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토)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시민들이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시민들은 경찰의 연행에 대비해 삼삼오오 스크럼을 짰다. ⓒ사진=지유석 기자 |
서울 광화문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참사 1주기이던 4월16일(목) 이곳에서 노숙 농성을 했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시행령안’(이하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선체인양에 대해 정부의 확답을 받을 때까지 농성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러자 경찰은 유가족들을 버스로 에워쌌다.
우선 광화문 도로 앞을 버스로 가로 막았다. 건너편 광화문 광장 도로변도 경찰버스로 가로 막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광화문 광장을 구획별로 나눠 차단막을 쌓았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은 장벽이 쳐졌다. 차도는 경찰 버스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경찰은 시청방면 쪽 도로변 역시 버스를 세워 놓았다. 그리곤 유가족들이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이 같은 조치에 강하게 반발했다. 유가족들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시민들의 도움을 호소했다. 이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속속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경찰은 물리력을 동원해 막기에만 급급했다. 광화문 정문 쪽 유가족들 가운데 ‘유민 아빠’ 김영오 씨 등 16명은 18일(토) 오후 연행됐다. 이 모습을 본 유가족들 일부는 황급히 광장 쪽으로 빠져나온 다음, 경찰 차벽 앞에 앉아 ‘연행자 석방,’ ‘시행령 폐기,’ ‘세월호 온전한 선체인양’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시민들도 합류했다.
경찰은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며 거듭 해산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은 삼삼오오 스크럼을 짜고 경찰의 연행에 대비했다. 이들은 “유가족을 지켜달라”며 근처에 있던 시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시민들 가운데에는 가톨릭 수녀, 수도사, 개신교 목회자도 있었다. 박인환 안산화정교회 목사도 거리로 나왔다. 박 목사는 “우리 교회 출석하던 ‘예은이’ 엄마(박은희 전도사)와 아빠(유경근 ‘4.16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가 3일째 노숙 중인데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나”고 했다.
▲18일(토)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시민들이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시민들은 경찰의 연행에 대비해 삼삼오오 스크럼을 짰다. ⓒ사진=지유석 기자 |
유가족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한 유가족은 “우리를 모두 죽일꺼냐?”고 따졌고, 다른 유가족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들의 학생증을 경찰에게 보여주며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아이 낳고 살지 말라”며 분을 토해냈다. 물리력을 동원해 해산에 급급한 경찰에 대한 성토도 이어졌다. 한 시민은 “난 세월호 참사와 관련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시민들을 경찰이 찍어누를 수는 없다”고 외쳤다. 현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각 언론사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유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특히
오후 5시쯤 세종대왕상 앞쪽이 술렁였다. 몰려든 시민들이 차벽 철거를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이때 경찰은 물대포를 발사했다. 시민들은 오히려 더욱 거세게 경찰을 밀어붙였다. 학생들이 선봉에 섰고, 결국 경찰 장벽은 뚫리고야 말았다.
오후 9시가 되자 시민들과 경찰이 격렬하게 대치했다. 시민들은 장벽으로 세워놓은 경찰 버스를 부쉈다. 경찰은 물대포와 켑사이신으로 응수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후 10시30분 경 시민들은 차벽을 뚫는데 성공해 유가족들과 만났다. 경찰도 차벽으로 고립시킨 유가족들을 풀어줬다. 그러나 경찰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시민들을 무더기로 연행했다. 인터넷 언론 <팩트TV>는 경찰이 79명(남 66명, 여 13명)을 연행해 금천, 성동, 마포, 노원, 서초, 강남, 송파 경찰서로 분산 이송시켰다고 전했다.
4.18집회, 불법 과격시위일까?
▲18일(토) 서울 광화문 일대는 경찰 버스로 인해 요새로 돌변했다. 경찰은 광화문 광장을 구획별로 나눠 장벽을 설치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광화문 광장에서의 시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월호 참사를 국론분열의 빌미로 이용하려는 불순세력들의 준동일까? 경찰은 정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했을까? 경찰과 시민의 격렬한 대치는 선동세력들이 주도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세월호 참사로 되돌아가야 한다. 18일의 상황, 아니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즈음해 벌어진 상황들에 대한 답은 참사 발생 시점에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는 단순 해상사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정은 해경 등 관계 당국이 기민하게 대처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 당국은 우왕좌왕했다. 구조에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사고 현장을 방문한다는 이유로 모든 관계 공무원들이 의전에 매달리는 광경도 연출됐다. 또 다시 구조를 위해 쓰여져야 할 소중한 시간(골든타임)이 낭비된 것이다. 이러는 사이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던 세월호 탑승객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초동대처가 미흡했다면, 사후수습이라도 제대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후수습 역시 총체적 부실이었다.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순수한 유가족’ 운운하며 진상규명 요구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이후 우리 사회는 특별법을 두고 홍역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진영논리가 개입했다. 인터넷에선 유가족을 조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왔고, 극우단체 주도로 정부의 세월호 대처 미흡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종북’으로 낙인찍는 일도 횡행했다.
진통 끝에 세월호 특별법이 정치권에서 합의됐다. 그러나 정부가 지난 3월 느닷없이 시행령을 입법 예고하면서 여론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어 일방적으로 보상안을 발표했다. 유가족들은 즉각 반발했다. 특히 정부의 보상안 발표에 대해 “유가족을 짓밟는 행위”라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18일(토) 서울 광화문 일대는 경찰 버스로 인해 요새로 돌변했다. 경찰은 광화문 광장을 구획별로 나눠 장벽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차벽은 성난 시민들에 의해 무참히 뚫렸다. ⓒ사진=지유석 기자 |
현재 유가족들은 정부를 불신한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태전개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불신은 정부가 자초했다고 봐야 한다. 비단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다. 대통령의 미국 순방 중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잇따른 인사 실패, 정윤회 국정개입 등등 현 정부는 출범 이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1주기 당일 대통령은 시행령안 폐기와 선체 인양에 대한 이렇다 할 입장표명 없이, 원론적인 수사만 늘어놓고 남미 순방길에 올랐다. 놀랍게도 대통령은 첫 방문지인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어로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망각은 어렵다”고 말했다. 1년 동안 세월호 문제를 거론조차 하기 꺼려했던 대통령이 한 말이라고 사뭇 믿어지지 않는 언사였다.
대통령의 현란한 수사와 대조적으로 경찰은 유가족과 시민을 향해 엄청난 규모로 공권력을 행사했다. 18일(토) 하루 동안 동원된 병력만 13,700여 명, 차량 470여대에 이른다. 이런 조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날 경찰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뚫린 사태는 경찰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수위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경찰은 책임을 시민들에게 떠넘기는 모양새다. 경찰은 19일(일) 오후 경찰청 브리핑을 통해 이번 집회를 ‘4·18 불법·폭력 집회’로 규정하고 “시위 주동자와 극렬 행위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전원 사법처리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옛 이집트의 산파들은 파라오의 명을 거스르면서까지 히브리 아이들을 살렸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최고위층의 지시가 내려졌어도, 경찰이 상대하는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유가족들이다. 공권력 집행도 인륜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경찰의 각성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