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21세기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외압 논란 속 개봉된 <또 하나의 약속>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한 장면. ⓒ스틸컷

구약성서에 기록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약자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소재로 인용돼 왔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성서의 전승에 머무르지 않는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정부와 기업의 힘은 커졌고, 이와 반비례해 개인의 힘은 날로 왜소해져만 갔다. 정부와 기업이 권력과 자본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릴 때 한 개인이 맞서기는 너무나도 벅차다. 그러나 다윗이 돌팔매 하나로 골리앗을 때려 눕혔듯 종종 한 개인이 정부와 기업의 횡포에 제동을 거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유미 씨의 사연을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골리앗과도 같은 거대 기업에 맞선 개인의 힘겨운 싸움, 그리고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승리의 기록이다.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한상구(박철민)는 딸 윤미(박희정)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국내 최고의 기업인 진성 반도체에 당당히 합격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취업을 위해 집을 떠나는 딸에게 소주 한 잔을 권한다. 딸도 아빠가 주는 잔을 단박에 비운다. 
2년 후, 딸은 백혈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 회사 측에선 위로금을 건네주며 아버지와 딸을 달랜다. 아버지의 힘겨운 싸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회사 측은 합의를 종용한다. 아버지는 백방으로 딸의 사연을 알리려 하지만 거대 기업 앞에선 역부족이다. 
카메라는 아버지의 힘겨운 싸움을 묵묵히 지켜본다. 무조건 “대기업은 나쁘다”는 식의 당위론적 도덕률에 따른 가치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단, 영화는 노동 상담사 유난주(김규리)를 통해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에게서 희귀병 발병률이 높고 이 점은 비단 진성 반도체라는 회사에 국한되지 않은 현상임을 알려준다. 미국 실리콘 밸리의 반도체 노동자들에게도 이미 희귀병 발병 사례가 보고됐고, 이에 반도체 산업은 한국, 대만 등 제3국으로 이전됐다는 말이다. 한편, 회사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평생 몸담은 직장에 쉽게 등 돌릴 수 없는 직원들의 심경도 상세히 묘사한다. 이런 요소들은 사회고발 영화가 빠질 수 있는 함정, 즉, 기업의 부도덕성에만 초점을 맞춘 선정적인 고발을 훌륭하게 비켜간다. 
삼성과의 싸움은 여전히 진행형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한 장면. ⓒ스틸컷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인 황상기 씨는 2011년 6월 서울 행정법원으로부터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딸의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5년여의 긴 싸움을 통해 얻은 작은 승리다. 그러나 황 씨의 승리는 의미가 작지 않다. 우선 한국 최고라 자부하는 삼성과의 싸움이었는데다 산재인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IBM에서도 직업성 암, 백혈병이 보고된 적이 있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IBM 노동자들의 암 사망률은 일반인 집단과 비교해 뇌암은 4배, 다발성골수종은 6배, 유방암은 2배에 달했다. 그럼에도 IBM은 “암 발병과 작업 환경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노동자들에게 입증책임을 요구했다. 
영화에서도 법원은 입증책임을 피해자들에게 요구한다. 이러자 아버지 한상구는 재판부를 향해 간절히 호소한다. 
“저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이 재판정에서 무슨 얘길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제 딸내미가 일하던 공장에선, 그냥 암도 아니고 백혈병 환자들이 참 많이 생겼어요.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요, 술 취해서 돈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그 사람들 좇아가서 잡으면 뭐이라 하는지 알아요? 돈 냈다고, 아저씨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잡아떼요. 그러면서 돈 안 낸 증거를 내 놓으라는 거예요. 회사나 공단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산재 신청을 하면요, 우리한테 그 증거를 내 놓으래요. 영업 비밀이라고 자료도 내놓지 않고, 작업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우리한테 증거를 내 놓으라는 법이 세상에 우데 있어요? 근데요, 우리한테 증거 있어요. 여기, 여기, 또 여기, 또 저기, 여기 병든 노동자들의 몸, 가족 잃은 사람들...이게 우리의 증거에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요?”   
황상기 씨의 힘겨운 싸움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삼성은 반도체공장 작업환경과 관계없는 개인 질병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다 산재인정 판결을 받은 노동자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또 하나의 약속> 역시 골리앗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상영관을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배급사 측은 “당초 300개 상영관 개봉을 목표로 했으나 100개관도 확보하지 못했다”며 “개봉 영화 중 예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고 관객 평점이 9.8~9.9점(10점 만점)으로 높은 데도 복합상영관에서 적은 스크린을 배정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메가박스는 상영관수를 15개에서 3개로 줄였다. 영화 개봉이 어려움을 겪는 배후엔 삼성의 외압이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한 나라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거대 기업과 마주쳤을 때 개인은 왜소해 보이기 일쑤다. 그러나 다윗은 돌팔매 하나로 골리앗을 때려 눕혔다. 작고도 작은 개인이 부도덕한 거대 기업 혹은 정부와 맞서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에겐 ‘진실,’ 그리고 ‘정의’라는 돌팔매가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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