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2월 초 한국 신학계의 대표적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에서 본지는 토착화신학의 1세대라 불리는 그의 신학과 삶의 궤적을 조명하며 한국 신학의 어제와 오늘을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봤다. ⓒ사진=지유석 기자 |
이인기 국장(문): 황해도 남천에서 출생하셨는데, 험난한 한국사의 격량을 겪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항간에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셨는지요?
유동식 교수(유):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외출하기가 힘이 듭니다. 밤에 외출하거나 시내에 나갈 때는 교인들이 나를 데리러 와요. 최근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봤는데 <국제시장>은 못 봤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과거이니까 그 영화의 내용은 알고 있지요.
문: 혹시 625동란 중에 피난을 오셨나요?
유: 아니요. 황해도에서 국민학교 때 춘천으로 이사를 왔지요. 그 대신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갔고 학병으로 2년간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구마모도에서 학병으로 있었어요. 약 20여명이 끌려갔는데 반은 중국으로 보내고 반은 남양으로 보내게 되었거든요. 그때 중국으로 갈 사람들은 갔는데, 남양으로 갈 사람들은 폭격 때문에 출발을 못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못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문: 이렇게 역사적 체험과 관련하여 질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토착화 신학의 기저에 역사적 체험의 특이성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신학적 사고가 역사와 현실과 신앙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유: 그렇지요. 역사를 이야기하니까 말하는데 나의 인생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사적 경험은 내가 체험한 구원과, 그리고 외적으로 815해방, 625동란 두 번다 죽을 고비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을 받았던 일입니다. 모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체험한 경우에 해당해요.
구원을 역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내가 겪은 초월적 체험이 나의 신학을 구성하는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적인 입장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난으로부터의 초월, 혹은 승화가 내 신학의 동기였다는 말입니다.
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체험을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독특한 경험은 실로 중요하다. 유동식 교수 역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높이 사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방적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유: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초월적인 체험이 나의 인생 이력에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리를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알려주었지요. 우리 세대는 민족적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거든요? 그 열등의식이 현실이었고 그러한 열등의식 때문에 초월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 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크리스천인줄 알았어요. 나는 3대째 기독교인입니다. 어릴 때 조부모님과 살았는데 조부모님들은 예배보고 기도하는 것이 생활이었지요. 조그만 시골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늘 반복되니까 그것이 생활인 줄 안 겁니다. 동네 아이들이 교회에 안 가는 것이 이상해 보였어요. 신앙생활 자체가 나의 성장환경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을 겪고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나는 유아세례 받고 난 뒤 공식적인 절차로서 신앙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문: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상황이라면 딱히 핍박을 경험한 것은 아닐 텐데,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이 신학을 공부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말씀이신지요?
유: 우리 세대는 민족적인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어요. 나는 일제시대에 학창생활을 하면서 1937년까지는 조선어를 한 시간 배웠는데, 그 이후에는 그 시간을 없애고 교련을 시키더니 창씨개명을 시키고 우리말을 못하게 하더군요. 거기서 오는 반발심도 있었지만 민족적인 열등의식이 더 컸습니다. 집에서는 장손이라서 떠받들려 살았는데 밖에 나오니까 그 민족적 열등의식은 나의 전 존재를 압박했어요. 그 당시에 이런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까가 나의 화두였습니다.
당시는 취직을 잘하려면 과학을 전공해야 했는데 연희전문에 가서 과학 공부를 했었지요. 그러다가 적성이 안 맞아서 고민하던 중에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대상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문: 일본 동부신학교에서 신학을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 네, 1943년에 동부신학교에 입학했지요. 전시에 동경에 있던 아오야마, 명치, 일본, 루터 신학교가 동부신학교로 통합되었습니다. 관서, 동지사를 합쳐서 서부신학교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입학하기 전에 성경과목에 자신이 없어서 신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미술을 해볼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미술에 자질이 있었거든요. 미술에 뛰어났던 동생으로부터 예술은 고난을 승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도 현실의 고난을 극복할 방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적 열등의식과 전쟁 통의 규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신학과 예술에 모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문: 실존적인 고민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하셨군요? 이것은 토착화 신학의 문제와 관련 있는 듯 들립니다. 젊었을 때부터 ‘토착화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감신대학보에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란 논문을 게재해 일명 토착화 논쟁을 일으키셨지요?
▲유 교수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유 교수는 일제 강점기 하에 조선인으로 살았던 데서 비롯된 "열등의식"도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설명해 주목을 모았다. ⓒ사진=지유석 기자 |
유: 그것은 두 번째 열등의식과도 관련 있습니다. 625를 겪고 1956년도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갔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미국에 가보니까 문화자체가 기독교적이더군요. 그러니까 또 하나의 열등의식이 내 속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말도 모자라고 글쓰기도 모자라고 늘 소외된 처지였거든요. 거기서 그야말로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지요.
미국에서 기독교문화적인 소외감 혹은 열등의식이 닥쳐오게 되자 요한복음에 달라붙었지요. 배화학교 종교주임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요한복음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었는데, 문화적인 차원에서 복음서를 읽어보니까 요한복음이 탈유대주의적인 헬레니즘의 틀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불트만을 한국에서는 읽을 수는 없었는데, 미국에서 존 매커리(John Macquarrie) 성공회 신부가 하이데거와 비교하면서 불트만 신학개설서로서 집필한 『실존주의 신학: 하이덱거와 불트만 비교 연구』(An Existentialist Theology: A Comparison of Heidegger and Bultmann, 1955)를 발간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니까 눈이 확 트였지요. 그후 나는 불트만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열등의식에 시달렸기 때문에 토착화 신학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이지요.
문: 그러면 토착화 신학의 근거는 요한복음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유: 그렇지요. 기원후 90년이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을 죄인, 혹은 바리새인으로 취급했단 말입니다. 민족적인 한계를 벗어난 해석학적 토대가 거기서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에요. 우리역사도 잘 모르고 우리말도 못 썼으니까. 그래서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 토착화 신학의 해석적 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63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보세이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단기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주제는 종교간의 대화였고 주 강사가 폴 틸리히였어요. 그때 2주간에 걸친 강의를 받으면서 나름대로 토착화 신학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쓴 책이 『한국종교와 기독교』 (1965)입니다. 그 이후로 선교적 과제로서의 토착화를 주제로 논문을 썼고 그때부터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당시로서는 교수님의 논문이 큰 반향을 일으켰겠습니다?
유: 그랬었지요. 진리는 하나인데 민족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요지의 반박이 주류였어요. 결국 불트만의 해석을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단 시비도 일었지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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