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감정(Harmonious Feeling)”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베푼 국빈만찬에서 읊었던 하이쿠 구절이다. 아베 총리의 방미는 미·일 신밀월 시대를 열었고, 오바마 대통령의 건배사는 달라진 미·일 관계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일 신밀월 시대의 서막은 ‘미-일 방위협력지침’(이하 가이드라인)의 합의일 것이다. 미·일 양국 외교·국방장관은 현지시간으로 4월27일(월) 미국 뉴욕에서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2+2회의)를 가진 뒤 새 가이드라인에 최종 합의했다. 이번에 합의된 가이드라인의 뼈대는 자위대의 미군에 대한 후방지원활동을 일본 주변에서 전 세계로 확대하는 것이다. 미·일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새 가이드라인은 미-일 동맹이 평화유지활동과 해상 안보, 병참 지원 등 일본법과 규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적절한 어느 곳에서나 국제 안보에 더 큰 기여를 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가이드라인 합의를 통해 고조된 분위기는 아베 총리의 미 의회 연설에서 무르익었다.
우리로선 이런 광경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가 현지시간으로 29일(수)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보여준 이중적인 태도는 경악스럽다. 아베 총리는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서는 “일본과 일본국민을 대표해 지난 전쟁에 쓰러진 미국의 여러분들의 영혼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린다”며 한껏 고개를 숙인 반면, 한·중을 겨냥해서는 “자본과 기술을 헌신적으로 쏟아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다”고 강변했다. 물론 위안부나 난징에서 저지른 대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일 양국이 합의한 새 가이드라인 역시 불편하기 그지없다.
사실 새 가이드라인의 내용 자체는 새롭지 않다. 미·일 양국은 이미 지난 1996년 체결된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에서 “미·일 양국은 일본 주변에 사태가 발생해 미군이 출동할 경우 일본 자위대가 미군에 대한 후방지역 지원, 즉 물품과 용역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새 가이드라인은 일본 주변으로 명시된 지역적 제한을 없앴을 뿐이다. 그럼에도 파장은 만만치 않다. 아베 내각은 지난 해 7월 집단적 자위권 행사 추진을 공식 의결하면서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위상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해 왔었는데, 미국은 새 가이드라인에 합의하면서 일본의 움직임을 승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새롭지 않은 미·일간 신밀월 관계
결론부터 말하고자 한다. 미·일간 신밀월은 한국 외교의 실종과 실패다. 미·일 양국이 지나온 발자취를 되짚어 보면 한국 외교의 실패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은 사실상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들려했고, 신호탄은 앞서 언급했던 ‘미·일 신안보 공동선언’이었다. 이때 집단 자위권, 일본 자위대의 미군 후방지원, 그리고 가이드라인 등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의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의 일본 편향은 더욱 노골화됐다. 미국은 테러, 그리고 중국의 부상에 따른 불안정을 명분으로 세계전략 재검토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한 단계 격상했다. 미·일 양국은 2006년 5월 <주일미군 재편 최종보고서>를 채택했다. 3년 반 동안의 협의 끝에 합의된 이 보고서의 핵심 골자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발맞춘 미-일 동맹의 ‘진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일체화’ 촉진이다. 공교롭게도 이 보고서는 지금으로부터 꼭 9년 전, 그리고 이에 앞선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은 19년 전 체결됐다. 즉, 아베 방미를 계기로 합의된 미·일 새 가이드라인은 20년 가까이 이뤄진 미·일간 전략적 협력관계의 산물인 셈이다.
이 시기 동안 한국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 미·일 신안보공동선언은 한반도 위기상황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물론 ‘일본 주변’이라고 모호하게 했지만 이 낱말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을 의미함은 명백했다. 다행히 이 시기 한국 정부가 ‘햇볕정책’을 내세워 북한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었기에 미·일 양국이 가정하는 불안상황은 최악의 시나리오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남북관계가 급랭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남북 관계의 급랭은 결과적으로 미·일 협조체제에 명분을 실어준 셈이 됐고, 이 결과 한국은 미·일 군사 협조체제의 하위 연결고리에 편입될 처지에까지 내몰렸다. 즉, 한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민감성을 슬기롭게 활용해 주변 4대강국의 이해를 주도적으로 조정하기보다 국내정치적 판단에 따라 한반도에 긴장 국면을 초래했고, 자연스럽게 미-일과 중국이 대결하는 신냉전 구도 형성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우리의 외교를 책임지는 외교통상부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 외교부는 30일(목)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이번 아베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통해 주변국들과의 참된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식도, 진정한 사과도 없었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식민지배 및 침략의 역사,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참혹한 인권유린 사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주변국들과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교부 성명은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요구한 기존 우리 정부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정도에 그치면 다행이다.
언론 보도를 들여다보면, 외교부나 국방부 모두 미·일 새 가이드라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방부의 고위 당국자는 “미·일간 가이드라인은 군사적 성격의 문서라기보다는 정치적 성격의 의미가 더 있다. 일본이 이 지침을 토대로 국내 안보법제를 개정하고 군사적 수준의 작전계획으로 만들 때 우리의 입장이 더 관철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고, 외교부의 한 당국자는 “새 가이드라인이 제3국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존중을 분명히 한 점을 강조하며 우리 정부의 ‘강력한 요청’이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지난 20년간 미·일 양국이 새로운 안보환경에 맞는 군사협조 체제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감안해 본다면, 외교부나 국방부의 태도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더욱 한심스럽다. 윤 장관은 5월1일(금) 오전 국회에서 열린 ‘외교·안보 대책 당정협의’에서 미·일 방위협력 지침 개정으로 한반도의 안보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의 사전 동의 없이는 어떤 경우도 자위대의 우리 영토 진입이 불가능하다”며 “한 점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지난 20년간 미‧일 양국이 새로운 안보환경에 맞는 군사협조 체제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감안해 본다면, 윤 장관의 발언은 안이함의 극치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한반도에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시켰다. 2015년 아베의 방미를 계기로 무르익은 미·일 신밀월 관계는 여러모로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닮은꼴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밀실에서 이뤄진 것과 달리 이번엔 미·일 양국이 드러내놓고 패권을 추구한다는 것뿐이다.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여 표류하다가 국권상실의 치욕을 겪었다. 지금 역시 미-일-중-러 등 주변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다. 지배층들이야 이런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힘 있는 쪽에 붙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어서다.
역사는 슬기롭지 못한 외교에 따른 피해가 국민의 고통으로 귀결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