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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 이덕주 교수 발제문 전문 1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나타난 영적 권위와 지도력 문제

이덕주 교수 ‘진정한 감리교 운동 연구’ 심포지엄서 발제
 
 
“감독회장은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이며 감리회의 행정수반으로서 감리회본부의 행정을 총괄한다.”(교리와 장정 4장 16조[81단])

지금 한국 감리교회는 큰 혼란과 시련에 빠졌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아서도 아니고 교회와 교인 문제도 아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최고 임원’인 감독회장 때문이다. 감리교회 안에 교인 혹은 목회자 사이에 문제가 생겨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감독회장이 감리교회의 최고 ‘행정 수반’으로서 권위를 갖고 문제를 풀고 해결해야 하는데 오히려 전국 감리교회 교인들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어 풀어야 할 문제의 핵심이 되어 버렸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해야 하는데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비단 오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과 사회의 창조적 변화와 개혁, 그리고 통합을 이루기 위해 본을 보여야 할 교회가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사회를 정화시키고 구원해야 할 교회가 거꾸로 사회로부터 정화와 개혁의 대상으로 비쳐지고 있으니 어쩌다 한국 감리교회가 이런 처지가 되었는가?

역시 문제는 감독회장이다.

위 교리와 장정에 표기된 대로 감독회장에게는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로서 권위와 ‘감리회의 행정 수반으로서 감리회본부의 행정을 총괄’할 책임이 부여되었다. 교회 지도자에겐 이런 권위와 책임이 동시에 주어진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순서를 말하라면 권위가 먼저고 책임은 나중이다. ‘영적 지도자’로서 권위가 전제되어야 ‘행정 수반’으로서 책임을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재 자칭, 혹은 타칭으로 거론되는 감독회장은 아쉽게도 전자(영적 권위)보다 후자(행정 책임)에 집착하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행정수반’으로서 “감리회 본부의 행정을 총괄하려고”노력은 하지만, ‘영적 지도자’로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감리교회가 이런 혼란과 시련 상황에 빠진 원인을 지금 거론되고 있는 ‘지도자급’ 인물들에서만 찾아선 안 된다. 그들을 둘러싼 정치지향적 집단에 더 큰 책임이 있으며 그런 집단 이기주의적 정치 집단을 만들어 낸 한국 감리교회의 지나온 역사, 그리고 그런 역사적 오류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것을 답습하여 반복하고 있는 오늘 우리 안에서 그 원인과 책임을 찾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은 한 세기를 넘긴 한국 감리교회 역사를 살펴봄에, 특히 근현대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가 감당한 변화와 개혁, 그리고 통합의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한국 감리교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영적 권위’를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말과 일제시대 민족의 혼란기 역사 속에서 사회의 변화와 개혁, 통합을 주도하는 지도력을 발휘하였는지, 그런 전통의 감리교회가 일제말기와 해방 후 어떤 식으로 그 지도력과 권위를 상실해 갔는지 살펴볼 것이다. 물론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어디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면도 많다. 하지만 이 글은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반성’을 전제로 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교회 역사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은 면을 주로 다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한국 감리교회가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할 것이‘회개’(metanoia)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1. 아펜젤러의 기도: 자유와 해방의 은총을 주소서!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사슬들을 깨치시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얻게 하소서!”

