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오는 21일 ‘죽도록 충성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며’란 제목으로 동산교회에서 설교를 전할 예정이다.
아래는 설교문 전문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죽도록 충성하면서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우리 죄인들의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복음 전파도 주님의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평양 사문밖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10살 11살 때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가장 귀중한 신앙은 “주일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 신앙이라는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주일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받아드리면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계2:10을 본문으로 “죽도록 충성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며” 라는 제목으로 순교자들의 귀중한 신앙을 기리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 신앙”을 기리어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길을 제일 먼저 걸어간 사람이 스데반 집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되기 위해서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받으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가슴과 입에서는 자기를 향해서 이를 갈며 돌을 던지는 악독한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와 ‘저주’가 쏟아져 나오는 대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증언만을 쏟아 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그리고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한 사죄의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결국 핍박자 사울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안디옥에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세계선교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죽도록 충성한 순교”의 길은 참으로 놀라운 길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축복의 길이 되었고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의 길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순교 신앙”을 기리어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길을 그 다음에 걸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 세상의 유익하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고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수 많은 “수고”와 “핍박”과 “위험”을 당했다고 길게 나열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고후11:23).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고 예수의 십자가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사도 바울은 철두철미 자기 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길을 걸어간 “십자가와 죽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와 죽음”의 길 때문에 로마 시대에 살던 수 많은 악독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그 후에 폴리캅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들도 “고난”과 “핍박”과 “순교”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기리어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하시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가 1938년 2월에 1차 검속되었고 1938년 8월에 2차 검속되었고 1939년 8월에 3차 검속되고 1940년 9월에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시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 산정현교회로 달려가서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한 다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고백적인 기도와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에는 순교적인 각오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충성과 헌신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살고 천 년 살면 무엇합니까?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하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 각오가 있을 뿐이올시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하시면서 하늘 나라에 가서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너무너무 귀중한 한국교회의 목자이셨습니다.
넷째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기리어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릴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나중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계2:10 말씀을 붙잡고 감옥에 붙잡혀 가서 온갖 고초를 당했으며 마지막에는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시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선생님으로 삼으면서 사셨고 주님을 위해서 “죽기를” 소원하면서 사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순교의 길을 걸어가시기 전에는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자기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보다 더 사랑하려고 하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 아들로 삼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고 자기를 총살한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시다가 숨을 거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총살한 공산당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하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닮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가난”과 “고난”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처럼 한국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너무너무 귀중한 한국교회의 목자이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고 또 드릴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보다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전에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든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시곤 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인데 지금은 사람들의 소리를 중계하고 있다고 지적하시기도 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죽으심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스데반 집사님과 사도 바울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못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죽으심의 길”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기리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저의 홈 페이지에 올렸는데 그 글이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김영한 박사님이 그 글을 읽으시고 긍정적인 독후감을 써서 뉴스파워에 실었습니다. 독후감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2015년 2월 9일) 뉴스파워에 실린 김명혁 박사님의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의 글이 눈에 띄어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교계 지도자요 나에게 신앙적 모범이 되고 계시는 선배 목회자요 신학자인 그분의 부친이 어떤 분이었을까 평소에도 자주 이름을 들어왔기에 호기심에 사로 잡혀 집필을 멈추고 바로 읽어 내려갔다. 