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7월25일(토)에 개최된 화쟁문화아카데미 제6회 종교포럼에서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성형사회의 그리스도교”라는 발제를 통해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 안에서 종교의 위치를 분석했다. 저자의 동의를 얻어 발제문을 2회에 걸쳐 전재한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 ⓒ베리타스 DB |
‘성형사회’
나는 우리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성형사회’라는 레토릭을 사용했다. ‘성형’은 ‘몸의 변형’을 통한 개개인의 자기관리 행위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사회’라는 단어와 연결시킴으로써, 성형이라는 행위는 단지 개개인의 선택적인 욕구나 실천을 넘어서 거의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과도한 집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집단성’이라는 말 속에는 몸을 ‘특정한 방향으로’ 변형시키는 행위가 더 유리한 삶의 선택이라는 합리적/계산적 판단을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그러한 합리적 계산을 넘어서 성형 자체가 이미 사회적 욕망이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끊임없이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불만족에 사로잡혀 ‘더 나은’ 몸을 갖기 위한 어떤 행위들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더 나은’ 몸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여기에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이상적 몸’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전제된다. 그러한 이상적 몸을 갖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혹은 이벤트적인 성형 행위에 몰두한다. 일상적 실천에는 식사와 운동이 대표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음식의 양을 조절하고, 음식 속에 포함된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식사를 한다. 운동도 성형하고픈 몸의 부위에 맞는 반복적인 동작들로 수행된다. 또한 여기에 옷 입는 행위도 일상적인 성형 행위에 포함될 수 있다. 왜냐면 사람들이 옷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옷이 일으키는 시각효과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상적인 몸의 자기 관리에 사람들이 집착하고 있는 현상은 이제까지 우리사회의 역사에서 전무했고, 또 전 지구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이벤트적 성형행위는 대개 전문가의 코칭(coaching)에 의지하면서 수행된다. 바디트레이너(body-trainer)와 성형전문의(‘plastic-body doctor’)로 대표되는 성형디자이너(plastic body designers)의 영향력은 영성 혹은 지성의 전문가인 성직자나 인문적 지식인보다 월등하다.
한편 이러한 일상적이거나 이벤트적인 성형행위를 수행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다. 하여, 사람들은 성형을 위해 여가 시간의 관리만이 아니라 ‘더 고된’ 노동도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몸의 관리에 집착하는 사회는 교양이나 영성 등을 관리하기 위해 사용할 시간을 제약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몸을 지나치게 경시했던 과거 사회의 기형성만큼이나 몸에 몰두하는 성형사회의 기형성도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성형사회의 병증
다시 말하거니와, 성형사회를 사람들 각자가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몸에 집착하는 사회라고 한다면, 한국사회야말로 성형사회라는 불러 마땅하다. 한데 앞에서 개념적 설명을 할 때 이미 암시했지만, 이 현상은 여성의 몸 집착증에 관한 비아냥이 아니다. 한국을 ‘성형대국’이라고 비웃는 외국 언론들의 조롱은 성형수술만을 주목한,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평면적 평가에 지나지 않다. 한국의 성형사회적 몸 집착증은 결코 여성들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성별을 가리지 않는, 전 사회적인 현상이다.
서양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근대사회가 전근대사회와 구별되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를 ‘국경(boundary)의 탄생’으로 보았다. 전근대 사회에는 한 영토와 다른 영토 사이의 경계가 명료하게 나뉘지 않는, 즉, 권력의 영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변경지대(frontier zone)가 있었다. 가령, 전근대사회에서 이른바 애국심은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일부 특권적 백성들의 현상이었고, 무수한 대중은 그 체제 권력의 여백의 공간인 변경지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전근대사회에서 여성은 대개 가문에 속한 자로만 간주되고 국가 구성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음으로써, 여성 또한 체제의 변경지대에 속한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데 근대사회는 이러한 변경지대의 대부분을 영토의 일부로 귀속시켰고,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백성을 국민으로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현상학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러한 변경지대의 국경화를 가능하게 한 것을 ‘몸’이라는 레토릭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근대사회가 사회적 권력이 개개인에게 각인되게 하는 주된 장소가 바로 ‘몸’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토를 통합하게 하는 이념, 가치, 질서 등의 기억이 국민의 몸에 각인됨으로써 근대사회는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을 실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심지어는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같은 사회학자는 관습, 습관 같은 무의식적인 특성까지도 몸을 매개로 하여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체계가 바로 근대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해석했다. 요컨대 서양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몸’이라는 레토릭을 사용하여 사회를 해석하는 것은 여성에 한정된 문제제기가 아니었다.