 한국 감리교회 선교와 역사는 이 기도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M.S. Maclay)가 1884년 6월 24일 내한해서 고종황제로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병원과 학교 사업을 해도 좋다.”는 선교윤허를 받은 지 10개월 만에 미감리회 개척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아펜젤러(H.G. Appenzeller)는 부인과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 ‘복음의 불모지’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위와 같은 ‘부활절 기도’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기도 속에 아펜젤러의 꿈과 의지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펜젤러 개인만의 기도가 아니었다. 그와 동행했던 선교사들의 기도였고 이후 전개될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와 역사, 그 방향과 내용을 담은 기도였다. 모름지기 한국 감리교회 공동체 구성원이면 잊어선 안 될 기도이다. 이 기도를 한국 감리교회의 ‘기원 기도'(起源祈禱, Original Prayer)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펜젤러가 간구하였던 기도의 내용은 간단했다.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깨뜨리신 주님의 은총이 한반도에 임하여 이 민족을 가두어 얽매고 있는 죽음과 절망의 철장, 부패와 오류의 사슬을 깨뜨시어 이 민족으로 하여금 구원 받은 백성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빛’을 누리게 해 달라는 간구였다. 아펜젤러가 궁극적으로 꿈꾸었던 것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예배당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교인도, 막대한 선교 자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와 병원도 아니었다. 규모가 작고 수는 적더라도 그런 예배당과 학교와 병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와 해방의 역사였다.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자유와 해방, 그 은총의 사건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파동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일반 사회로 파급되어 결국 민족 공동체가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19세기 말 시작된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는 개인 뿐 아니라 민족 공동체를 억압하고, 얽매고 있는 모든 굴레와 사슬로부터 자유하고, 해방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한말에 전개된 한국 감리교회 선교 역사는 조선시대 우리 민족을 얽매어 왔던 온갖 미신적 불안과 공포, 봉건적 제도와 굴레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만들었다. 19세기 말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는 당시 우리 민족의 ‘시대정신’(Zeitgeist)이었던 ‘개방’(Glasnost)과 ‘개혁’(Perestroika)의 상징이었다. 교회에 들어오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술과 담배를 끊어야” 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비생산적이었던 과거의 가치와 풍습으로부터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회는 이처럼 복음을 체험한 이들의 해방 공간이자 자유와 평등을 실험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통해 평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인권 의식을 배우게 되었고 그 겨로가 조선시대 봉건적 사회 제도 안에서는 함께 할 수 없었던 양반과 천민, 남성과 여성이 교회 안에서 함께 만나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자유와 해방 경험은 한말 이후 우리 민족이 처한 정치적 수난 상황에서 민족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세기 말 시작된 기독교 선교 역사는 같은 시기 외세, 특히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였다. 복음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포기할 수 없는 실천적 가치로 인식한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폭력적 침략과 지배 현실에서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저항과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될 것은 당연했다. 특히 개인의 영적 구원이 사회적 구원의 역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웨슬리 신앙전통에 충실하였던 감리교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엡웟청년회가 주도한 구국기도회와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1907년 전덕기 목사와 헐버트 선교사의 헤이그밀사사건 지원, 1907년 의병운동 기간 중 일어난 이천 구연영 전도사와 강화 김동수 권사의 순국 희생, 신민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에서 감리교인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민족운동’ 전통은 일제시대에도 이어져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감리교인이 9명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제암리교회 사건과 유관순의 옥중 순국은 삼일운동과 관련한 대표적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이후에도 최용신의 상록수 농촌계몽운동, 손메레와 이효덕의 절제운동, 남궁억의 무궁화 보급운동에 이어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 순교한 강종근 목사와 권원호 전도사, 최인규 권사에 이르기까지 한국 감리교회는 일제에‘저항하는’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말과 일제시대 감리교의 민족 저항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민족과 사회 현실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감리교 특유의 ‘신앙적 책임감’(obligatio religiosus) 때문이었다. 해방 후에도 그런 책임감을 갖고 산업선교와 인권회복운동, 사회정의 구현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때문에 수난당한 감리교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내용이나 비중에서 한말이나 일제시대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방 후 한국 개신교회는 비생산적 보수 가치와 제도에 함몰되어 생산적 개혁과 개방의 기능을 상실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오늘 교회는 일반 사회로부터 가장 ‘보수적인’집단으로 인식되어 개방과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자유와 해방은 그것을 체험한 개인이나 집단을 통해 남에게 전파, 확산되도록 되어있다. 자기 해방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남을 해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감리교회에 필요한 것은 외부에 대하여 자유와 해방을 말하기 전에 자신을 향하여 자유를 선포하고 개혁과 성장을 저해하는 이기적 자아(배타적 집단의식, 자기도취)로부터 자신을 자유케 하려는 자기해방의 노력이다.   
 
2. 하디의 회개: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아니 되고 오직 성령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이처럼 수고의 결과가 없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니, 내 자신에게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깨닫게 된 것은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그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촉발시킨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A. Hardie)의 회개는 자신의 부족함과 오만함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1890년 캐나다 터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해외선교의 꿈은 안고 한국에 나온 하디는 평신도 의료 선교사로 6년 활동하다가 대학생들이 보내주는 선교비가 끊어져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한국 선교를 개척한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에서 의료 선교사사가 필요하다 하여 교적을 감리교회로 옮겼다. 그리고 1900년에 목사 안수까지 받고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 지역을 맡아 보았는데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눈에 띠는 결과가 없었다. 이 시기 그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토착 교인들과 교회에 대한 실망, 그리고 좌절을 토로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1902년 보고다.

 “지난 1년 동안 좀 나아진 면도 있기는 하지만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기대이하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은 이유로 징계를 받은 세례교인과 학습인이 여럿 있습니다. 교인 하나는 오만방자하게 굴어서 출교 처분했습니다. 또 한 명은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무기한 교회 출석을 금지했습니다.”

‘출교 처분’까지 불사하며 교인들을 교회법대로 징계함으로 교회의 질서를 잡고자 하였다. 의사 출신답게 그는 엄격하고 정확하게 교회 질서를 지키는 것이 교회 부흥과 성장의 비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하디의 1903년 선교 보고다.  

“지난 해 이곳 북동부 지역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보고하면서 대부분 교인들이 기대이하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아도 늘 하던 일에 그다지 큰 변화 없고,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깝고 자책감이 드는 것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목표를 낮추거나 적당하게 일을 하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필요하다면 징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교인 수는 좀 줄었어도 그 때문에 교회가 약해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선교사는 원칙을 바꾸거나 목표를 낮추어 잡지 않았다. 징계도 계속 실시하였다. 하디의 눈에는 토착 교인들의 게으름과 무지, 불성실과 부도덕, 토착교회 주변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교회 부흥을 끌어내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엄격한 규율과 법을 적용했다. 숫자가 줄 것은 당연했고 그나마 남은 교인들이 제대로 (징계 받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것 같아 거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족하기에는 토착교회 상황이 너무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1904년 제출한 하디 보고서의 분위기는 아주 달랐다.

“지난 해 보고서를 내면서, ‘내가 이 일을 증거하였고 성령께서도 증거하시도다’는 구절을 삽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사실 확신이 없었습니다. 쓰면서도, ‘정말 네가 쓴 거냐?’ 라고 자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제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셨고 은사를 주셨으며, 무엇보다 믿음의 은혜를 내려 주셔서 이제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땅치 않으리라.’ 그분께서는 제가 구하고 생각한 것 이상을 풍성하게 내려 주셨습니다.’세세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광이 있을 찌어다. 아멘.’”

