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김명혁 목사, 25일 오산 초대교회서 설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원로)는 오는 1월 25일 오전 오산에 소재한 초대교회에서 설교를 전한다. 아래는 설교제목과 설교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오산 초대교회(2015.1.25) 엡4:22-32
설교문
제가 2010년부터 매년 한 번씩 오산 초대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축복이 윤종호 목사님과 오산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윤종호 목사님이 작년에는 "세월호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작년 5월 18일 여기 와서 "세월호를 통해서 주시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새롭게 살자”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7년 동안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목회자들이 부탁하는 제목의 설교를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국교회 앞에서, 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방문하는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설교를 준비하곤 했는데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들이 저에게는 매우 귀중하고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들이 되곤 했습니다. 오늘 20 여명의 신자들이 있는 아주 작은 오산 초대교회에 와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도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재부터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첫째로, 우리 신자들의 삶 속에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과 고전15장에서 이 세상에는 대표적인 두 사람이 존재하는데 한 사람은 죄를 범한 인류의 조상 아담이고 또 한 사람은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둘째 아담 예수님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모두 아담이 범한 원죄를 몸에 짊어지고 즉 “옛 사람”의 모습을 몸에 지니고 평생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흘린 대속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으면서 즉 “새 사람”의 모습을 몸에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말씀을 읽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롬5:17).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고전15 장 말씀을 읽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15:45,47). 결국 우리 신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 속에는 “옛 사람”인 아담의 흔적과 “새 사람”인 예수님의 흔적이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세력과 의의 세력이 함께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이 짊어지고 살게 된 고통스러운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신자들이 짊어지고 살게 된 이 고통스러운 운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 속에 공존하는 죄악의 세력과 함께 의의 세력을 함께 지니고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고통스럽게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악의 세력과 전쟁을 치르는 자기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여기 “곤고한 사람” 이란 말은 영어로는 “wretched man”인데 “저주 받을 사람” 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죄악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부정적인 말들을 총 동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주 받을 곤고한 사람” 이란 말과 함께 “만물의 찌끼” 라는 말과 “죄인 중에 괴수” 라는 부정적인 말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3).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저는 9년 전인 2006년 9월 14일 새벽 강변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절망적으로 묘사한 처절한 죄 고백에 깊은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글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글이 뉴스파워에는 9월 14일에 실렸었고 국민일보에는 9월 21일에 실렸었는데 그 글을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읽으면서 가슴과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눈물이 내 가슴과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처절하게 죄를 고백한 사람이 정말 사도 바울 자신이었을까. 일부 성서 학자들은 그 죄 고백이 사도 바울 자신의 죄 고백은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나 일반 죄인의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성서학자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은 사도 바울의 죄 고백이라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중생한 자의 영혼도 범죄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나는 오늘 새벽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한 마디 한 마디 읽으면서 “어쩌면! 어쩌면!” 하면서 나 자신도 감동에 떨며 탄식하고 있었다.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가, 그의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갔던 가장 큰 능력을 지녔던 사도가, 어떻게 그런 처절한 죄 고백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과 목이 메어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이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4,18,21,24).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 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종교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다.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란체스코).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지금 우리는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했던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 의인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 보는, 너무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메마른 나의 가슴에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의 수 백분의 일이라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길선주 이성봉 김치선 목사님들이 지니셨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을, 나도 가슴에 지니면서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원한다. (2006.9.14)』 이것이 제가 9년 전에 눈물로 쓴 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옛 사람”의 흔적과 “새 사람”의 흔적을 함께 지니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비극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절망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들 속에 거하는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에서처럼 야곱처럼 삼손처럼 다웟처럼 가롯 유다처럼 베드로처럼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것이 우리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천사들처럼 죄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산다면 우리들은 교만해지고 하늘까지 높아지려고 하는 위태로운 존재들이 되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천사가 교만해져서 사탄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14:12에 나오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역사적으로는 교만했던 바벨론 왕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는 교만했던 천사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사야14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읽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5). 이 말씀은 누구든지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서 높아지려고 하면 음부에 빠치우는 저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영적인 교훈을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무서운 지옥의 저주를 선언하시기도 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사실 자기의 쥐꼬리만한 선을 자랑하는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들보다 더 위태로운 존재들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주 넘어지는 죄인들이 오히려 덜 위태롭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에 쌓인 바리새인의 기도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다음 죄인인 세리를 귀하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4).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우리 신자들이 우리들 속에 거하는 죄악의 세력과 싸우느라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때로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하는 것이 우리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에게는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한 경험이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에게도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고 넘어져서 절망한 경험이 오히려 필요하고 유익한 경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너무 이상한 복음이고 너무 이해하기 힘든 역설적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고통스러운 영적인 전쟁을 치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비극적인 일이고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통곡하고 울면서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받고 또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렇다고 맨날 죄악의 세력에 패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롬6:1에서 이렇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결국 사도 바울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셋째로, 우리 신자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는 일입니다. 여기 “벗어버린다”는 말은 “내어버린다” “없애버린다” 또는 “죽여버린다” 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을 죽여버리는 처절한 영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우리 몸에 가득한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는 일이 너무너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영적인 전쟁을 평생토록 계속해서 치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26,27).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날마다 죽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처절하게 치르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겼다는 영적 전쟁의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리고 디모데와 우리들을 향해서 영적인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라고 분부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 영적인 싸움을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도다”(힘12:4). 사도 바울은 딤후3:1이하에서 우리들의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돈을 사랑하는 것과 자긍하며 교만해 지는 것과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과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운 것과 쾌락을 사랑하는 것 등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죄악의 세력과 싸우고 죄악의 세력에서 돌아서라고 권면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이와 같은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죄악에서 돌아서기 위해서 금욕주의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쉬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적인 훈련을 받도록 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손봉호 교수님은 정욕과 세속화와 방종과 위선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보다는 중세 수도원의 모습이 났다고 지적했습니다. 저도 이와 같은 지적에 공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엡4장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권면했습니다. 옛 사람을 내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죽여버리면서 새 사람을 옷 입듯이 입으면서 살라고 권면하면서 네 가지 종류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네 가지 종류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 구체적으로 권면했습니다. 
