박사가 최근 기독교 변증가 션 맥도웰(Sean McDowell)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신간「God, AI, and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여성들, 막달라 마리아 제자도 계승해야"

이병학 전 한신대 교수가 「한국여성신학」 2025 여름호(제101호)에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서방교회와는 다르게 동방교회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극단적 수구 진영에 대한 엄격한 심판 있어야"

창간 68년을 맞은 「기독교사상」(이하 기상)이 지난달 지령 800호를 맞은 가운데 다양한 특집글이 실렸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1945년 해방 후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김경재 교수는 '사이-너머'의 신학자였다"

장공기념사업회가 최근 고 숨밭 김경재 선생을 기리며 '장공과 숨밭'이란 제목으로 2025 콜로키움을 갖고 유튜브를 통해 녹화된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경직된 반공 담론, 이분법적 인식 통해 기득권 유지 기여"

2017년부터 2024년까지의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기독교 연합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반공 관련 담론을 여성신학적으로 비판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인간 이성 중심 신학에서 영성신학으로

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영성적 차원이 있음을 탐구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인수 교수(감신대, 교부신학/조직신학)는 「신학과 실천」 최신호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안병무 신학, 세계 신학의 미래 여는 잠재력 지녀"

안병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하엘 벨커 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의 특집논문 '안병무 신학의 미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라난다"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가 발행하는 「신학포럼」(2025년) 최신호에 생전 고 몰트만 박사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전한 강연문을 정리한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교회 위기는 전통의 사수와 반복에만 매진한 결과"

교회의 위기는 시대성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신조와 전통을 사수하고 반복하는 일에만 매진해 세상과 분리하려는, 이른바 '분리주의' 경향 때문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