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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 이덕주 교수 발제문 전문 2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나타난 영적 권위와 지도력 문제

이덕주 교수 ‘진정한 감리교 운동 연구’ 심포지엄서 발제

7. 감독과 서리 전도사: 땅에 떨어진 교회의 권위

1940년 9월 19일, 지방회를 겸한 원산지방 교역자회가 고성읍교회에서 열렸다. 서울에서 정춘수 감독에 내려왔고 이수만 감리사를 비롯하여 지방 교역자 30여 명이 모여 감독의 ‘훈시’(?)를 들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 무렵 정춘수 감독은 지방을 순회하면서 신사참배와 국민정신 총동원연맹 결성 등 총독부의 종교 정책에 감리교 교역자들이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방회 장소를 제공했던 고성읍교회의 이진구 목사는 교역자회 다음날(9월 20일) 새벽, 고성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교인들에게 “천황도 인간이다”, “천조대신에게 절하는 것은 죄다”는 내용으로 설교하여 ‘불온사상’을 퍼뜨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이후 ‘불경죄’로 기소되어 3년 옥고를 치게 된다. 이처럼 정춘수 감독의 원산지방회 참석은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겪어야 할 ‘일곱번째 나팔’(계 11:15)의 수난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그날 모임에 참석하여 사진 찍은 교역자 중에 ‘서리 전도사’가 있었다. 회양읍교회의 권원호(權元浩, 1904-1944) 전도사다. 평남 중화 출신으로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오히려 ‘민족의식’이 강화되어 농촌운동을 벌였고 1937년부터 통천 협곡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39년 회양읍교회에서 파송된 ‘시골 교회’ 전도사였다. 정식으로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서리 전도사’ 신분이었던 그는 감히 감독과 정회원 목사들과 함께 할 수 없어 제일 뒷줄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는 “교단이나 정부 시책에 적극 협조해 달라”는 감독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이진구 목사가 체포된 것이 오히려 그의 ‘저항’ 정신을 부추겼다. 이후 그의 설교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었다.

“지금은 말세다. 흉년, 악역, 전쟁 등이 그 증거다. 말세는 하루가 가깝게 절박해 온다. 말세가 지나면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만왕의 왕이 되어 세계 인류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일본 천황은 현재도 장래도 예수님의 지배를 받게 된다.”

“지금은 가을이다. 꽃 피고 새 우는 봄은 가고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는 슬픈 계절이 되었다. 그러나 때와 계절은 도는 것이다. 가을이면 겨울을 맞고 다시 양춘이 되어 백화가 어지럽게 피는 시절이 온다. 무주공산(無主空山) 삼천리 강산도 가을에서 봄을 맞이하게 될 계절이 멀지 않다.”

“유대 국민은 애란국에 점령당함으로 나라 없는 국민이 되어 비참한 지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 조선인도 일본에 병합되어 나라 없는 유대국과 같이 비참한 운명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을 가지고만 있으면 복국(復國)은 반드시 된다.”

“4월 파리도 8월이 되면 생겨나는 원기의 도움을 받아 백만 리를 날아간다. 우리 조선인도 후원자가 있어 단결만 한다면 광복시킬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설교 내용은 회양읍 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속속 보고되고 있었다. 그는 협곡교회에 있을 때 이미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한 혐의로 통천경찰서장에게 불려 가 경고를 받은 바 있던 ‘후테이센진’(不逞鮮人), 즉 ‘불량한 조선인’으로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설교가 그 이튿날로 고등계 형사에게 전달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불온한’(?)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7월 10일(목요일), 그는 회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의 방에서 태극기가 나왔고 평소 쓰던 노트 6권이 압수되었는데 그 속엔 3·1운동 때 학생들이 시위하며 불렀던 ‘조선의 아들’이란 노래를 비롯하여 ‘인산곡가’(因山曲歌), ‘애국가’, ‘조선청년가’ 등 불온가요(?)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일제의 통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국가흥망의 요소’란 설교 원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압수되면 불리할 것이 분명한 소지품과 기록들을 없애고 미리 신변을 정리하는 그런 ‘재주’도 없었다.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그러했기에 그는 경찰과 검찰, 그리고 재판정에서 당당했다. 권원호 전도사는 긴 조사 과정을 거쳐 1942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에 섰다. 판사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문: 일본 천황도 현재와 장래에 걸쳐 예수의 지배를 받는다 했는데 어떻게 받는가?
답: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므로 지금도 천국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심은 물론, 일본 천황도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서 인류 최고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문: 천조대신(天照大神)은 신이 아닌가?
답: 천조대신은 일본국을 조성한 신이므로 여호와의 사자(使者), 즉 일본어로 ‘고츠까이’(小使, 심부름꾼)로서 일본국 밖에서는 지배할 수 없는 신입니다.
문: 신사 참배를 하는가?
답: 우상이므로 참배하지 않습니다.”
 
결국 권원호 전도사는 1월 29일 결심공판에서 일본 국체(國體)를 위험하게 했다는 혐의로 ‘치안유지법’ 위반 2년, 천황을 모독했다는 ‘불경죄’ 혐의로 1년, 모두 합쳐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를 포기하였다. 일본인의 재판이 의미가 없었을 뿐 아니라 형기를 줄여 달라고 구걸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감옥 안에서 그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당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옥중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 병감(病監)에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벌리고 기도하는’ 자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 같은 그의 투쟁과 순교 사실에 대해 ‘혁신교단’은 물론 당시 교계 언론은 침묵하였다.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정춘수 감독을 비롯한 교단 관계자들의 눈에는 이런 권원호의 투쟁이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교회 ‘서리 전도사’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다르다. 1940년 9월 19일 사진 속의 두 인물, 가슴에 꽃 달고 앉아 있던 감독과 의자 위에 올라 서 있는 서리 전도사 중에 과연 누가 역사의 승리자였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답을 할 차례다.