읽어가면 갈수록 빨려 들어갔다. 일제하 그리고 해방직후 공산당 치하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공산정치 참여 반대 그리고 성수주일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옥고를 치르고 동료인 강양욱 목사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박해와 더불어 생명의 위협이 있는 북한을 떠나서 남쪽으로 도피하는 것까지 마다 하신 김관주 목사님의 순교적인 신앙의 삶이야말로 오늘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진정한 영적 유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필자께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하는 장면은 눈에 이슬을 머금게 한다. 드디어 11살의 필자께서 신앙의 박해가 있는 북한을 떠나서 남한으로 가겠다는 그 장면은 당시 북한 기독교 가정이 당한 고통과 이별과 박해가 가시화되면서 읽는 자의 가슴이 뭉클함을 억제하지 못하도록 한다.』 『평양의 외각 사동탄광에 갇힌 아버지를 만난 11살 소년 필자는 ‘아버지 나 남조선 갈래요!’ ‘남조선?’ ‘여기선 도저히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또 공부도 안 되요.’ ‘남조선에 가서 마음껏 예배도 드리고 공부도 하고 싶어요.’ ‘거기서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그래, 그러려무나. 어린것이 오죽 했으면… 그래 너만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만 있다면 야 …… ’ 탄 가루로 까맣게 된 아버지의 얼굴 위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명혁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를 본 것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도.” 이 대목은 읽는 자에게 깊은 영적이고 인간적인 감동을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늘날 신앙과 덕행에 있어서 균형 잡힌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김명혁 박사가 있게 한 원형적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지도자들이 나태하여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이루어온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그저 자신의 종교적 안일을 위하여 소모하고 있지나 않는가? 이런 가운데 김명혁 박사의 글은 초창기 한국의 청교도적 기독교 지도자의 순교적 삶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교회 후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너무나 값진 영적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2015.2.09)』 이것이 김영한 박시님이 쓴 독후감입니다. 사실 오늘 저녁 저의 아버지의 순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부탁한 분이 김영한 박사님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이란 제목의 글을 3분의 1 이하로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14페이지 분량으로 글을 썼는데 4 페이지 정도로 줄여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진실하게 목회 하시다가 1950년 6월 23일경 45세에 순교하신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 김관주(金冠柱) 목사님입니다. 아버지는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 558번지에서 안주 동교회 김현하 영수님과 김정숙 권사님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성리학의 학문을 중시하던 유교 가정에 시집 와서 남편과 아들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준 분은 주일 성수와 산 기도에 전념하며 온 동네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한 김정숙 권사님이었습니다. 나의 할머니의 신앙으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어 영수가 되었고 두 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이 장로가 되었는데 맏아들인 나의 아버지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의학 전문을 나온 여의사와 결혼을 해서 1937년 6월 4일 나를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동경신학교를 마친 후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일본에 들려서 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신의주 제이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부목사로 나중에는 담임 목사로 9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목회 일에 바쁘셨을 뿐 아니라 신의주에 계실 때나 평양에 계실 때 주로 감옥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신의주에 있을 때 아버지가 이따금씩 나를 칭찬해 주던 모습이 눈에 아물거립니다. 무엇을 물어보시면 내가 대답을 하곤 했는데 대답을 아주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나는 신의주 감옥에 갇혀있던 아버지를 뵙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감옥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치의 양보도 없이 절대 반대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뵙지 못하고 감옥 담장 밖에서 목소리를 돋우어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쳐 아버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 나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시라고 목 소리를 돋우어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46년 5월까지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 하시다가 1947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소련이 참여하는 정치에 협조할 것을 강요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자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이끄는 기독교 민주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습니다. 공산정권은 결국 협조하지 않는 아버지를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체포해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데려가서 강제 노역을 하도록 처리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사동 탄광을 찾아가곤 했는데 죄수 복을 입으신 아버지를 몇 번 만나 뵌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사동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동료 죄수들의 존경을 받고 간수들의 신임을 받는 모범 죄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신앙적인 감화를 은은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을 실제로 받았습니다. 내가 평양 제5 인민학교를 다닐 때 일요일 날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벌을 서고 정학까지 당하면서도 주일 성수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은 아버지의 신앙적인 감화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서문밖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의 가르침을 나의 몸과 마음에 깊이 심어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내가 주일성수와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그 다음 달인 1948년 8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고 싶은 소원을 지니고 나는 11살 나이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어 월남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신앙과 기도의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후 목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05년 9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미상리에서 아버지 김현하씨와 어머니 김정숙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김정숙씨는 결혼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착실하게 믿었는데 불신앙의 가정으로 시집 온 후 한 평생 기도와 주일성수의 신앙으로 시집의 온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평생토록 했다고 합니다. 