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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노트] 무수한 선택들과의 대면

강남순·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강남순 교수 ⓒ베리타스 DB
1.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수한 선택과 결단을 알게 모르게 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눈을 뜨는 순간 부터 ,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들과 우리는 늘 대면해야 한다. 독일인 비행조종사가 자신만이 아니라 150여명의 사람들의 생명까지 함께 죽음으로 모는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끔찍한 폭력과 증오와 살상을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독일 비행사의 '선택' 이야기를 뉴스로 들으며, 그 끔찍한 선택 이야기를 지우고 싶어서 일까...다른 종류의 '선택'에 대한 최근 이야기를 떠 올린다. 나의 학생의 '선택,' 그 선택 앞에서의 선생인 나의 '선택,' 그리고 그 학생과 내가 함께 한 '공동의 선택' 이야기이다.
2. 이번학기 "데리다 세미나" 를 듣는 한 학생이 지난 주 밤 늦게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제 봄방학을 막 끝내고, 이번 학기가 5주 밖에 안 남은 이 시점에 이 과목의 등록을 취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내게 알려는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이메일을 보낸다며, 그 동안 이 과목을 좋아하고 즐겼다는 것도 기억해 달라는 것으로 이메일은 끝났다. 나는 이 이메일을 받고서,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 대학 문화에서는 '성숙한' 어른들인 대학원생이 그러한 결정을 하면, '알았다. 알려주어서 고맙다' 하는 한 줄의 회신을 보내는 것이 상식적 대응이다. 그냥 그렇게 해 버릴까 하다가, 한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왜 학기 초도 아니고, 이제 5주밖에 안 남은 시점에 등록을 취소하겠다는 것인가. 데리다가 너무 어려워 '지적 좌절'이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선생으로서 "지적 상담 (intellectual care)"을 해주어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3. 그는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공부하는 전형적으로 성실한 학생이었다. 매주 제출하는 독서저널도 빠지거나 마감시간을 넘겨서 제출한 적도 없었으며, 수업시간에 자신이 이해 못하는 것을 늘 솔직히 드러내며 열심히 배우려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일까. '알았다'고만 하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나는 그에게 등록을 취소하기전에 나와 한번 만나자고 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을 보낸 후에, 학교 시스템에 들어가 보니, 그는 이미 등록을 취소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학교 인터넷 시스템에서 등록취소를 하고 나서, 내게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이미 취소했는데, 나와 만나려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바로 회신을 했다. 만날 시간을 내어 준다니, 고맙다고-- 그래서 우리는 오후에 데리다 세미나가 있는 날, 아침에 시간약속을 했다.
4. 그가 내 연구실에 와서 앉은 후 처음 하는 말-- 교수로부터 '먼저' 만나자고 하는 이메일을 받은 것은 자기의 대학원 공부하는 과정에서 처음 이라고. 그래서 굉장히 놀랐고, 기쁘기 까지 했다고. 그와 마주 앉아서 나는 '왜 등록을 취소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를 잠시 바라본 후, 우선 나는 내가 박사과정하면서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을 '그만 두겠다'는 생각과 씨름했어야 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별로 커다란 의미를 못 느끼는 것 들이 '나중에' 그 의미를 보게 되는 경우가 이 삶에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로 우리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 '데리다' 과목은 지금은 당신이 그 의미를 못 느껴도, 나중에 이 과목에서 배우는 개념들, 분석적 시각들에 대하여 참으로 고마워할 때가 있을 것이다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설득'의 도구를 동원하여 '재고' 할 것을 이야기 했다. 당신이 이 과목을 듣든 안 듣든 내게는 별로 문제가 아니지만, 당신의 삶의 여정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임이 당신에게는 안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벌써 '보인다'는 엄포(?)의 분위기가 도는 언설과 함께.
5. 내 차례가 끝나고, 그 다음은 그가 말할 차례였다. 그는 육체적으로 부분 장애가 있는 부인과 살아가면서,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면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말문을 열었다. 그의 미래 꿈은 대학에서 교수가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성적을 '완벽'하게 받아야 하는데, 이번 학기 과목이 어렵게 느껴져서 자신이 받아야 할 그 점수를 제대로 받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해 졌다고 한다. 한 시간 반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환한 미소로 내게 '고맙다'고 하며 내 연구실을 나갔다. 그리고 등록 취소한 것을 다시 되돌려 놓기 위해 나도 교무담당자에게 이메일을 하나 보내어야 했고, 그도 이런 저런 조치를 하고서, 그날 오후 수업에 '정상적으로' 들어왔다. 늘상 앉던 자리에 동일하게 앉아서 들어오는 선생을 미소로 맞이해 주는 그를 바라보니, 기분이 참으로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내 얼굴에 가득해 졌다. 이 미소의 정체를 다른 학생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도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을 모르고 있으니, 이제 그 학생과 나 만이 함께 공유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해피엔딩으로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선생일을 하는 것의 보람을 크게 느낀 날이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선택들과 대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그와 나는 이러한 '선택'에서 함께 만나서 다시 '공동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언젠가 그도 이제 학교를 떠난 후에도 이 날의 '선택'을 기억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6. 미국과 한국 뉴스속에서 만나는 세계 곳곳의 비극적 소식들이 이 주말에 주는 우울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마 내 학생과 있었던 '즐거운' 이야기를 꺼내는가 보다. 슬픔과 기쁨, 비극과 희극, 어두움과 밝음, 우울함과 즐거움은 각기 반대가 아니라, 서로가 나선형처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얽혀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매 순간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속에서 만들어 가는 선택들을 하는 것--살아있음의 '존재의 선물'을 가진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리라.
오늘도 살아있는 이들이 대면해야 하는 물음: 
'나'는 오늘 어떠한 '선택'들을 할 것인가.

※ 본 글은 강남순 교수가 3월 28일 자신의 페이스북 노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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