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이 시온에 온다. 메시아는 반드시 온다. 그리고 우리는 전 세계에 있는 악을 물리치고 마지막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가 서로 너무 다른 데요, 목사님께서는 만약에 이스라엘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면 이런 갈등의 소지가 완화될 거라고 보세요?
▲전주화평교회 이영재 목사가 역사비평방법의 성경 읽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진=지유석 기자 |
이: 글쎄요. 기독교는 중세 때 국가와 결탁했잖아요? 국가종교가 되어서는 무서운 국가 폭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습니다. 타락한 기독교의 모습이지요. 로마시대 때부터 국교가 되는 바람에 기독교는 많이 타락했어요. 종교개혁 이후에 많이 달라졌지만, 서양의 자본주의 국가의 기독교는 사실상 국가의 하수인이 되어있습니다. 이런 기독교는 성서적 기독교가 아니지요. 성서적인 기독교는 어떠한 국가 권력이나 세상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말씀을 따르며 비폭력을 준수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교회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성서적 기독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국가의 해체와 기독교의 국가주의와의 결별이 결부된 문제입니다.
칼 바르트는 당시의 교회를 가리켜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기독교라고 표현했어요. 당시의 교회는 국가에 꽉 잡혀있었지요. 한국교회는 좀 덜한 편이지만 미국교회는 미국 국가에 꽉 잡혀있어요. 아메리카니즘 같은 것에 교회가 잡혀있죠. 독일은 독일 국가와 너무 깊게 결부되어있고, 영국국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등등의 많은 분파들이 국가와 너무 깊이 결부되어있어서 참된 평화의 일꾼이 되질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그 어느 것도 국가와 결탁된 것이 없었습니다. 유다 국가는 망했고,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전 세계로, 민중들 속으로 퍼져나간 게 기독교에요. 고통받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사이로 사랑을 갖고 퍼져 나간 것이 진짜 기독교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들이 사회적으로 종교를 통한 출세를 꾀하거나 종교를 통해 유지가 되려고 하거나 요인(VIP)처럼 대접 받으려는 행태가 보이는데, 이것은 매우 무서운 함정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권력체제와 결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문: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국가에 잡혀 있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신도들은 궁극적인 권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에 대해 늘 긴장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영재 목사는 최근 연구소를 개설했다. 목회자 성경읽기 운동을 펼치고자 함이다. ⓒ사진=지유석 기자 |
이: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는 체제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궁극적인 권위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사랑, 그것 이외에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없어요. 그 외에 덧입혀진 것은 다 비성서적이고 허위입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타협하려는 시도들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기독교를 더럽히죠. 그래서 그것과 결별하려고 하는 노력, 영적인 투쟁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너무 세상과 타협하려고 해요. 잘 살려고, 돈을 벌려고, 자식들 교육 잘 시키려고, 자식들이 출세하길 바라고... 게다가, 교회가 성장하면 마치 자기가 성공한 것처럼 생각하고... 이런 것들 모두가 타락의 양태입니다. 이런 교회들이 많아요. 은행 융자 받아가지고 교회를 크게 짓고 교회 재산도 늘리는데, 이런 것들이 함정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연구소를 하나 개설했습니다. 신약학박사 한 분과 함께 둘이서 목회자 성경읽기 운동을 펼치기로 한 겁니다. 성경 읽기의 목적은 목회자들이 성경읽기를 통해서 무소유와 청빈의 영성을 개발하고 성스럽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도 권력지향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선배 중에 민족운동을 계속하신 분이 계신데, 어느새 소위 사회적 명사가 되셨어요. 이것조차도 예수님의 뜻이 아니지요.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지양할 지혜와 영성을 성경읽기를 통해서 개발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 기독교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고, 작은 공동체들을 많이 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니까요.
문: 그러고 보니, 목사님께서는 성경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입장도 분명히 정립하고 있으실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론적인 접근법(문예학적, 역사비평적, 포스트모던적...)에 대해서 말씀해주셔도 좋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통찰을 성경에서 얻는다든지, 삶의 가치를 성경말씀을 통해 권면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든지 등의 실질적인 관점을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이영재 목사는 목회자가 역사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주석할 때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영적 메시지를 못 찾아낸다고 지적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
이: 제가 한신대학을 나왔으니까 역사비평을 공부했죠. 그 때는 재밌었어요.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계속 성경 주석을 하는 과정에 역사비평 방법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지적이고, 민중들로부터 많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역사비평의 목적은 역사를 재건하려는 것이겠지만, 성경 본문을 역사 자료로 취급하는 입장 때문에 말씀이 지닌 영성을 죽이는 겁니다. 목회자가 역사비평 방법으로만 성경을 주석하면 그 속에 들어있는 영적인 메시지를 못 찾아내요. 그게 맹점입니다. 역사의식은 점점 예민하게 발달하겠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는 역사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게 만들지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역사비평방식을 참고용으로만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주제를 찾을 때 먼저 토라 본문이 형성된 560년 이후, 즉,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이러한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해당 주일의 본문이 이해가 되면 우리 시대로 넘어와서 디아스포라의 관점으로 이 시대를 보는 것이지요. 그 당시 디아스포라들은 바빌론의 큰 도시 외곽에 있는 노예촌에서 살면서 그 도시가 가르친 이데올로기나 사상, 철학 등에 반응하면서도 신앙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여호와 신앙을 정제해갔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도 현재 대도시의 찬란한 문화 가운데 디아스포라가 되어 그 문명의 양태를 성서적으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물질 지상주의에 물들어 부패하고 타락한 세속 도성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성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처럼 역사비평을 설교의 기본적 토대로서 활용하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내가 성서적 실존으로 바뀌는 것이 중요한 일이거든요.
▲이영재 목사는 성경 본문 자체가 말씀하시는 것에 더 집중을 해야한다고 역설한다. ⓒ사진=지유석 기자 |
그래서 성경 본문 자체가 말씀하시는 것에 더 집중합니다. 성경의 본문이 성경 전체의 구조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가,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단어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등을 주의해서 살피고 그 다음에 본문 자체를 읽는 데에 집중하죠. 그러면서 본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매주 본문에서는 서너 개 정도의 주제가 발견되는데, 네 개의 본문에서 공통된 주제를 포착하면 그것을 설교제목으로 삼습니다.
문: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강조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특별히 영향 받은 신학자가 있으신지요?
이: 제게도 선생님이 계십니다. 윌리엄 존스턴이라고, 스코틀랜드의 보배이죠. 4년 동안 박사학위논문을 지도받으면서 참 존경했습니다. 그 분은 조상 대대로 목사님 집안 출신인데 정말로 성서연구 밖에 안 해요. 그리고 고대 아카드어에 대해 박식하시지요. 그 분 밑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배웠습니다. 제 안에 있는 한국적 사고와 마음 속 깊이에 자리한 민중적인 애정이 깊어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