이처럼 1년 사이에 분위기가 180도 다른 보고서를 내게 된 배경은 다름 아닌 1903년 8월,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그 ‘성령의 뜨거운 역사’ 가운데 하디가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의사에서 목사로 ‘기능’을 바꾼 후 3년 동안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기대치 이하였고 시간이 흘러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 선교사직을 사임할 생각까지도 하였던 하디였다.

그런 상황에서 원산에 있던 여선교사들이 기도 모임을 가지면서 연장자인 하디에게 성경공부 지도를 부탁했던 것이고 하디는 (올더스게잇 모라비안 모임에 참석했던 웨슬리처럼) “대단히 내키지 않는”(very unwillingly) 발걸음으로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요한복음 14장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홀연히, “성령의 능력이 없었던 데 사업 실패의 비밀이 있었음과 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하디는 선교와 교회 부진의 원인이 자기 ‘밖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깨달을 바는 실패와 부진의 원인이 밖이 아닌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령을 입으로만 말하고, 성령의 의지와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긴 적이 없었으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른 적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굴복시킨 적은 없었다. 모든 실패와 부진, 혼란과 분쟁의 원인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과거 선교와 목회의 실패 원인이었음을 깨달았으니 성공과 진보의 조건이 무엇인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런 깨달음을 얻는 순간 하디는 성령의 임재, 그로 인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였다. 그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이후 그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아니 되며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되리라.”(not by power, nor by might, but by the spirit of God)는 말씀을 평생 목회와 선교 사역의 원칙으로 삼았다. 성령의 지시,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 명제였다. 그는 성령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로 명하신 것은 내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였던 이곳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하였다는 것과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창피한 일이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 내시려고 이 일을 선하게 여기시어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고참 선교사가 후배 선교사들 앞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디의 표현대로 “고통스럽고 창피한”(painful and humiliating) 일이었다. 진정한 회개는 아파야 한다. 그리고 창피해야 한다. 죄 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야 재범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면 아플수록, 창피하면 창피할수록 회개의 효력은 오래 지속된다. 그런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그래도 할 만 하다. 평소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이들 앞에서 자기 잘못을 자백하는 것은 여간 용기가 아니고는 할 수 없다. 하디도 1년 전 같았으면 할 수 없었던 자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었다. 이제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하디는 10년 연하의 여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였고 그 결과 여선교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보다 그들도 같은 회개를 한 후 “베드로의 고백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표현을 종종 쓰면서 주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셨음”을 체험하였다.

하디의 자백 공연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선교사 성경공부 모임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하디는 원산교회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인 토착교인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였다.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돌아온 첫 번째 주일 아침에 원산 교인들 앞에서 수치와 곤혹스런 얼굴로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면서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말하게 될 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백과 회개의 체험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선포하는 나의 말을 듣고, 또 그 후 3주간 동안 나의 생활과 체험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고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디가 토착교회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했던 것과, 고집불통이었던 것과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자 그 예배에 참석했던 토착 교인들 중에서도 그동안 선교사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속였던 잘못을 자백하는 이들이 나왔다. 이후 ‘3주간 동안’ 토착교인들이 참여하는 기도회와 부흥회가 원산에서 열렸는데 하디가 인도한 집회 때마다 토착 교인들이 다투어 자기 잘못과 죄를 회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산부흥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처럼 원산에서 발원된 부흥운동의 열기는 1904-05년 서울과 개성, 인천, 춘천, 철원, 목포, 해주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906년 8월 평양에서 개최된 장로교 감리교 연합 선교사 수양회에 강사로 초빙받은 하디의 설교를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장로교 선교사들도 그 때부터 “평양에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장로교)에서, 2월 남산현교회(감리교)에서 ‘폭발적인’부흥운동이 일어났고 그 열기는 북으로는 영변까지, 남으로는 공주와 대구까지 확산되었고 평양 부흥운동 소식은 1908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북경의 중국교회까지 전파되어 중국교회 부흥운동을 발화시켰다. 이 처럼 그 파급 범위가 한층 넓었던 평양 대부흥운동의 핵심 내용과 형식은 원산 부흥운동과 같은 통회 자복, 즉 철저한 회개였다.

특히 부흥운동 기간 중에 회개한 주역들은 새신자나 초신자들이 아니었다. 선교사를 도와 전도 사역에 참여하고 있던 토착인 목회자나 매서인, 전도부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교회에 들어와 이미 10-20년 사역 활동을 하던 토착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 진리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형식적인 출석과 목회사역을 하던 중 부흥운동을 통해 철저한 자복으로 출발하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 즉‘회개와 중생, 그리고 성화’의 체험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형식적인 교인에서 ‘진정한 교인’(real Christian)으로 바뀌는 역사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났고 그 변화의 영향력은 일반 교인과 불신자들에게 파급되었다.

