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에서의 14년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케냐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미였다고 말한 이 교수는 교회 건축 헌금 말고도 교회의 운영을 위한 헌금 방식도 인상 깊었던지 헌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밥도 가져오고, 옥수수도 가져오고, 감자도 가져오고, 어떨 때는 양 새끼를 가져오기도 했지. 돈이 없으니 현물로 교회에 가져오는 기라. 그렇게 헌물을 받은 교회는 그것을 교회 내에서 장터를 열어 팔고, 헌금으로 바꿨지. 가끔씩 초대를 받아 교회 강단에 설 때면 영어로 전한 내 메시지를 통역관이 키쿠유(kikuyu)족 언어로 통역했을 했어. 교인들이 영어에 많이 서툴렀지”
▲ 이장식 교수가 케냐의 현지인 교인들이 보내온 기념품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 ⓒ김진한 기자 |
- 교수님의 케냐 선교가 교육자로만 섬긴 국내 사역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신학교 교수로서 30년을 넘게 재직하면서 한번 도 경험해 보지 못핫 색다른 경험을 해봤다고 할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그야말로 인간미가 넘치고, 펠로우쉽이 넘치는 풍유로운 목회 현장의 맛을 본 기라. 케냐로 떠나기 전 내가 교수로 재직하기까지 간직했던 꽤많은 책을 도서관에 기증한 뒤로는 학문에 더 정진하는 것을 멈췄지. 그런데 케냐 신학교 교육자로 있으면서 너무 많은 변화를 경험했고, 자서전을 쓰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2001년도 인가 팔순을 기념해 자서전을 내기도 했지.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있는 교회로 보낸 편지들을 묶어 ‘40편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란 책도 발간을 했어”
이 대답을 하고나서 이장식 교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는데 케냐의 한인 선교사들에 관한 얘기였다. 이장식 교수가 케냐에 선교사로 파송될 당시 에큐메니컬 펠로우쉽 차원에서 장로교, 감리교 등 교파를 초월한 한인 선교사들의 모임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조직을 갖추지 못한터라 모임의 성격이 친목회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장 선교사 출신은 2명이었어. 60∼70여 명의 교단이 서로 다른 선교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펠로우쉽을 가졌어. 모임에선 보통 케냐 선교의 비전을 나누며 서로 용기를 복돋아 줬지. 그러다가 선교사 수가 늘어나니 조직화가 필요했던 모양이야. 그 사이 누가 주도권을 지냐를 두고, 잡음이 일기도 했어. 교파 사이의 알력이라고 할까”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갈라졌나요?
“그렇지는 않았어. 케냐 선교사들을 면밀히 관찰하니 그 중에서 단연 내가 노익장에 속하는기라. 그래서 기장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몇몇 선교사들의 중재를 맡게 됐지. 중재를 하는데 별 것도 아니는 것 가지고 싸우는 기라. 교파 사이에 협력이 잘 안된다는 분위기를 얼릉 알아차렸지. 어렵게 중재를 해놓고, 선교회 조직을 구성하게 됐어”
▲ 박동근 선생이 케냐에서 온 편지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고 있다 ⓒ김진한 기자 |
- 교수님도 어떤 직책을 맡으셨나요.
“아닌게 아니라 내가 나이가 제일 많다고 나보고 초대 회장을 해달라는 기라. 나보다 수십년 먼저 와서 선교를 하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예의가 아니라며 급구 사양했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선교회를 조직했어. 그래서 그런지 그때부터 이 초교파적인 친교 모임은 별다른 잡음 없이 잘 운영됐지. 케냐 선교사들 간 우애가 무척 끈끈했어.
선교사들 중에는 우리 집에도 자주 찾아와서 선교 소식을 전해 서로간 큰 힘을 주고 받으며 갔지. 참 재미있게 지냈어. 지금도 가끔씩 케냐에서 편지가 와서 뜯어보면 아니나 다를까 케냐 선교사들의 기도 편지야. 우간다, 탄자니아 선교사들이 특히 그립네”
이장식 목사의 말대로 그의 방에 들어서자 방 벽에는 온통 편지들로 가득했다. 이 편지들로 방 벽의 빈 공간 보다 채워진 공간이 더 많았다. 케냐에서 보내온 편지들이었다. 이때 마침 가만히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던 이장식 교수의 아내 박동근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지 하나 하나를 지목하며 언제 어디서 보내온 편지였는지를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이장식 교수를 중심으로 조직된 이 케냐 선교회는 교파를 초월한 모임으로 매년 케냐 선교회 세미나를 열고, 선교사들간 케냐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다.
- 14년 간의 케냐 생활에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전혀. 어쩌면 내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내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해 준 나날들이었지. 명퇴를 한 뒤로 한산 했던 내 삶에 하나님이 감동적인 선물을 주신기라”
▲ 광명의 집 앞에서. 이장식 교수 부부는 한사코 말렸음에도 먼길까지 기자를 배웅해 주었다 ⓒ김진한 기자 |
2005년도에 귀국한 뒤 이장식 교수 부부는 이곳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 소재한 광명의 집에서 줄곧 생활해 왔다. 은퇴한 목회자 부부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어 외롭지만은 않다고 했지만, 젊은 사람과의 만남이 못내 아쉬운 듯 보였다.
박동근 선생은 “케냐에 있을 때 젊은 신학생들과 자주 만나면서 대화해서 그런지 노인들보다 젊은이들과 대하는 게 더 편하다”고 말했다. 종종 찾아오라는 말도 남긴 이장식 교수 부부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니 한사코 먼길까지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