남편과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비가 올 때는 어린 손자(명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손자로 하여금 우산을 받혀 들게 하고 눈물의 기도를 새벽마다 드렸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을 회개시켰고 세 아들을 모두 예수 믿게 했습니다. 남편은 집사와 영수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나중에 목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집사가 되었고 셋째 아들도 나중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맏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신앙과 성격을 빼어 닮았다고 나의 사촌 형님인 김명길 목사가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때로는 안주 친할머니 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는데, 캄캄한 수요일 밤 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온 가족들이 등불을 켜 들고 논밭 길을 걸어 멀리 있던 예배 처소에 가서 수요 예배를 드리곤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의 친 할머니 김정숙 권사님은 교회 봉사에 충성을 다했는데 때로는 수요일 저녁 예배와 주일저녁 예배 때 설교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일성수에 철저했는데 주일에는 농사 일을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주일날 절대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수 때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논과 밭의 추수가 제일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또한 자녀와 손자들에게 거짓 말을 하면 하나님께 벌 받는다고 말하면서 절대로 거짓말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아버지는 기도와 주일성수의 신앙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고 그리고 강직하고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진실한 성격을 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나의 사촌 형님이 말해주었습니다. 아마 그 신앙과 성격의 유산의 일부를 나도 물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숭실 전문학교에 진학해서 공부하면서 선교사들과 친하게 사귀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동지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중간에 법학 공부를 중단하고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만이 민족을 흑암과 절망에서 건지실 분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법학에서 신학으로 옮겼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모세처럼 민족을 구하고 지키는 하나의 촛불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또한 일본에서 공부를 할 때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을 돌아보고 돕는 유학생 모임의 총무의 일을 맡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즈음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던 한경직 목사님이 일본 동경에 잠깐 들렸는데 그 때 나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것 같았습니다.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부임한 후 일본에 연락을 해서 나의 아버지를 부 목사로 초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아버지는 한경직 목사님의 초청을 수락하여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둘째로,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신의주 제이교회 출신인 김치선 박사님은 1996년 8월 24일 미국에서 나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김치선 박사님은 서울대 법대 학장과 숭실대 총장을 역임했는데 편지에서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일본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정신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지적했다. “목사님의 음성을 전화로나마 들으니 부친 목사님 생각이 나는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의 진실된 일꾼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관주 목사님께서 신의주 제 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실 무렵 저는 중학생이었으며 일본 총독정치가 점점 기독교를 탄압하고 교역자들의 목회활동을 감시 내지는 시찰을 강화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가급적 일본어를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일본 신학을 졸업하셨기에 일본어를 문법적으로 또는 발음에 있어 능하실 터인데도 의식적으로 부자유스럽게 표현하시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어로 설교와 기도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옷차림은 일요일은 물론 항상 한복을 착용하셨습니다. 심방 오실 때에도 꼭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고무신을 신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외출복으로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3월에 소생의 결혼식을 주례해 주셨으며 그때에도 한복 차림으로 수고하셨는데 매우 뜻있게 생각했습니다. 1945년 8. 15 해방이 되고 공산군의 교회활동에 대한 감시가 시작될 때 약 2개월간 중. 고등학교 성경공부를 할 때에 교회 종각(4층) 밀실에서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김양선 목사님은 그의 저서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에서 나의 아버지가 신의주와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로 민족독립 운동과 남북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실을 기술했습니다. “1946년 해방 후 첫 번 3. 1절 행사를 신의주 동교회에서 수천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김석구 목사의 사회로 성대하게 거행했는데, 공산당들이 3. 1절 행사를 극심하게 반대했다. 공산도배들은 수천 군중을 이끌고 동교회로 달려들어 성단과 성경을 훼파한 후, 김석구 목사를 끌어내어 우차에 싣고 ‘민족 반역자’ ‘미국의 주구’ 등의 극악한 문구를 목에 걸어놓고 시내를 일주하며 갖은 야유와 모욕을 가하였다. 이러한 만행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의산 노회장 김관주 목사는 공산도배의 이와 같은 만행을 남한에 알리기 위하여 동 17일 신도대회를 소집하고 성토연설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이유로 본격적인 교회탄압을 시행하였으며 지목되는 지도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 67).
『이 일로 인하여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정의를 사랑하는 의협심이 강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한경직 목사님도 그랬지만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 분노나 증오심은 품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북한 동족을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양선 목사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해방직후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당이 결성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있으나 언제나 한번은 남북통일의 정부수립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회지도자들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민주주의 정당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문제의 토의가 결정되어 앞으로 미국의 한국 독립안이 상정될 것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원안대로 결정된다면 남북통일 정부의 수립은 목척 지간의 일로 보여지므로, 김화식 목사는 김관주 황봉찬 우경천 등 다수의 동지들과 고한규 장로를 당수로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의 준비를 적극 추진하였고 1947년 11월 19일 결당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당식을 하루 앞둔 11월 18일 내무서에 탐지된 바 되어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검속 투옥되었다.” (「한국기독교 해방 십 년사」, pp. 64-65).