8. 해방 후 1차 분열(재건파/ 복흥파 분열): 왜곡된 역사 청산 문제

일제말기 체제 순응적이던 ‘혁신교단’ 관계자들은 해방을 맞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란 교단 명칭에서 ‘일본’ 자만 떼어 내고 ‘조선기독교단’이란 간판을 내걸고 계속 한국 기독교 대표 기관으로 행세하였다. 이들이 ‘교단’ 조직을 유지하면서 내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비록 일제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단일 개신교 조직이 이루어진 만큼 그것을 유지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김규식 등 기독교 정치인을 통해 ‘기독교적’ 정부가 조직되도록 한국 교회가 힘을 모아 주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 단일 교회 조직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교단 관계자들이 과거 일제 말기 보여주었던 ‘반민족적이고 비신앙적인’ 행위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눈에 그들의 주장이 순수하게 비쳐지지 않았다. 반성과 회개가 필요한 자들이 오히려 기득권 유지를 위해 ‘단일 교회론’을 주장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과거 이들에 의해 교회 밖으로 추방되거나 수난 당했던 교인들의 반발이 나올 것은 당연했다. 감리교회 안에서 일어난 반발이 바로 재건파다.

재건파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교단’ 관계자들이 소집한 ‘남부대회’에서 회의 벽두, 이규갑 ․ 변홍규 목사 등 수 십 명이 “감리교회는 따로 재건하겠다.”고 선언하고 회의장을 퇴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그 해 11월 동대문교회에서 감리교회 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듬해 4월 냉천동 감리교신학교에서 ‘재건 연회’를 소집하여 중부연회장에 이규갑 목사, 동부연회장에 변홍규 목사를 각각 선출하였다. 반면에 퇴장하지 않고 ‘남부대회’에 남아 있던 감리교회 지도자들은 처음에 남부대회를 중심으로 단일 교단 조직 유지를 위해 애쓰다가 장로교와 구세군, 성공회 등이 교파 교회 재건을 선언하고 나가게 되면서 결국 재건파와 다른 감리교회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재건파’ 연회가 조직된 직후 1946년 4월 7일 수표교교회에서 ‘감리교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교회 복흥방침”을 발표하였다. 이 때부터 ‘복흥파’란 용어를 쓰게 되었다.

복흥파는 재건파의 연회 조직을 ‘불법적’인 행위로 비판하였다. 즉 교회 복구 작업은 당회→구역회→지방회→연회→총회 순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재건파는 그 순서를 무시하고 연회부터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말기 교회 밖으로 추방당했던 재건파와 달리 해방 당시 지역 교회를 갖고 있던 복흥파 목회자들에게 유리한 논리였다. 복흥파는 자신들이 제시한 ‘합법적인’ 순서에 따라 구역회와 지방회를 복구한 후 1946년 6월 중앙교회에서 연회를 조직하였고 9월에 총회를 열어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건파에서도 1948년 1월 총회를 열고 장석영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한국 감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감독’ 시대가 열렸다. 이 때부터 양측간의 치열한 성명․비난전, 목회자 ․ 교회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신도들과 선교사들이 나섰다. 특히 일제말기 추방당했다가 해방 후 귀환한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중립적 위치에서 양측의 화해를 촉구하였다. 1949년 1월 세계적인 부흥운동가 스탠리 존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는 설교를 한 것이 양측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그해 2월부터 김광우․김희운 등 양측의 ‘중진’ 목회자들 사이에 합동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3월 30일 “무조건 통합한다.”는 내용의 합동 원칙에 합의하였고 4월 26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 ‘통합 연합 연회’와 ‘통합 총회’가 개최되어 중립적 인사였던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한 번 갈라서면 다시 합치기 어려운’ 장로교회와 달리 감리교회는 분열 3년 만에 다시 하나 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자랑할 만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조건 통합한다.”는 ‘무비판적’ 합동 원칙을 강조함으로 내적 화해 없이 외적 통합만 추구한 결과 교회 안에 갈등 요인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후 한국 감리교회의 고질적인 ‘서클 정치’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반성할 것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재건파 복흥파 분열의 근본 원인이었던 ‘역사 청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통합을 추진한 바람에 잘못된 역사와 행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역사 창조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그 때문에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 기독교계와 일반 사회가 씌워준‘친일 교단’이란 족쇄를 풀지 못하고 ‘원죄’처럼 지니고 있어야 했다. 

9. 해방 후 2차 분열(호헌파 분열): 지방색과 교권 문제

1954년 3월, 수복 직후의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해방 후 3차 총회가 개최되었지만 이 총회는 해방 후 두 번째 감리교단 분열이 이루어진 ‘불행한’ 총회로 기록되었다. 이 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된 유형기 감독의 총리원에 반기를 든 일부 감리교회가 ‘호헌파’(護憲派) 총회를 구성하고 나간 것이다. 그런데 호헌파 분열의 싹은 이미 3년 전 1951년 11월, 피난지 부산에서 개최된 특별총회에서 배태되었다. 부산 특별총회는 재건파와 복흥파로 나뉘었던 감리교단이 1949년 통합 총회를 구성하면서 감독으로 선출했던 김유순 감독이 6․25전쟁 중 납북 희생됨으로 그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총회였다.

