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 겉 표지. |
물론 두 사람 사이엔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키신저는 힘의 정치가였다. 반면, 에곤 바는 외교 협상의 달인이었다. 이 같은 차이점은 미국과 독일이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충분히 강한 나라였고, 키신저는 이 힘에 편승해 세계지도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반면, 에곤 바가 활약했던 시절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미국, 구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대 전승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였다. 에곤 바의 위대성은 독일의 힘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했고, 그런 인식 하에 4대 강국의 신뢰를 얻기 위한 외교노력을 치열히 전개해 독일 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는데 있다.
올해로 93세(1922년생)를 맞는 에곤 바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신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그 책이 지금 소개할 『독일 통일의 주역 빌리 브란트를 기억하다』(원제: Das musst du erzählen: Erinnerungen ad Willy Brandt)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쟁쟁하다. 먼저 주인공인 빌리 브란트다. 그는 ‘동방정책’으로 동서 화해에 앞장섰다. 독일 통일이 그의 화해정책의 값진 열매라는 평가엔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뿐만 아니다. 각각 브란트의 전임과 후임인 콘라드 아데나워, 헬무트 슈미트 총리, 미국의 케네디-닉슨 대통령, 키신저, 구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한 개인의 삶의 궤적이 세계사 자체였던 셈이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것 같다. 저자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외무부에서 사실 최고의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이 되었다. 외무부 직원들은 각 나라에 있는 대표부를 통해 모든 전보를 받았다. 외무장관이나 국장들도 전보를 받지만 그들은 그것을 다 읽을 시간이 없었다. 내 사무실 직원들은 내가 알아야 하는 많은 정보들을 취사선택해 가져왔다. 브란트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일이 그와 같은 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 또한 나는 외무부에서 깊이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그런 일을 하면서 월급까지 받는 호사를 누렸다.” (본문 71쪽)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브란트와 에곤 바가 독일 통일을 위해 얼마만큼 치열하게 고민했고, 이런 고민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또 얼마만큼 치열하게 행동했는지 깨닫는다. 두 사람의 고민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애초부터 거창한 목표를 두고 통일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다. 아래 인용할 에곤 바의 회고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오늘날에도 믿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다. 독일 통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한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본문 71쪽)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브란트와 에곤 바는 그저 4대 전승국의 권한 아래서 독일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했을 뿐이다. 두 사람의 문제의식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라는 헤겔의 언명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의 인식은 베를린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베를린 장벽은 일촉즉발의 긴장을 불러왔다. 베를린 위기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 나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독일은 아무런 지렛대를 행사하지 못했다. 브란트만 기민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는 당장 베를린의 연합국 사령부로 달려가는 한편, 미국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혼자 동분서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에곤 바의 회고다.
“브란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킬로 가는 밤열차 안에서 소식을 들었다. 브란트는 기차에서 내려 하노버 비행장으로 가서 베를린으로 날아가자마자 즉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브란트는 어쩔 줄 모른 채 분노하는 베를린 시민들과 마주했다. 브란트는 그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합국 사령부로 달려갔지만, 그곳에는 아무 훈령도 받지 못한 직원만 남아 있었다. 세 명의 연합국 사령관들은 주말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소련 측 지휘관의 사진만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었다.” (본문 38쪽)
이런 경험은 4대 전승국의 이해 없이는 독일 통일은 요원하다는 교훈을 일깨웠다. 에곤 바는 “승전국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회고했다.
브란트와 에곤 바의 경험은 올해로 분단 70년을 맞는 한반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사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이 이 책이 지닌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브란트가 추구한 ‘동방정책’의 대전제는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앞서 언급했듯 브란트와 에곤 바는 애초에 통일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단지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는 일이 불가피했음을 인식했고, 이어 두 독일의 하나 됨(Einheit)을 이루기 위해선 4대 전승국의 이해 및 동서화해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런 인식을 신중하게 행동에 옮겼다.
“우리(빌리 브란트와 에곤 바)는 4개국을 조심스럽게 장악하여 노련하게 이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빌리는 자제하고 신중할 것을 충고했다.” (본문 114쪽)
빌리와 에곤의 경험은 미-일-중-러 4대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한반도의 서로 다른 분단 당사자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경험이다. 분명 한반도에 중대한 이해를 가진 4대국의 양해가 없다면 한반도 분단 고착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물론 지난 현대사에서 남북 화해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른바 ‘햇볕정책’을 통해 ‘접근을 통한 변화’가 조심스럽게 시도됐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2008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현 정부는 ‘통일은 대박’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대박’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정부가 공공연히 북한을 적대시한다는 인상이 짙다. 이 같은 양상은 1972년 스파이 파문으로 브란트가 불명예 퇴임했음에도, 그의 외교정책을 고수한 독일의 경험과 사뭇 대조적이다.
“브란트의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후임 외무장관들인 셸, 겐셔, 킨켈과 피셔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이어졌다.” (본문 70쪽)
에곤 바의 어조엔 세계사적 사건을 일궈낸 주역으로서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의 자신감은 특히 한국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더욱 강해진다.
“민족이 갈라지고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비극을 우리는 겪지 않았다.” (본문 153쪽)
에곤 바는 회고록 말미에 금융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과제가 ‘정치에 일치하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며 독일은 “유럽의 경제대국으로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냉철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모습은 놀랍다.
나이를 감안해 볼 때, 에곤 바를 더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이 회고록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말 귀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준 그가 고맙다. 이 회고록은 분단 70주년을 맞는 한국인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