이처럼 장로교 출신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하디가 1897년 형식상 감리굣 선교사가 되고 1900년 목사가 되었다가 1903년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비로소 회개와 중생과 성화에 이르는 감리교회의 신앙 본질을 체득하면서‘진정한 감리교인’(true Methodist)이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리교적’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을 통해 감리교회 차원을 넘어 장로교회에까지 파급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체질과 성격을 바꾸어 놓은 초기 부흥운동의 핵심은 철저한 회개(metanoia)였다. 개인의 회개가 공동체 회개로 발전하였고 교회의 갱신이 사회 개혁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회개운동은 두 가지 방향성을 갖고 진행되었다.

첫째 위로부터 아래로 진행되는 ‘하향운동’(下向運動, downward movement)이었다. 고참 선교사가 회개하니 후배 선교사들이 회개 했고, 선교사가 회개하니 토착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였으며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였더니 일반 교인들이 회개하였다. 건강한 교회 갱신과 개혁의 출발이 지도자 계층의 회개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둘째,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향하는 ‘원심운동’(遠心運動, centrifugal movement)이었다. 하디는 처음 선교 부진의 원인을 바깥, 토착 교인들과 선교 환경에서 찾았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 죄’를 회개하였더니 주변에 있던 동료 선교사들과 토착교회 지도자들도 각기 ‘자기 죄’를 회개하였다. 그 결과 연못에 던진 돌로 인해 생긴 파장처럼 회개의 범위가 넓어져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사회로 확장되었다. 해방직후 광주에서 개신교 수도공동체 동광원(귀일원)을 창시한 이현필은 그 제자들에게 “참 성신을 구별하라.”며 경계한 적이 있다.
 
“어떤 것이 성신이며 성신 아닌 것 분간하자. 참 성신 = 속에 죄를 들춰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 주신다. 성신 받을수록 자신이 뚜렷이 나타나 죄가 자꾸 나오는 것이다. 거짓 성신= 성신을 받으면 불이 나타나서 죄가 소멸되는 줄 아는 것. 예수님 말씀 알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다.”  

이처럼 참 성령을 받으면 자기 죄가 드러나 회개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 남의 잘못을 찾아내 지적하고 정죄할 여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1903년 하디의 반성과 눈물로 시작된 원산 부흥운동은 참된 회개가 어떠한 것인지, 참된 회개의 결과는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회개의 전형’(exempla metanoia)이 되었다. 모름지기 감리교인이라면, 감리교 목회자라면, 특히 감리교회를 관리하고 이끌기를 원하는 지도자라면 웨슬리와 하디가 경험했던 ‘고통스럽고도 창피한’회개로부터 시작하는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3. 윤승근의 양심전: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수반하였다. 그리고 그 운동은 선교사들 속에서 먼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는 한국인 조사와 전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1903년 여름 원산부흥운동을 목격했던 저다인(J.L. Gerdine)의 보고다.

“지난해 원산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그 곳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이에 관련되어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런 부흥회 모임은 주로 하디가 이끌었는데 은혜가 넘치는 집회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원산 시약소에서 로스 박사를 도와주고 있던 최종손, 로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있던 진천수, 그리고 우리 독신자 숙소를 돌보고 있는 강태수 등이 한 방을 쓰고 있는데 이들은 로스박사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와 같은 건물 안에 있습니다. 부흥회 첫날 종손이가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지난 사오일간 죄책감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죄목을 써 가지고 나와서 읽으며 자복하였는데 그 동안 도둑질한 것들을 읽어가며 악으로 가득 찼던 자기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회개를 한 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저는 그같이 완벽한 회개를 본적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충격과 감격 속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중생의 체험들을 기록하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는 중견 전도인 윤승근(尹承根)의 회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윤승근은 남감리회 개척 선교사 리드가 내한해서 처음 얻은 교인 중 한 사람으로 남감리회 소속 한국인 전도자 중에서 뛰어난 실력자였다. 이런 그도 회개반열에 합류하였다.

“그도 성령의 견책을 달게 받고 사경회 같은 모임에서 몇 차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 선교사들이나 한국인들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은총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편안하게 자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번은 과거 선교사 밑에서 매서인으로 일하면서 조금씩 돈을 빼돌린 것이 7달러에 달했다고 자복하였습니다. 그는 이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하였습니다.”

선교사 돈 뿐 아니었다. 벽제 출신으로 선교사를 만나기 전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윤승근은 과거 예수를 믿기 전에 횡령한 것도 생각나는 대로 갚기 시작하였다. 옛날 인천 주전소(鑄錢所)에서 근무할 때 횡령한 돈도 생각났다. 그는 쓸 것을 쓰지 않고 돈 20원을 모았다. 그러나 이미 인천주전소가 폐쇄되고 없었다. 결국 그는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로 돈을 보내기로 하고 건강 때문에 직접 갈 수없어 하디 선교사에게 부탁하였다. 하디를 통해 돈을 받은 탁지부 관리는 “희한한 일도 있다”며 영수증을 써 주면서 항목을‘양심전’(良心錢)이라 붙였다. 그런 식으로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회개한 교인들은 과거에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돌려주는 보상 행위가 잇따랐다. 그런데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받을 대상이 없어 돌려 줄 수 없는 경우, 그런 돈을 교회에 갖다 바쳤다. 이렇게 제단에 바쳐진 돈을 ‘양심전’이라 하였다. 양심전은 신앙을 통해 양심을 회복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구체적 ‘회개의 열매’였다.