감독선거에서 일제시대 총리원 교육국 총무를 역임했고 해방 후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봉직 중이던 유형기 목사가 “2차 투표에서 총회원 66명 중 44표를 얻어”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투표 직후 그의 감독 자격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장정에 나온 ‘감독의 자격’ 조항 중에서 ‘연회에서 정회원으로 6년 이상 계속 시무’(43단) 조항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유형기 목사는 1934년 정회원 목사가 되었지만 1941년 9월 정춘수 감독의‘혁신교단’에 의해 목사직을 파면당하여 교회를 떠났고 해방 직후에도 문서 출판 일에 종사하다가 1949년에야 교회에 복귀, 교육국 총무가 되었다. 따라서 장정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6년 이상 계속 시무’라는 조항에 위배되었다.

총회원들 사이에 유형기 목사의 감독 자격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유형기 감독을 지지하는 측은 “유형기 감독이 일제말기 목사직을 떠난 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시대적 상황에 따른 희생이므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하는 측은 “법은 법이다. 감독이 법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교회 치리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논쟁의 초점은 “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할 것인가?”아니면 “융통성을 살려 적용할 것인가?”로 좁혀 졌다. 양측 주장 모두 논리적 타당성이 있었고 그래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긴 논쟁으로 양측 모두 지친 상태에서 마침 총회를 참관하기 위해 나와 있던 미국 감리교회 대표 모어(A.J. Moore) 감독이 중재안을 냈다.

“한국 감리교회가 겪어야 했던 어려운 시기가 있어‘6년 이상 계속 시무’ 규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조항을 이번 총회 기간만 적용하지 않는다는 법적 기록을 남기고 넘어가자. 즉 이번 총회에서만 이 조항을 보류한다는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자.”

결국 모어 감독의 ‘특별한 유권해석’에 다수 총회원들은 기립박수로 지지를 표명했고 감독 취임을 고사하던 유형기 목사도‘특별교섭위원’의 권고를 받고 사회석에 올랐다. 이로써 ’유형기 감독’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그 날 끝내 기립하기를 거부하고 앉아 있던‘소수’ 목사 ․ 장로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세에 밀려 유형기 감독 선출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속마음까지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내심으론 여전히 유형기 감독을 법을 어기면서 선출된‘불법 감독’으로, 그가 이끄는 총리원을‘불법 체제’로 인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이남, 그 가운데도 충남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의 눈에 평북 영변 출신인 유형기 감독은 총리원 구성과 교회 개척 및 복구비 배분, 십자군 유학생 선발 등에서 남쪽 출신 보다는 월남한 이북 출신들을 우대하여 편파적인 행정을 펼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1953년 미국교회가 보내준 선교비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업자를 잘못 선정하여 재정적 손해를 본.‘종교불 사건’(宗敎弗事件)이 터져 유형기 감독과 총리원을 향한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4년 3월 총회가 개최되었고, 총회 구성원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은 유형기 감독이 다시 감독 후보로 나섰다. 1951년 총회에서 유형기 감독을 반대했던 측에서 반발이 일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종교불 사건’을 교단 비리로 몰아 유형기 감독의 출마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총회 참관을 위해 내한한 미국 감리교회의 모어 감독이 나서, “달러 교환 문제는 미국의 도움을 받는 각 나라 선교 지역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문제점이다. 이 때문에 야기되는 복잡한 사정이 교회의 통일과 사명의 수행 및 재건 계획에 아무런 지장도 결과치 않기를 바란다.”하여, “돈 준 사람이 문제 삼지 않겠으니 받은 사람도 문제 삼지 말라”는 취지로 반대파의 비판을 무마했다. 그러자 반대파에서는 “지난 1951년 총회 때, 유형기 목사는‘정회원 6년 계속 시무’라는 조항에 걸려 감독 자격이 안되었지만‘이번 총회에서만 보류한다.’ 는 조건으로 양해했는데 다시 나온 것은 약속 위반이다.”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어 감독이 나서,“한국 교회가 삼십여 년 전에 제정된 헌법 조문의 고식적 해석으로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키지 않아야 하며 더욱이 십여 년에 걸쳐 교회 정회원이었으며 이미 본 교회 감독으로 임기를 끝마친 유 감독의 감독 후보 자격을 문제 삼을 바가 못 된다.”고 유권 해석을 함으로 유형기 감독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의사를 밝혔다. 전쟁직후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교회 복구비와 생활비, 구호비 전액을 지원해 주고 있는 미국 교회 대표로 나온 감독의 말 한 마디는 ’유권 해석’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결국 모어 감독의 발언으로 유형기 감독의 재선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1951년 총회 때처럼 유형기 감독은 이번에도 감독 취임을 몇 차례 거부하다가 회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감독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총회 후였다. 유형기 감독의 재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반대파 목사들은 감독 선출 직후 총회장을 떠나 인사동 중앙교회에서‘기독교대한감리회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법은 지켜야 한다.”는 취지로 세를 규합했다. 그래서‘호헌파’(護憲派)란 명칭이 생겨났다. 겉으론‘호헌’이지만 실제는 유형기 감독의 ‘이북 출신 우대’ 정책에 대한 불만이었다. 결국, 호헌파는 1955년 3월 1일 천안읍교회에서 전국 호헌신도대회를 개최한 후 3월 3일 특별 연회와 총회를 조직하여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별도 총리원과 신학교를 서울 중앙교회 안에 설립하였다. 수적 보면 ’호헌파’로 나간 교회가 30여 곳, 참여한 목회자는 40여 명 수준으로 전체 한국 감리교회의 10% 미만이었지만 그 파급 효과는 컸다.

