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1981년에 첫 기념식이 거행된 뒤 1991년에는 법정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이 날은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어 왔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 및 개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날 비오는 길거리에서 항의성 시위를 하는 처지가 대변하듯이 여전히 열악하다. 이는 법 제정이나 제도개선으로도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저해요인이 우리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의 메인 홈페이지는 그 요인을 “우리의 편견으로부터 장애는 시작됩니다”라는 체험적 발언을 통해 적시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그들이 겪는 모든 불편의 깊은 뿌리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대학교 교육학과 정은 교수의 논문, “비장애학생들의 장애에 대한 인식조사에 나타난 장애현실 조망”(2005)에 따르면, 장애인에 대한 대다수 학생들의 인식이 여전히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 하는 사람’에 머물고 있다.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의 반응이 편차를 보이지 않는 점은 그러한 인식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보편적이라면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반응이 우리사회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드러나야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거지,’ ‘바보,’ ‘무서운 사람,’ ‘불결한 사람’ 등의 이미지와 연결하면서 그들을 우리사회의 소외자로서 배제하는데 문제가 있다.
▲지난 201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장애인주일 연합예배에서 시각장애인 조동교 목사(예장총회 장애인복지선교협의회 초대회장, 가나안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장면. ⓒ베리타스 DB |
물론, 이러한 편견이 우리사회만의 고질적인 성향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장애는 사회적 소외의 중요한 이유였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나는 장면은 장애인이 일상생활 가운데 범상하게 만날 수 있는 존재였음을 알려준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장애가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를 논하면서 장애인들을 의도적으로 소외시켰다. 장애를 운명이나 저주로 인식하는 편견이 이러한 행태를 부추겼던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므로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의 몰골을 폭로하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러한 편견을 교정해준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9: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장애가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통로라고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곧,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인데, 그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한9:4)고 언명한 대로 예수를 따르는 성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는 일이 성도의 의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도가 그 편견을 씻어내고자 할 때 장애의 치유가 성취된다는 것을 몸소 구현해보이셨다. 그 맹인에게는 침을 뱉어 이긴 진흙 같은 편견이 발려져 있지만 그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 연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을 때 눈을 뜨게 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성도가 그 편견의 진흙을 씻어내는 실로암 못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이적은 오늘날 교회가 장애인에 대해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장애인들에 대해서 일반사회와 다름없이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서 시혜성 원조만으로 그 의무를 갈음하고 있다면, 장애를 갖지 않아서 피안에 서 있는 자의 자기중심성을 실현할 따름이다. 행사성으로 시혜를 베푸는 행위의 진실성 여부를 거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열등한 위치에 두고 시혜를 베푸는 태도가 마치 ‘밤처럼 아무도 일할 수 없게’(요한9:4) 만드는 조건을 형성함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9:5)이라 칭하셨듯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으로서 편견의 어둠을 물리쳐야 한다. 교회는 장애인들도 ‘나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개발할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도는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하자.) 위의 조사결과에서 나온 대로 장애인을 ‘나와 똑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반응이 허위의식이 되지 않도록 교회는 실로암 못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교회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한9:41)는 질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