‘양심전’의 주인공 윤승근은 1904년 초, 강원도 김화 땅 새술막(학사리)에서 전도하다가 폐결핵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강원도 산간지방을 돌며 전도에만 몰두했던 결과였다. 그의 별세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여긴 하디는 다음과 같이 그의 삶을 기렸다.

“그는 실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말년에 너무 과로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했음에도 기쁨과 행복에 넘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도 그를 겁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그리고 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그로 인해 그가 얻은 믿음의 승리를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를 통해 우리 교회에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도 부르셔서 당신의 능력으로 채워 새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예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으로 성령을 체험한 한국인들에겐 이 같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 초대 교인들에게 회개는 곧 ‘양심 회복’이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숨겨진 죄를 회개할 때 그 밑바닥에 눌려 있던 양심이 되살아나면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양심적 행위’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회개한 교인들은 일반인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래서 우러러보는 고도의 윤리적(양심적)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여기서 종교인의 권위(authority)가 확보되고 그런 ‘영적 권위’를 지닌 자에게 자연스럽게 교회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통하는 ‘지도력’(leadership)이 부여된다.

이처럼 초기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와 양심회복이라는 ‘자기 정화’(self-purification)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는 일반 불신자 사회에서도 통하는 권위와 지도력을 확보하였고 그것이 한말과 일제시대 교회가 민족과 사회운동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삼일운동은 한국 기독교, 특히 감리교회가 민족운동 현장에서 그 지도력이 어떻게 인정받고 발휘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일반사회로부터 그 권위와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잇는지 자명해진다. 일반 불신자는 기독교인들의 교리와 신학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교인들의 행동과 삶을 보고 그들이 고백하는 교리와 신학의 건강성을 판단한다. 교리와 신조가 아니라 윤리와 실천이 잣대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사안으로 일반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 당사자 뿐 아니라 교회의 권위 추락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바닥에 떨어진 오늘 한국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 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와 양심 회복을 통한 자기 정화 밖에 없다.

4. 한국 감리교회의 3대 원리: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감리교, 조선적 교회

잘 알려진 바대로, 한국 감리교 선교는 남북 전쟁 어간에 갈라진 미국의 남, 북 감리교회가 별도로 추진하여 같은 웨슬리 전통이면서도 한국에서는 서로 다른 조직과 기구를 통해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비록 미국에서는 나뉘어 있었지만 선교지 한국에서는 두 교회 선교사들이 상호 협력하면서 선교 사역에 임했는데, 특히 ‘오순절 성령 체험’이 이루어진 1903년 원산 부흥운동 이후 두 교회 뿐 아니라 장로교회까지 포함하여 교육과 의료, 문서 선교 분야에서 교회 일치와 교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특히 남, 북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신학교육(협성신학교)과 사회선교 분야에서 합동 운영체제를 구축하고 ‘단일 감리교회’형성을 추구하였다. 여기에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감리교 토착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자립’과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표출되면서 나뉘어 있는 두 감리교회를 단일 감리교회로 합동하자는 운동이 제기되었다.

결국 1924년 남, 북 감리회 안에 만들어진 교회진흥방침위원회를 통해 두 교회의 합동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고 1927년에 어느 정도 합동안이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한국 교회의 통합운동 열기를 1929-30년 미국의 두 교회 총회에서 인준함으로 마침내 1930년 12월 2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남 북 감리회 합동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저직되고 초대 총리사(감독)으로 양주삼 목사를 선출함으로 한국 감리교회는 미국 교회 관리 시대를 벗어나 ‘자치 시대’(autonomy era)를 열었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조직된 역사적인 날, 1916-28년 한국 감리교회 관리 감독을 지냈고 합동전권위원장으로 두 교회 합동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웰치(H. Welch) 감독은 새로 건설될 한국 감리교회의 성격과 지향할 바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첫째에 이 새 교회는 반듯이 진정한 기독교회가 되게 하고저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하시는 조건대로 행하여 그의 친구가 되어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를 따르고저 하는 이들에게는 문을 열고 환영하여 모도 교인이 될 수 잇도록 한다는 말슴이올시다.”

‘진정한 기독교회’(truly Christian Church)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폐쇄적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과 투쟁하며 ‘열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한국 감리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를 지향하였다. “남녀와 귀천의 구별이 없이하여 주 앞에서 빈부와 유무식자와 남녀와 제사와 군인이 다 같이 모이어”그리스도의 사업을 추구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한국 감리교회가 1930년 총회 때 여성 안수를 채택한 것과 모든 의회에 목회자와 평신도를 같은 수로 구성하도록 규정한 것이 이 같은 ‘평등 교회’를 지향한 결과다. 그렇게 구성된 교회는 내용으로 같으나 형식으로 다른 교회의 3대 기능 즉, 전도와 교육과 사회사업을 수행함으로 개인은 “진리와 사랑의 권능으로 구원하고”사회는 “옛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며 그의 정신으로 변화시키어야”한다는 2대 사명을 완성하게 된다. 전도와 교육과 사회봉사를 균형 있게 전개함으로 개인 구원과 사회 변혁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교회는 진정한 감리교회가 되게 하자는 것이엇습니다. 이 말슴은 편협한 교파주의를 가지고 옛날의 바리새교인들과 같이 교만과 자존심으로 독립한다는 뜻이 아니요 감리교회 창립자 요한 웨슬레 선생처럼 우의의 관계와 광범한 동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리교회’(truly Methodist Church)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정신에 충실한 교회다. 그런 의미에서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교파주의를 배격하며, 복음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을 믿으며 그 안에서 다른 교파, 종파와 대화할 수 있는 ‘에큐메니칼 교회’를 지향한다. 제도와 조직, 교리와 신조가 유익한 점이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 권위가 될 수는 없다. 그런 교회는 변화를 거부한다. 교회는 “자유와 희락과 권능을”가져다주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교회’여야 한다. ‘변화’는 살아 있음의 증거다. 변화와 성장을 멈춘 교회는 ‘화석화’(化石化)된 교회, ‘미이라’가 된 교회다. 사도행전 시대부터 교회는 변화와 성장을 계속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생래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감리교회는 “진보적임으로 생명 있는 이의 특색을 가졋으니 곳 그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진보와 보수가 양자택일의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相補的) 개념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교회는 조선적 교회가 되게 하고저 한 것이올시다. 조선적이라하는 말은 이 교회를 조선인으로만 조직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또 조선적이라는 말은 협소하게 교회 생활 중에 무엇이던지 조선에서 된 것이 아니면 내어버린다는 말이 아니며 또한 수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 유전하여 온 바를 경시하거나 부인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전래한 바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예배나 치리에나 규칙에 잘 이용하되 조선의 문화와 풍속과 관습에 조화되게 하고저 하는 것입니다.”

