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제주 4·3사건, 그리고 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

정치권력 이동 따라 비극의 의미 윤색되는 일 없어야

▲폴 그린그래스가 2002년 연출한 <피의 일요일> 포스터.

1972년 1월30일, 이 날은 북아일랜드 데리시 시민들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시민들은 영국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는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자 영국은 공수연대 제1대대를 투입해 진압을 시도했고, 시민 13명이 사망하는 유혈참극이 벌어졌다. 이를 일컬어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라고 한다.  
사실 북아일랜드의 불만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국은 1922년 런던 조약으로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을 허용했다. 그러나 영국계 신교도들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겼다. 이후 가톨릭이 압도적인 아일랜드계는 이등시민 취급당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이들은 영국에 불만이 누적될 대로 누적된 상태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무력으로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피의 일요일’ 당시 진압을 주도했던 주요 지휘관들은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1980년 5월18일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날의 슬픔을 기억하는 태도는 너무나 판이하다.   
전두환은 5·18을 발판으로 권력을 집어 삼켰고,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준동으로 폄하했다. 그러다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광주의 비극은 재평가됐고 민주항쟁으로 의미가 격상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들어 광주의 비극은 다시 한 번 폄훼되기 시작했다. 종편 언론에서는 노골적으로 광주 민주항쟁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보도를 내보냈고, 5·18 기념식에선 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말라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제주 4·3사건 역시 판박이다. 이 사건은 2년 뒤 벌어질 한국전쟁의 전주곡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사건은 1948년 4월 3일,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게릴라 조직들이 각지의 경찰지서를 습격한데서 시작됐다.   
당시 제주도 민심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농사는 흉작이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군정 당국이 지나칠 정도로 징발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약 6만 명의 동포가 일본에서 돌아왔다.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에는 유력자의 자제와 유학생들이 많았고, 이들을 매개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폴 그린그래스가 2002년 연출한 <피의 일요일> 포스터.

4·3사건 전에 형성된 사회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투쟁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50여 년 간 ‘불순세력의 준동’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당시의 복잡했던 전후맥락은 한국전쟁 직후 첨예하게 형성된 이념 갈등으로 인해 싹둑 잘려나갔던 것이다. 
2014년에 맞은 4월3일은 의미가 각별했다. 사건 발생 66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국가 원수는 기념식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뚜렷한 해명도 없었다. 다만 현 정권의 지지기반인 보수세력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관측만 팽배할 뿐이었다.  
비슷한 비극, 너무나도 판이한 복기 방식  
반면 ‘피의 일요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재조명돼 왔다.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한 폴 그린그래스는 2002년 <피의 일요일>(원제: Bloody Sunday)을 통해 시간을 되돌린다.   
이 영화는 사실 극영화다. 그러나 연출자인 폴 그린그래스는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할 정도의 사실적인 연출로 그날의 비극을 재현해 낸다. 특히 핸드헬드 카메라의 흔들림을 이용해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영화의 긴장은 말미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건 희생자들의 이름을 차례로 호명하던 민권운동가는 “북아일랜드의 민권투쟁은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외친다. 이어 엔딩 크레딧에는 “북아일랜드의 갈등으로 인해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자막이 흐른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은폐해왔다. 그러다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12년에 걸쳐 ‘피의 일요일’ 사건을 재조사해 새빌 보고서를 냈다. 뒤이어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총리는 2010년 6월 해당 사건을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에 사과했다. 정치적으로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 수차례 있었다. 1998년 미국의 중재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 타결된데 이어 2002년엔 신교도측(유니오니스트)과 구교도측(신페인)이 자치정부 수립에 합의한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가 2002년 연출한 <피의 일요일> 포스터.

폴 그랜그래스의 영화 <피의 일요일>에서 영국군 공수부대 장교는 시위대를 ‘극렬분자(Hard Core Hooligan)’라고 비하한다. 이승만 정권이 단정에 반대한 제주도민을, 그리고 신군부가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매도한 일이나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러나 영국과 북아일랜드는 정파를 초월해 “중무장한 군인이 비무장시민을 향해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그 날의 비극을 복기해 냈다. 진보·보수라는 진영논리에 따라 4·3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심지어 보수를 참칭하는 부패세력이 광주의 비극을 공공연히 훼절하는 이 나라의 현실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더구나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다만 일부 보수단체가 4·3사건 희생자 재심의를 문제 삼고 있다는 지적만 언론을 통해 보도됐을 뿐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록그룹 U2는 1983년 란 곡으로 그날의 비극을 노래했다. (이 곡은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엔딩 타이틀곡으로 쓰였다.) 리드보컬 보노는 이 곡에서 연신 ‘No More’를 외친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보노의 절규처럼 군이 민간인을 향해 총탄을 쏘는 비극이 북아일랜드에서든, 제주에서든, 광주에서든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이동에 따라 비극의 의미가 재평가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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