이것이 해방 후 한국 감리교회가 겪은 두 번째 분열이다. 교권을 둘러 싼‘지역감정’ 대립, 소수파의 불만과 요구를 포용하지 못한 다수파의 배타적 독점욕,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힌 소수파의 편협한 상황 인식, 여기에 미국 교회의‘초법적’간섭이 한데 어울려 빚어낸 결과였다. 이후 4년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서로 다른 파에 속한 목사들이 지지 교인들을 동원해 예배당을 차지하려고 주일마다‘멱살잡이’ 몸싸움을 벌였고 40여 건의 교회 재산소유권 소송이 벌어져 목사는 심방할 시간에 법정에 나가 ‘부끄러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일반 언론 매체는 연일 ‘싸우는 감리교회’에 관한 소식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교회 합동 과정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컸다. 장세환․맹기영․신창균 등 평신도 지도자들은 분열 직후부터 양측 소장파 목회자들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1959년 교회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여기에 호헌파 분열의 ’원인’ 제공자였던 유형기 감독이 2차 임기를 마치고 1958년 물러난 것도 교회 합동 분위기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1958년 3월 총회에서 유형기 감독 후임으로 32차 투표 끝에 ’이남(경기도 안산) 출신’ 김종필 목사가 감독에 선출되었는데 그는 감독이 되자마자 곧바로 교회 합동 운동을 추진하였다. 호헌파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1959년 초 양측 대표들로 ’교회통일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합동을 논의한 결과 2월 7일, “1954년 이후에 감리교회가 양측으로 분열케 한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심히 유감된 일임을 통감하여 이에 양측은 하나의 감리교회로 무조건 통합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의 <통일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해 3월 17일 양측 교회 합동 연회가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됨으로 감리교회는 분열 5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조건 통합한다.”는 합동 원칙만 강조한 결과 분열의 내적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못했다. 즉 호헌파 분열의 근본 원인이 되었던 ’지역 갈등’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외적 봉합만 추구한 결과 합동 이후 한국 감리교회는 내부적으로 더욱 치열한‘지역 중심 교권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결과 오늘까지 한국 감리교회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서클 정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0. 113회 감독선거 투표 기록: ‘서클 정치’의 현주소

한국 감리교회 ‘서클 정치’의 기본 틀이 형성된 것은 1962년 7월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 평남 강동 출신 이환신 목사가 41차 투표 끝에 감독에 선출되었다. 그는‘성화파’였다. 해방직후 서부연회 목회자 양성기관으로 평양에 설립되었던 성화신학교 교수와 학생 출신이 주축을 이루었다 해서‘성화파’(聖化派)란 이름이 붙었는데 유형기 감독을 중심으로 결성된‘이북 출신’ 교회 정치 세력을 말한다.‘성화파’의 대항 세력인‘호헌파’는 1954년 분열되었다가 5년 만에 되돌아오면서‘충청도(특히 충남) 출신’들로 그 결속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하여 1962년 총회에서 호헌파는 감독을 성화파에 넘겨준 대신 총리원 총무 세 자리 중 두 자리(교육국과 사회국)를 차지하는 실리를 취하였다.