‘조선적 교회’(Korean Church)는 한국의 민족적 상황과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외세 폭력으로 수난 당하는 민족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 신앙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수주의적 민족 교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민족에까지 자기 가치를 강요하는 공세적이고 파괴적인 민족주의는 거부한다. 자기 가치가 소중한 것만큼 남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아는 조화와 협력의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하나의 음조로 단조롭게 부르는 ‘제창’(unison) 보다는 여러 음조가 화음을 이루는 ‘합창’(choral)이 교회 예배엔 더 어울린다. 세계 모든 민족이 자기 언어로, 자기 고유 의상을 입고, 자기 전통 악기로 ‘한 분’ 하나님을 찬양할 때 느낄 수 있는 ‘다양 속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적’이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감리교회가 서구 기독교 전통 못지않게 한국 고유의 ‘토착’ 전통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며 동시에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웰치 감독에 의해 제시된 한국 감리교회의 3대 원리는 한국 감리교회의 성격과 방향을 규정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한국 감리교회는 ‘진정한 기독교회’로서 폐쇄적 교회 전통을 극복하여 ‘열린 교회’를 추구하고,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성별 직업 경제적 불평등 차별구조를 극복하여 ‘평등 교회’를 추구하며, 복음 전도와 교육과 사회봉사를 통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리고 ‘진정한 감리교회’로서 독선적 교파주의를 극복하여 ‘교회 일치운동’을 추구하고, 비생산적 제도와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고수하려는 보수주의를 극복하여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진보적 변화와 성장’을 추구하는 ‘살아 있는 교회’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적 교회’로서 현실 도피적 이기주의 신앙을 극복하여 ‘민족주의 신앙’을 추구하고, 무비판적 서구 기독교 모방과 답습을 극복하여 ‘민족 전통’과 ‘기독교 전통’의 창조적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토착 교회’를 추구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한국 감리교회는 세계 기독교 전통 및 한국 토착 종교 전통과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continuus et separatus) ‘제 3의 교회’로 자기 위치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국 감리교회의 3대 원리는 웰치가 초안하여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교리적 선언>과 함께 한국 감리교회의 신앙과 신학, 역사와 실천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구성원이라면 잊어선 안 될, 소중하게 지켜나갈 규범이자 좌표이다.  
 
5. 총회장에 날라든 비둘기: 행정 감독에서 영적 감독으로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회 총회가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열렸다. 총회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총리사’ 선거였다. 1930년 창립총회 때 초대 총리사로 선출된 양주삼 목사는 1934년 총회에서 재선되어 한국 감리교회를 8년 동안 끌어왔다. 1938년 총회에서도 다시 양주삼 목사를 총리사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8년 동안 총리사로 있으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친 상태였기에 ‘안식’이 필요했다. 게다가 적극신앙단 사건 이후 감리교회 안에서 “총리사가 지나치게 이북 사람만 들어 쓴다.”“남감리회 출신 인사들만 요직에 앉힌다.”는 비난이 일고 있었다. 양주삼 목사의 사임 의사는 강력했고 결국 새 총리사를 뽑아야만 했다.

양주삼 목사가 남감리회 출신이었기에 2대 총리사는 ‘미(북)감리회’ 쪽에서 나오도록 묵계가 이루어졌다. 서울 중앙교회 김영섭 목사, 총리원 전도국 총무 오기선 목사, 서울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 김준옥 목사, 평양 남산현교회 이윤영 목사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총리사 선거는 10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사흘에 걸쳐 21차 투표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초반에는 김영섭 목사와 오기선 목사가 각축을 벌였지만 중반 이후에는 이윤영 김영섭 김종우 목사 3파전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투표가 오래 진행된 것은 당시 장정 규칙에 따라 총리사 당선에 필요한 ‘3분의 2’ 득표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선 투표가 없던 시절이라 결판이 날 때까지 계속 투표할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우울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3회 총회였다. 10월 5일 총회 첫날, 총독부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주삼 총리사를 비롯한 총회원들은 냉천동 신학교 안에 있던 총리원 앞마당에 모여 동방요배를 먼저 하고 나서 총회를 개회하였고 3일째 되는 10월 8일에는 정동 배재학교 운동장에 가서 ‘애국일’ 행사를 가진 후 광화문 총독부에 가서 총독의 훈시를 들었으며 남산 조선신궁에 올라가 참배까지 하고 내려왔다. 1937년 중국 상해를 침공한 일본은 ‘전시체제’, ‘총후보국’ 운운하며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견디다 못한 교회 지도부는 “신사 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닌 국가 행위다”는 논리로 신사참배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총회에서 ‘시범적으로’ 신사 참배를 거행했던 것이다.