한데 소비사회가 한층 첨예화되고 자본의 침투 능력이 일상에까지 뻗치게 된 오늘의 사회, 그것을 ‘후기근대사회’라고 한다면, 이 후기근대사회는 근대사회의 몸의 중요성이 더욱 첨예해진 사회를 뜻한다. 이제 몸에 대한 사회적 권력의 지배력은 더욱 확장되었고 정교해졌다. 하여, 후기근대사회는 몸에 대한 권력의 지배가 개인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데, 나의 주장은 오늘 한국사회는 이러한 몸을 매개로 하는 개인과 사회의 병증이 과거보다도 매우 심각한 상태일 뿐 아니라 후기근대를 사는 다른 사회보다도 더욱 악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더 두드러진 몸의 집착 현상이 일으키는 중증질환에 관한 것이다.
오늘 한국사회의 남자들은 두 유형의 이상적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 아래 놓여 있다. 하나가 ‘꽃미남형 몸’이라면, 다른 하나는 ‘근육남 형 몸’이다. 미국의 여성주의 사회학자인 수잔 제퍼드(Susan Jeffords)는 1980년대 초 레이건 시대 미국사회에서 ‘하드바디’(hard-body) 신드롬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보면서, 그 대표적인 증후를 ‘람보’에서 찾았다. 그것은 미국이 소비사회로 변모한 1960년대 이후, 종래의 강인한 남성성 대신에 ‘아름다운 남성’에 대한 사회적 욕망이 크게 부상함으로써 남성헤게모니적 보수주의를 고수하는 이들은 남성성의 상처를 받게 되었고, 바로 그러한 상처받은 남성적 보수주의의 반동적 발흥이 하드바디 신드롬으로 나타났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하드바디가 전형적인 산업사회형 남성의 육체라면 소프트바디는 소비사회에서 부상한 남성의 육체성이다. 왜냐면 소비사회는 노동하는 몸보다 소비하는 몸이 환영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레이건 시대는 소비사회로 이행한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에 불어 닥친 남성의 ‘소프트바디’(soft-body) 열풍에 대한 반동 현상으로 ‘하드바디’ 신드롬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사회로 옮겨 해석해보자. 한국에서 산업화 시대는 대략 1960~1990년 사이다. 이 시대에 남성의 이상화된 몸은 새까만 피부의 강인한 근육질의 군인 혹은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에 나온 대중가요인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에는 매력남을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이라고 묘사하고, 1960년대 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에서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에게 반한 여성이 “그 품에 안겼네”라고 노래한다. 1970년대의 대표적 대중가수인 남진과 나훈아는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근육남이었다. 또 이덕화, 최민수, 전영록 등은 1980년대 근육남의 표상이었다.
반면 1990년대, 소비사회로 옮겨가면서 새로운 남성적 몸이 부각된다. 이른바 ‘꽃미남’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여성적인 얼굴, 부드러운 몸매, 그리고 사적으로 다정한 남자의 표상으로 구체화된다. 특히 소비사회가 현저히 발전하는 1990년대 후반과 2천 년대에 오면 이러한 현상은 훨씬 두드러진다. 일종의 산업화 시대의 전형적 남성적 몸의 해체적 현상이 소비사회를 풍미했다.
더욱이 이 시기에 페미니즘적 문제제기가 널리 확산되었고, 2천 년대에는 남녀의 젠더 이분법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폭넓게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요인들은 위와 같은 해체적 남성의 몸 담론이 청년층 사이에서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게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꽃미남’은 소비사회적 자본의 호명으로 부상하였지만, 그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주의를 넘어서려는 성해방주의의 열망이 살짝 덧입혀지기도 하였다. 그것은 소비사회적 재화가 단지 자본주의적 가치의 재생산에 머무르지 않고, 해방의 이상을 위해 기여하도록 재해석하려는 진보론자들의 노고의 산물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근육남’의 마초적 이미지가 약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엔 유일한 독점적 이미지였다가, 오늘날에는 이 두 몸의 이미지가 경합하거나 중첩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게 정확한 지적일 것 같다.