이 같은 서클 정치의 이원(二元) 구조가‘성화파’․‘호헌파’․‘정동파’의 삼원(三元) 구조로 변한 것은 1966년 9월 총회부터였다. 이 총회에서 성화파 이환신 감독이 재선을 노리고 재출마하였고 호헌파에서는 공주 출신인 변홍규 목사를 감독 후보로 내세웠으며 여기에 김광우 목사가‘제 3의’ 후보로 나세게 됨으로‘정동파’란 새로운 서클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도 부천 덕적도 출신인 김광우 목사는 해방직후부터 유형기 감독측(성화파)에 가담하여 총리원 전도국 총무를 역임하며 중앙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였는데 1963년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게 되면서 그를 중심으로 모인 세력을 ‘정동파’라 부르게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 중부, 특히 강화와 인천 지역 출신 목회자들이 참여한 정동파는 ‘비충청 이남출신’ (非忠淸以南出身) 정치세력이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치열했던 ‘삼국시대’ 정치의 치열함은 1966년 9월 시작된 총회에서 감독 투표가 세 서클의 대표인 이환신 ․ 변홍규 ․ 김광우 후보 간에 팽팽한 3파전으로 진행되어 무려 110회나 감독 선거를 하였음에도 ‘총대 3분의 2 득표’가 나오지 않아 감독 선출에 실패한 것에서 잘 드러났다. 결국 결국 종래처럼 어느 한 파가 권력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권력 분점을 골자로 한 연회장(年會長) 제도를 채택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67년 3월 2일 특별 총회를 소집하고 장정을 개정한 후 감독 선거에 들어 가 ‘사전 합의’된 대로 호헌파 변홍규 목사가 3차(정기 총회까지 합치면 113차) 투표 끝에 감독으로 선출되었으며 정동파 이병설 목사가 총무국 총무, 성화파 나사행 목사가 교육국 총무로 각각 선출되었다. 이어 3월 29일 개최된 각 연회에서 연회장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정동파에서 중부연회장(김광우), 성화파에서 동부연회장(윤창덕), 호헌파에서 남부연회장(이강산)을 차지하여 정파간 안배를 이루었다. 이외에 총리원 이사는 물론이고 총리원 직원 채용과 기독교 기관 이사 파송, 지방 교역자 파송도 ‘기회 균등의 원칙’에 근거한 정파간‘사전 협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2년에 걸쳐 무려 113차 투표를 해서 감독을 선출했던 제 10차 총회는 한국 감리교회 서클 정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전개된 한국 감리교회 정치는 서클간의 막후 흥정과 담합으로 일관되었다. 그 결과 서클 정치의 필연적 결과로 여러 가지 부정적 현상들이 나타났으니 첫째‘지역감정’이 심화되었다. 호헌파 분열의 근본 원인이‘지역 갈등’이었는데 합동 이후 지역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서클 정치가 정착되면서 서클이‘이북 출신’,‘충청 출신’,‘중부 출신’ 등‘출신 지역’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가 되어 오히려 지역감정이 더욱 심화되었다. 신학교 졸업생들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충청도 출신은 호헌파로, 중부 출신은 정동파로, 이북 출신은 성화파로 분류되었다. 그 결과 목회자 파송에서 목회자의 신학과 목회 철학보다 출신 지역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집단 이기주의’가 심화되었다. 서클 지도자는 ‘자기 사람 키우기’와‘자기 사람 심기’를 잘 해야 했고 목회 지원자들은‘줄 서기’를 잘 해야 했다. 특히 서클 대표로 총리원이나 교회 기관, 단체에 파송된 인사들은 명목상 파송권자인 감독보다는 실질적 파송권자인 서클 지도부에 충성하였다. 그 결과 서클은 점차 종교적 이익 집단으로 바뀌었다. 셋째 교회나 목회자의‘영적’ 권위가 무너졌다. 세속 정치와 달리 교회 정치의 지도력은 목회자나 감독의‘영적 권위’에 바탕을 두어야 함에도 세속 정치와 다를 바 없는 막후 담합과 밀실 거래가 이루어지는 교회 정치 현장을 목격한 교인들은 교회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회가‘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하는’ 감독을 내지 못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튼 이후 한국 감리교회 정치판은 3대 서클 사이에 “받은 만큼 준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적의 적은 친구다.”는 식의 삼국지(三國志) 논리에 의거한 합종연횡(合縱聯橫)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부터 서클 보스들의 ’다방 정치’, ’설렁탕 목회’가 맹위를 떨쳤고 서클내 목회자들 사이엔 시혜(施惠)와 충성으로 연결되는 ’봉건’ 질서가 구축되었다. 신학생들은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출신 지역에 따라) 서클 분류가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서클 정치’ 현장에 투입되었다. 이 같은 ’서클 정치’ 정착으로 교회는 겉으로 평화로웠지만 내적으로는 자리 배정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그것은 1970년대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11. 해방 후 3차 분열(경기연회와 갱신측 분열): 교회 권력의 분배 문제

<삼국지>이야기가 그러하듯 현실 정치에서 담합과 흥정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정치 세력 간 평화가 오래 가지 못한다. 정치판에서‘평화’는‘휴전’일 뿐이다. “권력은 부부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정치 논리는 교회‘서클 정치’에도 적용되었다. 1967년 3월 특별 총회 이후 조성되었던 성화 ․ 호헌 ․ 정동 간의‘서클 평화’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권력 독점을 향한 서클간의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세 세력 간의 균형이 무너질 조짐은 1970년 3월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중부연회에서 나타났다. 연회 최대 관심은 10월 총회에 내보낼‘총대’ 선출이었는데 결과는 성화파와 호헌파의 연대로 정동파가 대거 탈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부 지방을 지역 배경으로 삼고 있던 정동파가 텃밭인 중부연회에서 이러했으니 성화파가 절대 우세한 동부연회나 호헌파가 절대 우세한 남부연회의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결국 정동파가 철저하게 소외된 상황에서 개최된 1970년 10월 총회에서 성화파 윤창덕 목사가 감독으로 선출되었고 선교국장에 호헌파 박설봉 목사, 교육국장에 성화파 나사행 목사, 총무국장에 호헌파 김창희 목사가 선출되었다. 성화-호헌 연대는 빈틈없었고 총리원은 두 계파의‘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반면에 총회에서‘집단 따돌림’을 당한 정동파는 급속히 와해되었다. 총회 이후 소수의 한계를 드러낸 정동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더욱이 총회 이후 정동파 서클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김광우 목사가 정동제일교회 목사직을 사임함에 따라 ‘정동파’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명분도 사라졌다(다만 정동파에 속하였던 일부 목회자들은 1970년대 이후‘기도동지회’ 혹은‘신앙동지회’,‘복음동지회’란 서클을 결성하여 교회 정치 현장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동파의 붕괴를 촉진시킨 또 다른 요인은 1970년 일어난 ‘경기연회’ 분열이다. 경기연회 분립운동은 1970년 7월 인천서지방 전덕일 감리사, 여주지방 김영창 감리사, 수원동지방 안걸모 감리사, 강화동지방 김성주 감리사, 그리고 이천중앙교회 김정구 목사, 인천 숭의교회 이성해 목사와 이호문 목사 등이 송도교회에서 회집하여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본격회되었다. 여기 모인 이들을 굳이‘서클’ 분류를 하자면 정동파라 할 수 있으나‘골수’ 정동파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중앙 정치에 관계하는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광우 목사를 비롯한 서울 지역‘정동파’ 목회자들은 비록 1970년 10월 총회장에서 퇴장하기는 했지만 별도 연회나 총회를 조직할 의도는 없었다. 정동파 지도부는 교회 분열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서울 지역 정동파 목회자들은 경기 지역 목회자들이 추진하는 연회 분립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기연회 분립을 추진한 인사들은 반(反) 성화-호헌 정서를 바탕으로 ‘서울 중심’의 교회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지방 목회자들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1970년 10월 총회 직전‘경기연회 창설추진위원회’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 “서울 집중은 지방의 예속화 내지는 소외현상을 빚어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호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지역적 사정을 고려할 때 수도 서울과 함께 획일적인 선교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재의 중부연회가 다른 연회에 비해 과도하게 방대하기 때문에 교회 관리 면에서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대도시는 대도시의 특수성에 따라 선교하게 하고 지방은 지방적 조건에 따라 교회행정과 선교활동을 하게 함으로써 보다 발전적인 감리교회를 받들어나가고자”한다고 주장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중부연회에 속한 316개 경기도 지역 교회들이 123개 서울 지역 교회와 분리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지방색’ 갈등이었다. 종래 성화 ․ 호헌 ․ 정동 ‘서클’은 목회자의‘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이라면 경기연회는 목회자의‘목회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세력이라는 점에서 달랐다.