‘굴욕적인 참배 행진’을 마치고 돌아와 총리사 선거를 계속했으나 여전히 3파전이었다. 예정된 회기를 하루 연장하여 총회 8일째, 총리사 투표 사흘째 되는 10월 12일 수요일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총회원들에게 초대 여선교사로 수고했던 벙커 부인이 미국에서 별세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총회원들은 회무를 중단하고 정동교회로 가서 벙커부인 추모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총회 분위기는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 있었고 회원들은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곤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총회원들이 투표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열린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날라 든 것이다. 비둘기는 익숙지 않은 환경에 당황한 듯 빙빙 돌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회원 무릎에 내려앉았다. 바로 김종우 목사였다. 그는 비둘기 소리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비둘기는 다시 날아올라 회의장을 한바퀴 빙 돌더니 열린 창문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모든 과정을 총회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비둘기의 출현을 ‘성령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고 나서 진행된 투표에서 ‘표 쏠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2차 투표에서 김종우 목사가 3표 모자란 37표를 얻더니 곧이어 실시된 23차 투표에서 42표를 얻어 마침내 길고 긴 투표가 끝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지루하게 신경전을 벌이면서 질질 끌던 투표를 비둘기 한 마리가 끝내 버린 셈이다.

2대 총리사로 선출된 김종우 목사는 전임 양주삼 총리사와 여러모로 달랐다. 양주삼 목사가 ‘행정 전문가’였다면 김종우 목사는 부흥사 출신의 ‘영성운동가’였다. 강화 출신인 김종우 목사는 학생 전도사 시절 백일 동안 새벽마다 남산에 올라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았고 목회하는 동안 인도하는 부흥회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며 숨이 끊어졌던 아이를 살리는 이적이 나타났다. 1915년 이후 매년 50여 곳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장로교의 김익두 목사와 쌍벽을 이루는 ‘신유 부흥사’로 이름을 날렸다. 감독 선거 투표에 지친 총대들은 이런 ‘신령한 목사’가 ‘비둘기 총회장 난입 사건’(?)을 통해 2대 총리사로 선출되었으니 감리교회의 분위기가 새롭게 바뀔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김종우 감독에 걸었던 감리교인들의 기대는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1938년 12월 총독부가 주선한 ‘조선교회 지도자 일본 여행단’에 양주삼 목사와 함께 감리교 대표로 참가하여 교토, 이세, 나고야, 도쿄 등지를 순방하며 일본 신궁과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온 후 ‘패혈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1939년 9월 17일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두고 “목사가 일본 귀신에게 절했으니 하나님 벌을 받은 거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찍 돌아가신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일제 말기 험한 꼴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게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별세 이후 감리교회가 당한 시련과 굴욕의 역사를 볼 때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다만 김종우 감독 선출과 별세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영적 권위를 인정받은 ‘신령한’ 목회자라도 양심과 정의가 통하지 않은 ‘악한’ 시대, 제도권 정치 현장에서는 그 영적 권위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이다.

6. 혁신교단의 반역: 감리교 전통의 훼손
 
김종우 목사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감리교회는 감독(3회 총회 직후부터 총리사 명칭을 감독으로 바꾸었다)을 다시 뽑아야 했다. 장정 규칙에 따라 1939년 9월 28일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총리원 이사회를 소집하였고 9차 투표 끝에 정춘수(鄭春洙) 목사가 14표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한국 감리교회 ‘3대’ 감독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와 굴욕의 역사였다. 그렇게 된 데는 일제의 강압적 종교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환경에 1차적 원인이 있었지만 감리교회를 끌고 나가는 총리원 지도부의 유약한 신앙 의지와 근시안적 역사의식에 보다 큰 원인이 있었다. 무엇보다 감독으로 선출된 정춘수 목사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로 서명에 참여하고 옥고를 치르었던 민족운동가였다. 1927년 좌우익 연합 단일민족운동 전선으로 신간회가 창설될 때 이상재 조병옥 조만식 김영섭 김활란 이동욱 박동완 등과 함께 ‘기독교측’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일제의 고문과 회유에 굴복하여 <사상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석방된 후부터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감독이 되고 난 후 그가 처음 한 일은 그해 10월 18일 일본 도쿄로 가서 일본 메소디스트(감리)교회 대표자들과 회합하여 양국 감리교회 합동 문제를 논의하는 일이었다. 한일 양국 교회의 합동이라고 하지만 실제 내용은 한국 교회의 일본교회 흡수 통합이었다. 일본 정부 당국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사불란한 ‘총후보국’(銃後報國)을 강조하였고 그 과정에서 종교 단체의 통폐합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정춘수 감독이 지휘하는 총리원은 이런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일본화(日本化) 작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1940년 10월 총리원 이사회에서 발표한 ‘감리교 혁신안’이다.