『셋째로,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무엇보다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성경 말씀들 중의 하나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1938년부터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부목사로 목회하였고 1942년부터 1946년까지는 담임 목사로 목회를 했습니다.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아버지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일제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끌어다 회유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절했고 그 일로 감옥으로 끌려가서 1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또 다시 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학생시절 신의주에 와서 얼마 동안 우리들과 함께 살았는데 김명길 목사는 1996년 9월 8일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일제 요시찰 인물로 설교권을 박탈당하자 김관주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의 동사 목사로 목회를 하셨다. 김 목사님의 설교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강한 어조로 명령형이면서도 호소적이었는데 그때 받은 강한 인상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배시간 30분전에는 강단 옆방에서 준비기도와 묵상으로 준비하고 있어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설교 시 애용하여 자주 인용하신 구절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인데 전 절을 다 읽으시곤 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등등이었다. 또한 애창한 찬송가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383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455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 등이었다. 김 목사님이 의산 노회장으로 피선되었을 때 소련군이 의주 교회당에 침입한 것을 인민위원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인민해방군이 무례하게 성전에 군화를 신고 침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사과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인민 정치 보위부 요원이 사택으로 들어와서 이남에서 왔다는 편지를 김목사님에게 전해주고 갔는데 이것을 빌미로 재 수감 입건하여 조사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나의 아버지는 1947년에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 목회를 했는데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잡혀갔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신의주에 있을 때나 평양에 있을 때 남한으로 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월남을 권유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주님과 교회와 양 무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평양 사동 탄광에 갇혀있을 때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아버지를 회유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나의 사촌 형님 김명길 목사가 장로교신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강량욱 목사가 사촌 형을 불렀다고 합니다. “자네에게 특별히 부탁하네. 사동 탄광에 있는 숙부를 찾아가 한 번 이야기를 해보게. 이제라도 우리와 손 잡고 일을 해 보자고 말일세. 죽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일세.” 김명길 목사는 당시의 상항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사동 탄광에 김관주 목사님을 면회 갔을 때 한번은 이런 제안을 드린 적이 있다. 내가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에게 말씀 드려서 큰 아버님을 석방하도록 건의할 터이니 나오셔서 강 목사님과 함께 손잡고 목회하시며 신학교에서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정색으로 강하게 표현하면서, 내가 강목사와 손잡으려면 왜 이곳에 와서 고생하겠느냐고 하시면서 다시는 그런 말은 입밖에 내지 못하게 하셨다.” 평양 서문밖교회 출신인 이승만 목사님은 1996년 7월 9일자로 미국에서 나에게 보낸 팩스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여러 면으로 수고 많이 하시는 소식을 늘 듣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옛날 김관주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에 새롭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말씀을 전하시던 장엄한 모습의 기억이 오늘까지도 깊이 남았지요. 제가 그때는 어렸으니까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그때의 형편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기독교 자유당 결성과 관련하여 1947년 11월 18일 평양에서 투옥되었다가 사동 탄광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48년 7월 사동 탄광에서였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빛과 소금』의 윤세민 기자는 나와의 대담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1948년 7월, 만 열한 살의 어린 소년 명혁은 평양시 외각의 사동 탄광을 찾았다. ‘예수 믿는 반동들의 괴수’로 몰려 탄광에 강제 수용돼있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를 면회하기 위해서였다. 명혁은 얼마 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교회 강단에서 힘차게 설교를 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 형형한 눈빛과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전 그대로였다. ‘아니 명혁이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요.’ ‘허허 이런 녀석……’ 아버지와 아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고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어린 명혁은 나이답지 않게 무겁게 입을 뗐다. ‘아버지 나 남조선 갈래요!’ ‘남조선?’ ‘여기선 도저히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또 공부도 안 되요.’ ‘……’ ‘남조선에 가서 마음껏 예배도 드리고 공부도 하고 싶어요.’ ‘남조선……’ ‘네. 어떻게든 갈래요. 거기서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게요. 꼭 이에요, 아버지.’ ‘…… 그래, 그러려무나. 어린것이 오죽했으면… 그래 너만이라도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만 있다면 야 …… ’ 탄 가루로 까맣게 된 아버지의 얼굴 위로 땀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린 명혁의 콧등도 시큰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를 본 것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것도.” 나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한 충성스러운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서 순교하신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의 뒤를 이어 죽도록 충성하며 주님과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시다가 평양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여기서 줄이려고 합니다. 제가 2010년 2월 1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라는 제목의 글을 서서 『국민일보』에 실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쓴 글을 그대로 옮기므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물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 때문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먼저 나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신 아버지와 사랑의 씨앗을 심어주신 어머니 때문임을 저는 평생 고백하고 또 고백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말이 아닌 고난의 삶과 순교의 죽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예배 드리고 섬기는 삶이 무엇인지를 순수하고 진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저의 이름을 ‘명혁’(明赫) 즉 ‘밝고 빛나는’ 사람이 되라고 지어주셨는데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고 빛나는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동경에서부터 유학생들 모임의 ‘총무’의 일을 하셔서 그랬는지 저도 학생 때부터 평생 ‘총무’의 일을 하면서 심부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아버지가 ‘강직’하시고 ‘진실’하셨는데, 저도 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동 탄광에 계시면서 같은 탄광에서 노동하는 죄수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베푸셔서 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저도 부족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면서 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을 저의 삶의 소원과 기도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가 계시고 어린 아들이 먼저 가 있는 천국을 늘 그리워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이런 중얼거림까지 했습니다.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어머니, 저 좀 도와주세요.’ ‘철원아, 나 좀 도와다오.’ 조만간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 뵙고 품에 힘껏 안기겠습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