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얼굴의 폭력,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들
▲강남순 교수 ⓒ베리타스 DB |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본 뉴스에서 인천의 한 어린이집의 보육교사가 4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CCTV의 영상이 내 마음속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나의 삶과 일의 공간인 이곳 텍사스에 돌아와서 책상에 앉았는데, 이 CCTV에서의 장면이 나를 사로잡고 있다. 한 보육교사에 의하여 머리가 내리쳐진 끔찍한 폭력을 당한 아이에게 이 경험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흉터처럼 이 아이의 삶속에 깊숙히 자국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어린아이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처참히 유린되는 일상적 공간들이, 단지 이 어린이집에서 한 "몰상식한" 보육교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보육교사의 육체적 폭력에 돌연히 민감성을 작동시키는 분위기에서, 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라는 "인권"의 포괄적인 이해, 그리고 그 '인간"의 범주속에 어린 아이들, 청소년들, 대학생들, 일용직 노동자들, 전문직 노동자들 등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는 그 당연한 "인권 적용의 보편적 범주"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부재, 그리고 폭력의 다양한 양태들에 대한 총체적 몰인식이라는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게 된다.
"폭력"이란 다양한 옷을 입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짓밟는다. 그러한 폭력에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하거나, 그 폭력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왜곡된 의식을 내면화하게 되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다양한 양태의 폭력에 의한 "피해자 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 놓고 꽃 피우지 못한 채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보육교사가 4살 짜리 어린아이에게 가한 "육체적 폭력"에는 민감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 육체적 폭력보다 어찌보면 더욱 강하고 치명적인 상처로 남게 되는 가정과 사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폭력들에 대하여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언어적 폭력, 심리적 폭력, 제도적 폭력등 우리 사회는 다양한 옷을 입고 있는 폭력들에 대한 불감증으로 병들어 있다. 아이들을 이런 저런 학원들로 계속 돌려 대야만 안심이 되는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하는 "심리적 폭력" 과 "언어적 폭력," 그러한 입시경쟁적 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제도적 폭력" 과 "구조적 폭력," 자본주의화된 "성공적 삶" 에 대한 표상을 "신의 축복과 은총"으로 해석하고 강조하는 "종교적/신학적 폭력"등 우리사회에는 다양한 옷을 입은 폭력들이 곳곳에 난무하고 있다. 보육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등 이러한 공공교육기관들 속에서 가해지는 은밀한 또는 노골적인 다양한 종류의 폭력속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무참히 유린되고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한 보육교사가 한 아이에게 가한 그 노골적인 육체적 폭력사건을 접하면서 그 보육교사에 대한 "악마화"로만 이 문제를 보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특정한 보육교사 한 사람이 "악마적" 품성이 지녔기에 그 일이 있어났다고만 보면서 그 사건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밀접한 연관성을 간과하기 쉽게 만든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인식이 사회변혁운동에서 중요한 모토가 되었던 이유를 다시 상기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다양한 폭력들이 인천 부평의 한 어린이 집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마녀 사냥" (witch-hunting)"이란 한 집단이 지닌 뿌리깊은 문제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모면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이다. 한 보육교사가 저지른 그 폭력적 행동은 물론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그 한 개인에 대한 "악마화"로만 이 문제를 접하는 것은 "마녀사냥"과 같은 역사적 오류들을 반복하게 될 뿐이다.
예를 들어서 보육교사들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지켜내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가, 그들이 "적절한 보상"과 최소한의 "노동조건"이 마련된 상태에서 보육교사로서의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가, 그들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대우는 적절한가, 또는 그들이 자신속의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장치가 어떻게 마련되어 있는가를 동시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육체적 폭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폭력, 언어적 폭력, 제도적 폭력, 경제적 폭력, 구조적 폭력, 종교적 폭력, 상징적 폭력등 다양한 종류의 폭력들에 대한 인식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서 확산되어야 한다고 나는 본다. 노골적인 육체적 폭력에는 민감하면서, 그 육체적 폭력 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다른 종류의 폭력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한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행한 폭력성을 자신속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묵인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러한 폭력의 사회가 되는 것을 방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 스스로 이러한 폭력과 인권유린의 직.간접적 공범자가 됨으로서 폭력의 반복성속에 무수한 생명들의 삶을 짓밟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인간 속에는 "신성"과 "악마성"이라는 매우 상충적 성품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 패러독스적 인간이해속에서 보자면, 어떠한 특정한 정황속에서 소위 "선한 품성"을 작동시키는가, 또는 "악마적 품성"을 작동시키는가는 한 개별인의 책임적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개인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제도와 구조들, 그리고 가치체제들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의식이 우리 사회에 자리잡아야 한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1월 20일(화)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1월 20일(화)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