경기연회 창설준비위원회는 처음에 중부연회와 총회 서기부에‘연회 분립 청원 건의안’을 제출하는 식의‘합법적’ 방법을 선택했지만 번번이 건의안이 묵살(?)되자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으로 연회를 창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12월 7일 경기연회 창설을 선언하면서 “교단의 부정부패를 없이하며 지방이나 연회 경계를 철폐”하고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연회 운영을 독자적으로”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후 준비위원회측과 총리원측은 경기 지역 교회들을 서로 자기편에 끌어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총리원측은 경기연회를‘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경기연회에 가담한 목회자들을‘자퇴 회원’으로 간주하여 경기연회와 단절을 선언하였다.

‘경기연회 분열’은 1974년의 ‘갱신측 분열’의 서막이었다. 1970년대 한국 감리교회 정치 상황은 호헌파가 주도하였다. 경기연회 분열 때만 해도 성화파와 호헌파가 균형을 이루었으나 경기연회 분열 이후 성화파는 급속하게 쇠퇴하였고(이후 성화파는 ‘순수 성화계’,‘조알계’, ‘서울 감신계’ 등 여러 갈래 흐름으로 나뉘었다) 반면 호헌파는 급속도로 세를 불려 나갔다. 그 결과 호헌파 내부에 갈등이 형성되어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박설봉 목사를 중심한‘호헌 구파’와 김창희 목사를 중심한 ‘호헌 신파’로 나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10월 정동제일교회에서 12차 총회가 소집되었는데 역시 최대 관심은 감독 선거에 있었다. 호헌 구파에서 감독 후보로 내세울만한 박설봉 목사는 연회에서 총대로 선출되지 못해 총회에 참석도 못했다. 결국 감독 선거는 호헌 신파의 김창희 목사와 성화파의 홍현설 목사 2파전으로 진행되었다. 10월 26일 시작된 감독 선거에서 이틀간 13차 투표에도 ‘3분의 2 득표’를 얻지 못해 일단 폐회하였다가 12월 10일 총회를 속개하여 다시 사흘간 11차 투표를 하였음에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총회장에는 “110차 투표를 하고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던 10차 총회의 재판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각 서클 대표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해 보았으나 상대편의 양보만 요구할 뿐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돌파구는 소수파의 퇴장으로 만들어졌다. 12월 12일 저녁, 투표 직전 홍현설 목사를 지지했던 조피득 목사를 비롯한 40여 명 총대들이 “교단 정화”를 선언하고 퇴장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실시된 25차 투표에서 김창희 목사는 전체 108명 중 82표(76%)를 얻어 단번에(?) 감독이 되었다.

이처럼 1974년 총회는 호헌 신파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결과는 한국 감리교회 역사상 가장 복잡했던 교회 분열 양상으로 연결되었다. 우선, 12월 12일 총회장을 박차고 나갔던 40여 명 총대들은 그날 밤 종교교회에 모여 “지난날의 감리교회의 모든 부조리와 불신앙적인 요소를 과감히 개혁하고 요한 웨슬레의 정신에 의한 새로운 감리교회의 실현을 위해 매진할 것”을 다짐하면서 ‘대항’ 총회를 소집, 마경일 목사를 2년 임기 감독으로 선출하는 한편 동부연회장에 조피득 목사, 중부연회장에 박용익 목사, 남부연회장에 김재황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를‘갱신 총회’라 불렀다. 갱신 총회는 의회 조직에서 처음부터 교회 권력의 분산을 꾀하였고 그런 맥락에서‘감독’이란 칭호 대신‘총회장’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임기도 1년으로 하였다. 총리원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력제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국 감리교회는 분열 5년 만에 재통합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갱신측 분열 직후부터 서울의 정동제일교회를 비롯하여 동대문교회, 평동교회, 청파교회, 시온교회 등 서울과 지방의 영향력 있는 교회들이 법통측과 갱신측, 어느 한 쪽을 지지하기보다  ‘중립’을 선언하고 분열 직후부터‘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미연합 감리회 선교부와 남녀 선교회 등 평신도 단체들도 중립적 입장에서 교단 재통합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법통측이든 갱신측이든 분열 직후부터 재통합에 적극적이었다.

