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6일(목) 헌법재판소(헌재)는 간통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찬반양론의 논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 무분별한 성적 행위에 대한 무책임과 방종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는 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악법은 폐지시키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본지 2월28일자 기사 “간통죄 위헌 결정, 기독교계도 찬반 엇갈려” 참조). 간통죄가 성적 방종을 제재하거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연약한 지위에 있는 여성들의 보호막이 된 점 등을 부인할 수 없기에 간통죄의 폐지가 끼칠 사회적 영향력이나 효과에 관한 논란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린 이상 헌재의 결정 자체에 대해 재심의를 요청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위헌결정이 내려진 이상 간통은 범죄가 아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간통죄 폐지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보다는 간통죄가 없어진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더 경각하여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사실, 간통죄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간통이라는 개념의 행위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간통은 양심의 순수성을 더럽히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며 인간성을 유린할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는 행위로서 잔존하고 있다. 간통이 양심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이유는 간통자가 위선적이거나 이중적인 행태를 자발적으로 취하고 그 행태를 합리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라고 경고했듯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그리고 일단 간통 사실이 노출되면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간통죄가 존치되었더라도 이 피해는 줄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형법상 유책배우자를 간통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혼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가정의 파괴와 관계의 단절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성이 유린되는 경우는 간통의 당사자가 간통자라는 낙인 때문에 사회적으로 사망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상태에서는 회개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가능성마저 소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
이 같은 간통의 개인양심적, 인간관계적, 인권적 여파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자』에 통찰력 있게 묘사되어 있다. 『주홍글자』는 목사 아더 딤즈데일과 간통을 저지른 여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이야기를 다루며 간통의 과정보다는 그 결과에 대한 주인공들의 대응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한다. 여 주인공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색 A자를 평생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 ‘주홍글자’는 그녀의 사회적 사망을 알리는 표지와 다르지 않다. 그것으로써 그녀는 사회적인 기피인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백주대낮에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에 대해 유대인들이 돌로 쳐죽일 기세로 그녀를 에워쌌던 일은 그러한 사회적 사망이 순간적이며 급박하게 몰아닥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인간성이 이미 사회적으로 삭제되고 없는 상태였음에도 헤스터는 허드렛일을 하면서 묵묵히 그 상태를 견딘다. 한편, 간통의 상대편인 딤즈데일 목사는 자신의 간통을 처벌하기 위해 압박해 들어오는 헤스터의 남편의 모습에서 처벌하려는 사회의 얼굴을 보았고 그러한 압박이 “인간 심정의 존엄성을 냉혹하게 유린해왔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죄보다도 더 “검다”고 판단하였으나, 결국 죄책감에 시달리다 소진되어 죽어버리고 만다. 이처럼 주인공들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간통은 결국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 따라서 간통은 당사자를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에 끼치는 여파를 고려해서라도 처벌을 하는 것이 옳다. 간통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자신의 존재 자체와 사회에 끼친 피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통죄가 적용되던 동안에는 그 죄목이 명목상으로라도 책임을 부과했지만, 현재는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중혼죄 등을 신설하는 문제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이 또한 사후대책이기 때문에 간통의 발생을 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법으로는 양심의 손상까지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교회는 간통죄 위헌결정에 대한 사회법적 대안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성도들이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자신들의] 마음을 지키[기]”(잠언 4:23) 위해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 5:28)라고 말씀하신 것도 마음을 지킬 것을 권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현재 간통을 저질러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그 일을 끊도록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이 경우 딤즈데일 목사처럼 죄책감에만 싸여있게 되면 간통자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말 것이다. 마음이 “생명의 근원”(잠언 4:23)인데 그 마음을 죄책감으로 옥죄면 생명의 근원이 말라버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회개를 할 양이면 헤스터처럼 하게 해야 한다. 그녀는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통사건 이후 실행한 회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죄의 낙인을 받아들이고 소위 ‘죗값’을 치른다. 인격살인을 당하며 사회적 사망을 선고받은 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딤즈데일 목사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고, 삯바느질 등의 허드렛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딸을 키우는 동안 다른 사람을 돕고 곤란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베풀었다. 물론 처음에는 거부와 저주가 되돌아왔지만, 마침내 기나긴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그녀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통하게 되었다. 아마 예수 앞으로 끌려왔던 간통녀도 유대판 헤스터 프린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요한 8:11) 않고 ‘변화’된 모습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헤스터를 다른 사람으로 인식했다. 한참 지난 뒤에 그녀가 목에 걸고 있던 주홍글자 A는 어느새 ‘간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Angel), 혹은 ‘뭐든지 척척 해내는’(Able), 혹은 ‘귀족 같은’(Aristocratic)을 의미하는 글자로 이해되었다. 그녀는 ‘변화’된 것이다. 이것이 회개한 자, 거듭난 자의 표상이다.
이제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진 즈음에, 신앙인들은 사회법적 제재장치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간통이 죄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의 의무를 다할 마음을 다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철저히 회개하여 다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결단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간통죄는 간통을 저지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을 회복시키며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할 기회를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법적인 조처가 사라졌다고 해서 이런 기회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당사자는 이미 죄를 지었으며 사회에 피해를 끼쳤다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사회는 정죄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러한 자의식을 더 공고하게 만들 따름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신앙인들이 마음을 지키며 그 마음의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자세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인간 심정은 제재 수단의 유무와는 별개로 마음을 지키려는 선택을 하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찾기 때문에라도 존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