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법봉은 살인무기일까? 쓰기에 따라서다. 법과 정의에 따라 공정한 판결이 내려진다면, 법봉은 신성한 도구로 의미가 격상된다. 그러나 사악한 정치논리에 따라 사법적 판단이 내려질 때, 법봉은 인간의 영혼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흉기로 전락한다.
제리 콘론 사건은 영국 사법사상 최악이라는 오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리 콘론은 아일랜드 출신의 한량에 불과했다. 그는 친구와 런던으로 놀러갔다. 마침 이때 런던 교외 길포드 주점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졌다. 영국 경찰은 황급히 용의자 검거에 나서, 제리 콘론, 폴 힐, 패트릭 암스트롱, 캐롤 리처드슨 등 이른바 ‘길포드 4인방’을 체포했다. 이들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오로지 그들이 테러 발생 지점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고, 보다 중요하게는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중요한 이유였다.
영국 경찰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신문을 통해 이들의 자백을 받아낸다. 신문 과정에서 증거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영국 경찰과 여론은 희생양을 요구했고, 아일랜드 출신 건달 제리는 손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제리로서는 억울했지만 도무지 혼자만의 힘으로 경찰당국과 사법당국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조용히 잊혀질 것 같았던 ‘길포드 4인방’은 15년 뒤인 1989년 세상으로 나왔다. 제리의 변호인인 피어스 변호사는 제리의 심문 기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영국 경찰이 의도적으로 제리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거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제리의 구명에 나섰다. 영국 법원은 재심을 통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토록 어려운가?
제리 콘론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재구성해 1993년 『입증된 무죄』를 펴냈다. 아일랜드 출신 짐 쉐리단 감독은 이 소설을 곧장 영화화했다. 그 작품이 바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댄 포슬스웨이트, 엠마 톰슨 주연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원제: In the Name of Father)였다. 그러나 제리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트라우마를 좀처럼 극복하지 못했다. 술과 마약에 손대는가 하면, 수차례 자살까지 시도했다가 결국 2014년 6월, 생을 마감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 대해 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무려 24년만이다. 이 사건은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노태우 정권이 검찰·법원을 동원해 무고한 개인에게 누명을 씌운 대표적인 사법살인 사건이었다. 정권이 국면전환을 위해 한 개인의 인생을 파멸시켰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 사건이 민주화 운동 이후인 1991년 버젓이 자행됐고, 사건을 담당했던 주역들은 출세가도를 질주했다는 점은 허탈감마저 자아내게 한다. 가히 한국 사법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기억될 만하다.
문제는 이 같은 사법살인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검찰과 국정원은 탈북자인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몰았다. 이 과정에서 온갖 불법과 탈법이 자행됐다. 검찰은 중국 정부의 출입국 기록마저 조작을 시도했다가 언론 보도로 들통나 체면을 구겼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강기훈 씨는 무죄 확정에 대해 “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이제 역사적 판단과 책임이 필요한 때가 됐다. 당시 저를 수사했던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제가 유서를 쓰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왜곡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길포드 4인방’ 사건에 대해 2005년 2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는 성명을 내고 “가족들이 겪은 상실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들이 겪은 시련과 부당함에 사과를 표한다”고 했다. 그러나 강기훈 사건을 담당했던 판·검사들은 사과 한 마디 없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남기춘 변호사는 한 언론과의 접촉에서 “사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미안하다’하고 말하기가 제일 어렵다”(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는 엘튼 존의 노랫말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강기훈, 201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