첫째는 거짓을 버리고 참 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4:25). 옛 사람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속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귀는 거짓을 좋아하고 속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 사람은 진실을 좋아합니다. 솔직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좋아하시고 솔직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보다 거짓과 속이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합니다. 깊이 반성하여야 할 부끄러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새로운 삶을 살려면 거짓을 버리고 죽이면서 진실해지도록 노력을 하여야 하고 솔직해지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짓된 믿음과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소망을 내어버리고 진실한 믿음과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소망을 지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짓은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죽입니다. 진실은 자기를 살리고 이웃을 살립니다. 진실과 솔직을 지닐 때 우리는 울면서 회개도 하고 이웃을 끌어안고 울게도 됩니다. 거짓을 지닐 때 우리는 위선자가 되고 남을 비난하고 정죄만 하게 됩니다. 
둘째는 분을 내거나 품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분을 장시간 품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분을 장시간 품으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되고 해가 지도록 품으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시편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8). 옛 사람은 분을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귀는 분을 내는 것을 좋아하고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새 사람은 참는 것을 좋아하고 온유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는 것을 좋아하시고 온유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사도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하면서 인내와 온유를 강조했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1,12). 분을 품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마귀에게 넘어가기가 쉽고 참고 온유함을 지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가게 되고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인내와 온유함을 지닐 때 이웃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끌어 올리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셋째는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도적질한다는 것은 물질과 명예와 권리에 대한 탐욕을 품고 그것을 쟁취하려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부터 물질과 명예와 권리에 대한 탐욕을 지니고 도적질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앞을 떠나 놋 땅에 거하면서 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그 후손들은 두 아내를 취했고 수금과 퉁소 등 악기를 만들었고 날카로운 동철로 기계와 무기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벽돌과 역청으로 성과 대를 하늘에 까지 닿게 하는 바벨탑을 쌓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한이 없습니다. 작은 예수라고 불리던 장기려 박사님은 인간의 탐욕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했는데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인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인지 모릅니다. 자본주의적인 맘몬이즘이 세월호의 참사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부귀영화를 버리고 가난하고 검소하게 그리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던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고난은 나의 스승이라고 고백 하면서 청빈과 무소유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짊어지고 청빈과 무소유와 착함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님과 신앙의 선배들을 닮으면서 탐욕을 버리고 가난과 고난을 사모하면서 제 손으로 수고하면서 사랑과 선한 일을 힘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는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우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습관과 인격과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사도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권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엡 4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성경은 마음과 중심을 중요하게 보지만 동시에 입술의 말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들이 말 한 마디를 잘못하므로 성령님을 탄식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말 한 마디를 잘 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름다운 말 다섯 마디를 자주 하자고 “미언 오언: 고미사뭘보”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도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아름다운 말은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뭘 해 드릴까요?” “보고 싶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들이 더러운 말을 함부로 하므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마귀를 기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격에 피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말을 조심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으라고 권면하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30절)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악들인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벗어버리고(31절) 선의 리스트인 인자와 긍휼과 용서를 나타내면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32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0-32). 여기서 인자와 불쌍히 여김과 용서를 강조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형식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구체적인 종교이고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이론의 종교가 아니고 삶의 종교입니다.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실천적인 종교입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인격적인 삶의 종교입니다. 세상과 유행을 따라가는 종교도 아닙니다.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성공지향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과 고난을 귀중하게 여기는 종교이고 청빈과 무소유를 귀중하게 여기는 종교이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착함을 강조하는 삶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를 존경하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존경하고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합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권면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옛 사람의 흔적인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처절한 영적인 전쟁을 계속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의 처절한 영적인 투쟁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의 처절한 영적인 전쟁이 우리들의 영적인 전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사도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을 받아드리면서 거짓을 버리고 참 된 것을 말하기를 힘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분을 내거나 품지 말고 인내와 온유를 지니고 살기를 바랍니다. 도적질하지 말고 선한 일을 힘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선한 말을 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모든 악의를 벗어버리고 인자와 긍휼과 용서를 나타내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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