문제는 통합 조건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결론은 쉽게 나왔다. 법통측 총리원을 반대하고 나간 갱신측이나 중립측, 그리고 앞서 분열된 경기연회측은 부패한 서클 정치의 원인이 감리교회의 중앙집권적 정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감독 1인이 인사권과 재단 운영권을 독점하는 정치 구조를 개혁하지 않는 한 교권 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총회 대표를 뽑는 방식도 바꾸어야 했다. 총회 때마다 자기편 총대를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서클간의 지나친 경쟁이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정치와 행정 구조를 총리원 중심에서 개교회 중심으로 바꾸고 복수 감독제를 택하여 권력을 분산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리하여 갱신측과 중부 중립연회측, 그리고 경기연회측 대표들이 1975년 11월 17일 ’통합전권위원회’를 결성하고 통합 조건을 논의한 결과 1) 4년 임기의 감독제를 1년 임기의 총회장제로 바꾸고, 2) 총회 대표는 ’모든’ 정회원과 동수의 평신도 대표로 하며, 3) 감리사제도 1년 임기의 지방회장제로 바꾸고, 4) 개체교회 목회자 임면 발의권을 교회 인사위원회에 부여하는 방향으로 체제를 개혁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러한‘통합 원칙’에 근거하여 12월 2일 목사와 평신도 대표 250명이 참석하여 서울 광림교회에서 통합 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 마경일 목사, 부총회장 한영선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에겐 법통측 총회와 구별하여‘총회측’이란 명칭이 붙었다.

이처럼 반(反) 법통측 교회들이 단일 총회를 결성하자 법통측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법통측도 더 이상 감독 중심의 권력 독점체제로는 악화된 교계 여론을 무마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갱신측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던 김창희 목사는 감독으로 취임한 직후 “복수 감독제를 채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28일 아현교회에서 개최된 특별 총회에서 장정을 개정하여 교단을 대표하는 ’총리원 감독’ 외에 각 연회마다‘연회 감독’을 두기로 하였다. 2원(二元) 감독제가 된 것이다. 비록 “(총리원) 감독과 협의하여”란 단서가 붙었지만 목회자 파송권과 연회 행정 관리권을‘연회 감독’에게 부여함으로 권력의 분점을 꾀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법 개정을 근거로 1976년 3월 18일 역시 아현교회에서 2차 특별총회가 개최되어 동부연회 박대선 목사, 중부연회 박설봉 목사, 남부연회 김순경 목사를 각각 ‘연회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한국 감리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수 감독제’가 채택되었다. 이 같은 법통측의 변화로 감리교회의 대통합운동이 힘을 받게 되었다. 권력 집중형 감독제도를 포기하고 권력 분산형 총회제도를 채택한‘총회측’에서도 이 같은 법통측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법통측은 통합추진위원회를, 총회측은 총회일치연구워원회를 각각 구성하고 양측 대표들이 1976년 9월부터 협의를 시작하여 1977년 5월 1) 완전 다원화 감독제 실시, 2) 사업 기구의 독립 및 기능화, 3) 개체교회 중심화, 4) 총대 선출의 합리화라는 합동 5개 원칙을 마련하였고 계속해서‘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의를 계속한 결과 1) 연회별로 선출된 감독들로 감독회를 구성하며 감독회장이 감리교회 법인 대표를 맡고, 2) 각국 위원회를 설치하여 총무 선임과 사업 지원을 담당하고, 3) 개체교회에 기획위원회와 인사위원회에 두어 교회 운영과 목회자 임면에 평신도들의 참여를 높이고, 4)‘정회원 10년’ 이상 된 모든 목사와 동수의 평신도 대표로 총회를 구성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합의사항>을 마련하여 1978년 5월 24일‘합동 선교대회’에서 법통측 김창희 감독과 총회측 조피득 총회장이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 10월 26일 서울 배화여고 강당에서 합동 총회를 개최하고 중부․동부․남부․중앙 등 4개 연회 감독들을 선출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이번에도‘분열 5년 만에’ 다시 합동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12. 가까스로 지켜낸 하나 된 교회: 내부 갈등과 모순 구조

이처럼 1970년대 교회 분열과 합동을 거치면서 한국 감리교회의 제도와 성격 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전임 감독제’에서‘복수 감독제’로 바뀜으로 권력 분산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총리원 중심의 권력 독점으로 인한 폐해는 사라졌지만 반면에‘개교회 중심주의’가 강하게 뿌리를 내려 연합 사업이 힘들게 되었다. 또한 감리교회의 제도적 특징이라 할 수 있었던‘감독제' 의미가 거의 소멸되었다.‘감독’이란 명칭은 계속 썼지만 임기도 2년으로 줄었고 개체교회 목회도 하면서 감독직을 수행했기에 전과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총회 때마다 4명(1998년부터 9명) 이상 감독들이 배출되어 ‘감독 풍년’ 시대가 열렸고 그 결과 감독의 권위도 예전만 못했다.

그리고 감리교회의 또 다른 특징이었던‘파송제’도 소멸되었다. 연회 때 감독의‘파송기 낭독’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목회자 임면은 개체교회 구역 인사위원회 소관이 되어 사실상 장로교회의‘청빙제’로 변했다. 그 결과 목회자의‘장기 목회’가 가능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대형교회들이 출현하면서 개교회 중심주의가 팽배해졌을 뿐 아니라 교회의‘사유화’(私有化)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와 함께 개체교회 뿐 아니라 지방회나 총회에서 평신도의 영향력도 점증하였다. 선교와 봉사, 교육과 행정 분야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를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새롭게 조성된 교회 정치 환경에‘정치 장로’들이 등장하여 과거‘정치 목사’들이 하던 역할을 맡게 되면서 1980년대 한국 감리교회의‘정치 상황’은 한층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에 1980-90년대 교회 정치 현장에서 주동적으로 활동했던 목회자들의 출신 학교(감신과 목원과 협성)를 중심으로‘동문이라면’ 맹목적으로 지지하며 줄을 서야 하는‘교연’(校緣)까지 개입되면서 더욱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를 만들었다.