“아국체(我國體)의 진정신(眞精神)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원리(原理)를 실현하며 총후국민(銃後國民)의 의무를 감당하고 신체제(新體制)에 순응(順應)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急先務)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마련된 혁신안의 골자는 1) ‘내선일체’와 ‘신동아 건설’(新東亞建設), ‘팔굉일우’(八紘一宇), ‘총후보국’(銃後報國), ‘황도선양’(皇道宣揚) 등으로 표현되는 일본 군국주의 체제와 이념을 선전하고, 2) 그러기 위해 신학교육에서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3)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맹, 애국반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4) 학도병 지원을 적극 권장하고, 5) 외국인 선교사들의 간섭과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 같은 혁신안에 근거하여 감리교신학교를 느닷없이 폐교시키고 선교부와 한국교회 선교 협의 기구였던 중앙협의회도 폐지시켰다. 그리고 한 달 후 1백 명이 넘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강제 송환선을 타고 한국을 떠났다.

이 같은 ‘혁신안’에 대해 감리교 안에서 “해도 너무 한다”는 반론이 없지 않았으나 총독부의 지시와 지원을 받은 감독과 총리원의 ‘밀어붙이기식’ 체제 개혁은 1941년 3월의 ‘기독교조선감리회’ 연회를 해산하는 데까지 나갔다. 그리고 바로 ‘기독교조선감리교단’(基督敎朝鮮監理敎團)을 조직했으니 이 때부터 ‘교단’이란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이를 ‘혁신 교단’이라 하는데 이 교단은 조직과 명칭에서 일본 교회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총리원을 ‘교단본부’(敎團本部), 연회를 ‘교구’(敎區), 감독을 ‘통리자’(統理者), 목사를 ‘교사’(敎師), 권사를 ‘권도사’(勸道師)로 바꿔 불렀고 입교인, 세례아동, 원입인 같은 교인 명칭도 ‘정회원’(正會員), ‘연소회원’(年少會員), ‘객원’(客員), ‘구도회원’(求道會員) 등으로 구분했으며 교회 임원을 ‘역원’(役員)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를 ‘일요학교’(日曜學校), 여선교회를 ‘부인회’(婦人會)로, 엡웟청년회를 ‘공려회’(共勵會) ‘혁신’하였으니 ‘회원’(교인)들은 바뀐 명칭 때문에 한참 동안 혼돈을 겪어야 했다. 이 모든 지시는 ‘화곡춘수’(禾谷春洙)로 이름을 바꾼 교단 통리자의 통보로 이루어졌다. 말 그대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시대였다.

계속해서 ‘혁신교단’은 총독부의 지시에 절대 순응하여 1943년 교단 명칭을‘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바꾸었다가 해방 보름 전인 1945년 7월에는 장로교단, 구세군, 성공회 등 다른 개신교단들과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개명하였다. 이로써 감리교 전통은 완전 소멸되었다. 반세기 넘게 지켜 왔던 감리교회 신앙 전통과 내용도 크게 변질되었다. 우선‘혁신교단’이 장로교회와 통합되면서 감리교회 정서와 전통에 어울리지 않은 ‘장로교’ 전통과 의식이 대거 감리교회 안에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장로’제도였다. 본래 감리교회는 목사 안수의 종류를 구별할 때 ‘장로 안수'와 ‘집사 안수’로 구분하였던 바, 혁신교단은 장로교 전통에서 목사와 동등한 정치적 기능(치리)을 보유한 평신도 대표라는 개념의 ‘장로’명칭을 수용함으로 장로와 목사 사이의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개체 교회 목회자 부임도 감리교회 특징인 감독주의(episcopalism)에 근거한 ‘파송제’가 점차 소멸되고 장로교의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에 근거한 ‘청빙제’가 대두되면서 목회자 파송을 둘러싸고 교인과 목회자 사이에 미묘한 갈등전선이 형성될 가능성을 내포하였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가장 큰 반역은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의 순수한 전통이 훼손되는 것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배와 집회 때마다 국기배례와 궁성요배, 국민서사 낭독은 기본이고 절기 따라 신사나 신궁에 참배해야 했으며 교회 안에까지 ‘가미다나’(神棚, 일본 국조신 신위를 봉안한 작은 제단)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예배의 내용도 많이 바뀌었으니 독일과 새로운 군사 동맹관계를 맺은 일본 정부의 지시에 따라 유대 종교와 문화가 담긴 구약은 일체 읽지 못하게 했으며 신약에서도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 같은 ‘유대적’ 성경은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그 바람에 구약을 몰래 읽다가 발각된 신학생이 퇴학당했다. 이런 ‘혁신교단’의 조처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비협조적인 교계 인사들은 ‘파면’, ‘휴직’, ‘대명’(代命) 등 조처로 목회 현장에서 추방되었고 반발의 강도가 심한 사람은 경찰 당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목사가 목사를 감시하고, 교인이 목사를 밀고하는 ‘불신’의 시대였다. 훼절과 굴욕, 비굴과 치욕의 아픔이었다. 혁신교단이 만들어낸 ‘반역’의 역사였다. 뒤에 살펴볼 감리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과‘옥중 순교’마저 없었더라면 참으로 부끄러웠을 치욕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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