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략적 가치를 통해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이 결코 골칫거리나 딜레마가 될 수 없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3월30일(월) 열린 재외공관 회의 개회사에서 한 발언이다. 최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 도입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서 신경전을 벌인 일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우려스럽다. 사드가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의 주요 변수라면 AIIB는 부상하는 중국의 경제패권을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묘하게도 미·중 양국의 실무급 책임자가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찾아 각자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했다. 문제는 미·중 양국의 이해각축에서 한국 정부의 존재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먼저 중국으로선 사드의 배치 논의가 불편하기 그지없다. 명분은 북한의 안보위협이지만, 사드가 실제로 배치될 경우 중국마저 사정권에 들어갈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해서다. 이 경우 한-미-일과 북-중-러 3각 동맹 사이의 대결구도가 구축될 가능성도 높다. 이에 15일(일) 방한한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部長助理)는 드러내놓고 사드 배치에 우려를 표시했다.
한편 미국으로선 중국의 경제패권이 여러모로 경계대상이다. 특히 중국이 꺼내든 AIIB 카드는 미국 중심의 세계 금융질서에 내민 도전장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 미국의 유력신문인 <뉴욕타임스>는 19일(목) “[AIIB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의 ‘축’을 아시아에 두겠다고 약속한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드 이슈를 먼저 꺼내든 장본인은 정부 여당인 새누리당 소속 몇몇 의원들이었다. 계기는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의 피습 사태였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사태 직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사드를 끄집어냈다. 사드 배치가 중국의 심기를 자극할 민감한 쟁점임을 감안해 본다면, 정부 여당 의원들의 이런 움직임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경솔했다.
백보 양보해 일부 의원의 일탈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적극 진화에 나서서 중국을 안심시켰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총대는 국방부가 매고 나섰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17일(화) “만일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에 관해 미국 정부가 결정해서 협의를 요청해올 경우 군사적 효용성, 국가 안보이익을 고려해 우리 주도로 판단하고 결정할 계획”이라며 중국에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외교 채널을 통해 우려를 표시한 사안에 대해 국방부가 나서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모양새여서 이 같은 입장 표명이 적절한 것인지도 실은 논란거리다.
외교마저 해바라기 처신 일관
AIIB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더더욱 의아스럽다. 중국은 AIIB 가입을 적극 권유했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의 권유를 받아들이자니 미국 눈치를 봐야했고, 거절하자니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은 AIIB 가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가입 결정이 마치 야반도주하듯 이뤄졌고, 이에 대해 미국의 입김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하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러브콜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윤병세 외교장관에 따르면 ‘그렇다.’ 윤 장관은 앞서 언급했던 재외공관장 회의 개회사에서 “최적의 절묘한 시점에 AIIB 가입 결정을 내림으로써 국익을 극대화한 것은 물론 모든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바깥의 시선은 다르다.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은 24일(화) “[한국정부가] AIIB 가입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반영한다. 현 박근혜 정권이 유지하고 있는 끈끈한 대중관계는 미국과의 외교 동맹과 양립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로, 한국의 총수출의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근혜 정권은 임기 3년 내내 무능으로 일관했다. 이 와중에 외교부는 비교적 말썽 없이 중심을 잘 잡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윤 장관의 이번 발언은 외교부라고해서 현 정권의 무능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더구나 윤 장관의 이번 발언이 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31일(화) 청와대 특보단·참모들과 첫 합동 오찬을 한 자리에서 “언론 등에서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 끼었다고 큰일 났네 하는데 너무 그럴 필요는 없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발언 내용은 윤 장관과 대통령 사이에 교감이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일단 외교부는 부인하고 나섰지만 뒷맛은 영 찜찜하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지정학적 민감성으로 인해 주변 강대국이 벌이는 이해다툼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다. 이런 한반도의 운명은 21세기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고, 한반도는 자칫 잘못하다간 이 둘의 패권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높다. 그런데 현 국가 원수는 이런 흐름을 냉철하게 인식하기보다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하고, 외교를 책임지는 수장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권력자의 심기를 먼저 헤아린 처사를 보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내 정치에서는 국가 원수의 제왕적 통치와 고위 공직자들의 해바라기식 처신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외교 무대에선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3년 차, 국가 기강이 거의 붕괴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외교마저 무능을 드러내니 이 나라의 운명이 우려스럽다. 후세 역사가들이 2015년 이 나라의 역사를 복기하면서 고위 공직자들의 권력자 눈치 보기로 인해 국정은 혼란을 거듭했고 결국 국권마저 상실했다고 적을까 두려움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