그 결과 ‘다원 감독제’가 실시된 후, 아니 감독 선거 투표를 110회나 해야 했던 그 시절 이후 한국 감리교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영적 권위자’가 지도자로 추대되기보다는 타협과 담합, 돈과 조직, 집단 이기주의와‘패거리’문화, 때로는 물리적 힘을 동원한 치열한(전투적) 정치적 행사를 통해 지도자가 뽑혔다. 그래서 언제나 총회를 전 후하여 정치적 집단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것은 세속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현상이었고 그렇게 해서 뽑힌 교회 지도자는 일반교인은 물론이고 세속 사회로부터도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기 어려웠다.

교회는 세속 사회에 대하여 ‘도덕적’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 교회의 대(對) 사회적 지도력 상실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반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바는 교인들끼리 통하는 교리나 신학이 아니다. 교인 뿐 아니라 일반인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영적 권위’와 ‘도덕적 순결’,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주어진 건강한 지도력이다. 교회에 관한 것이라면 ‘영적인’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이어야 한다. 그 점은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다. 한국 감리교회 최고 법인 <교리와 장정>에서 ‘한국 감리교회 최고 임원’인 감독회장을 설명하면서‘행정 수반’이란 단어에 앞서 ‘영적 지도자’란 단어를 놓은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감독회장은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이며 감리회의 행정수반으로서 감리회본부의 행정을 총괄한다.”(교리와 장정 4장 16조[81단])

나가는 말

오늘 한국 감리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성경을 읽다가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호렙산 동굴 속의 엘리야 대목에서 눈이 멈추었다. 누구도 뒤따를 수 없었던 ‘여호와의 전사(戰士)’ 엘리야. 그러나 갈멜산에서의 혁혁한 승리가 있었음에도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라비아 사막 한 가운데 동굴로 피신해 들어갔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자신을 계시해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계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파괴하는 바람도, 편을 가르는 지진도, 소탕하는 불도 아니었다. 그 소란하고 혼란스럽고 복잡한 사건의 현장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삯꾼’ 목자들만 있을 뿐이었다. 대신, 속삭이시는 그분의 음속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귀를 가진 자라야 들을 수 있는 ‘세미한 소리’(sound of silence),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영의 소리’(sound of spirit), 바로 거기에 “주님은 계셨다!” 바로 그 영은 창조 이전,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때”(창 1:2),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찬 수면 위를 운행하다가 말씀의 지시만 떨어지면 흑암 가운데 광명을, 혼돈을 조화로, 공허를 충만으로 바꾸어 놓는 창조의 역사를 주도하는 ‘하나님의 영’, 곧 ‘루아흐’(ruach)였다. 그리고 그 영은 신약에 들어와 주님이 떠나신 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임함으로 오직 말씀에 따라, 말씀을 실천하는 말씀 공동체로서 교회를 시작하도록 만든 ‘말씀의 영’, 곧 ‘프뉴마’(pneuma)였다. 그렇게 해서 인류와 교회가 혼돈과 절망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 ‘세미한 영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 가운데 담긴 말씀의 지시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영의 사람’(homo spiritus)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를 만들어 나갔다.

지나온 한국 감리교회의 한 세기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 해 부활절, 암울했던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가 도착하자마자 “그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사슬들을 깨치시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와 빛을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아무리 노력해도 기대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 선교와 목회의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하디가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그 성령의 능력이 없는 것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후배 선교사와 토착 교인들 앞에서 진솔하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자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림으로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운동을 촉발시켜 한국 교회와 민족의 운명을 새롭게 갱신한 것도, 아니 갚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예수 믿기 10년 전에 횡령했던 정부 돈을 갚겠다며 들고 온 윤승근 전도사의 ‘양심전’을 전달받은 탁지부 관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다니도록 만든 것도, 아무리 투표를 해도 선거전이 팽팽하게 전개되어 법이 정한 기준을 통과한 감독이 나오지 않아 지치고 지친 총대들이 우울하게 앉아 기약 없는 투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느닷없이 총회장에 난입한(?) 비둘기 한 마리로 분위기를 바꾸어 ‘신령한’ 김종우 목사를 감독으로 세웠던 것도, 일제말기 세속정권과 타협한 정춘수 감독이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가행위라.”며 신사참배를 독려하며 다닐지라도 말씀과 신앙 양심을 속일 수 없었던 권원호 서리 전도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그것을 설교한 이유로 체포되어 결국 옥중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훼절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영의 소리’에 예민하고 그 지시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 혼돈과 절망의 수렁에 빠진 한국 감리교회를 구할 인물은 누구일까? 뛰어난 전략가도, 해박한 지식의 법률가도, 언변 좋은 설교가도, 능란한 행정가도 아닐 것이다. 지구상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서 불행했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혼돈과 무질서, 좌절과 실망의 혼탁한 역사를 청산하고 조화와 질서, 평화와 일치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려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에 예민하게 응답하는 ‘영의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리회관의 모든 부서, 모든 직원을 장악하고 모든 사무를 추진력 있게 총괄하는 ‘행정 수반’ 감독회장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떠난 저 농촌 마을에서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노인 서 너 명을 놓고 설교하는 서리 전도사에게 그래도 자신이 감리교 목회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영적 지도자’ 감독회장이다. 아펜젤러와 하디처럼, 전덕기 목사와 이용도 목사, 최병헌 목사와 신석구 목사, 하란사와 최용신, 정경옥 교수와 황애덕 교수, 윤승근 전도사와 권원호 전도사처럼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존경심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영적 권위’를 지닌 지도자가 참으로 그립다./ 이덕주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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