수잔 제퍼드가 미국에서 극우주의가 판치게 되었던 레이건 시대에 ‘람보’ 같은 하드바디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고 주장한 것이 타당하다면, 한국에서도 민주화 시대에 상처받은 남성헤게모니적 보수주의를 복권시키려는 무의식적 반작용이 하드바디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면 하드바디 열풍이 퇴행적 마초주의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일이 훨씬 빈번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합은 또 다시 소비사회적 상품으로 변환되어, 마치 소녀스런 청순한 얼굴과 글래머 몸매가 합성된 ‘베이글녀’가 소비되는 것처럼, 여성스런 브이라인 턱선을 한 꽃미남과 식스팩 복근의 짐승남의 이미지가 ‘중첩’된, 이른바 ‘부드러운 마초주의’가 대안적 이미지로 상품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남자들은 꽃미남과 근육남, 그리고 더 최근에는 양자가 합성된 남성성의 몸을 이상적으로 시연한 몇몇 대중스타의 몸들, 그 ‘이상화된 몸들’에 규율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러한 몸을 갖는 데 ‘실패’한다. 여기서 ‘실패’라고 표현한 것처럼,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몸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실패한 몸’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욱 심한 스트레스와 자존감의 상실로 인한 존재파괴의 병증을 앓고 있다.
구체적인 묘사는 달라지겠지만 이런 사정은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또 남성과 여성, 이 이분법적 성에 귀속되지 않는 ‘제3의 성들’의 경우도 ‘강박적인 몸의 집착증상’이 결코 덜하지 않다. 요컨대 한국사회는 성형사회의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이야기하면 이러한 이상적인 몸으로 간주된 몸에 대한 사회적인 강박증은 ‘훼손된 몸’으로 간주된 몸에 대한 공포증과 불가분 연계되어 있다. 최근 ‘메르스 현상’은 이러한 몸의 강박증이 낳은 사회적 병리성의 허점을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훼손된 몸에 대한 사회적 공포증이 과도한 건강염려증을 낳았고 이것은 병원에 대한 대중적 소비를 급증시켰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국민에게 낮은 의료비로 진료와 치료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나라 의료보험체계의 장점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낮은 보험수가를 악용한 병원들이 과잉진료를 남발하여 건강염려증을 더욱 부추겼고, 이는 대형병원 중심의 심각한 과잉시설투자로 이어졌으며, 결국 낮은 보험료에도 불구하고 국민 개개인의 의료비 지출은 상승하게 하는 문제를 낳았다. 그리고 과한 시설투자가 어려운 대형병원이 아닌 중소형병원을 고사시켜 병원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한데 메르스의 유행은 대중의 건강염려증 탓에 사회적 공포증상이 필요 이상으로 급상승하였지만, 흥미롭게도 그것이 꼭 필요하지 않은 병원 방문을 크게 줄임으로써, 과잉지출구조를 가진 병원의 적자를 크게 높인 반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게는 엄청난 비용절감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영리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의료체계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공공의료를 확장하는 데 현재의 의료보험체계가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메르스를 질병으로서 관리하기보다는 그 정치적 이팩트에 과민했던 정부는 메르스를 질병이 아닌 ‘정치적 메르스’로서 대응한 결과, ‘은폐’의 전략을 사용했고, 그것이 결국 질병으로서의 메르스의 관리에 실패하게 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사회의 성형사회적 몸 집착증을 정치화하는 데만 익숙한 정부의 과잉정치적 태도가 낳은 위기인 셈이다. 몸 집착증에 대한 과잉정치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종북 담론’이다. 그것은 북한체제를 훼손된 몸으로 간주하고, 이 훼손된 몸에 오염된 이들은 다른 건강한 이들을 전염시켜 병들게 할 것이라는 논리로, 훼손된 몸의 추종자로 낙인찍은 이들이 사회 속에서 공존하지 못하도록 격리, 배제하는 방식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도모하는 담론 양식이다. 해서 국민 사이에서 남북한을 두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공론의 장을 애초부터 봉쇄해 버린 것이 바로 종북 담론인 것이다. 이런 식의 과잉정치화의 달인들이 구축한 정부는 질병조차도 정치도구화하는 태도를 낳았고 그것이 결국 질병관리의 실패를 초래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엔, 훼손된 몸에 대한 사회적 공포와 이상적 몸에 대한 사회적 집착이라는 이 야누스적 괴물은 성형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집단적 병리적 증상들의 근본적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