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한을 일깨우는 바람

켄 로치 감독,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스틸컷

아일랜드를 관통하는 정서는 ‘슬픔’이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척박한 자연환경, 대영제국의 압제, 동족끼리의 분열 등으로 굴곡졌다. 이런 탓에 아일랜드 민초들의 정서 밑바닥엔 슬픔이 흐른다. 이제 소개할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원제: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은 독립운동에 뛰어든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아일랜드인들의 핏속에 각인된 슬픔의 정서를 잘 표현해낸 작품이다. 

주인공 데이미언(킬리언 머피)은 의대 졸업 후 런던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 데이미언은 고향 친구들과 아일랜드 전통 스포츠인 헐링을 즐긴다. 그러나 영국군은 ‘공중집회를 금한다’는 규정을 들이대며 현장을 급습한다. 데이미언의 친구인 미하일 오 설리번은 아일랜드 고유 언어인 게일어로 영국군에게 반항한다. 이러자 영국군은 영어로 말하지 않는다며 미하일을 심하게 때려 숨지게 한다. 미하일이 죽는 광경을 본 데이미언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독립투사로 변신하게 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의 영향이다. 그는 형을 ‘행동하는 사람’이라며 늘 존경해 왔고, 이런 존경심은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그러나 역사의 질곡은 두 형제를 갈라놓는다. 데이미언은 노동자·농민이 주인되는 완전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건설을 꿈꿨고, 독립된 아일랜드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여겼다. 반면 현실주의자인 테디는 아일랜드의 궁극적 독립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배층과 타협을 모색한다.  
연출자인 켄 로치는 데이미언과 테디의 미묘한 노선 차이를 무뚝뚝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감독인 켄 로치는 사회주의 색채 짙은 일련의 작품으로 작가정신을 표현한 감독이다. 그의 1995년 작 <랜드 앤 프리덤>은 그의 작가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대표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주곡과도 같았던 스페인 내전을 그린 이 작품에서 켄 로치는 난마처럼 얽힌 스페인 내전의 이면을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파고들어간다. 그는 특히 무정부주의자들을 주목한다.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난맥상으로 인해 무정부주의자들이 바라고 꿈꿨던 이상이 산산조각난다. 그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조명한다. 그의 연민 가득한 시선은 이 작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이어진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스틸컷

미완의 독립으로 그친 런던 조약  
독립투쟁 과정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형제끼리의 갈등은 아일랜드 독립 이후 표면화된다. 7세기 동안 대영제국의 압제에 시달렸던 아일랜드 민중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마침내 양보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다. 영국은 아일랜드에 화평을 제안하고 1921년 그야말로 역사적인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영국군은 아일랜드에서 철수하게 됐고, 아일랜드는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같은 자치령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런던 조약은 한계가 있었다. 우선 여전히 영 연방(The British Commonwealth)에 남게 됐고,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도록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런던 조약은 졸렬한 정치적 음모의 부산물이었다. 즉 영국은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외견상 독립을 허용해 아일랜드 문제로 더 이상 영국이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실질적인 지배권은 유지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런던 조약은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영국 왕실의 비호 아래 구교도들을 2등 시민 취급했다. (사실 영국이 북아일랜드에 지배권을 행사했던 중요한 명분 가운데 하나가 신교도 인구수의 우위였다.) 구교도들은 이런 차별에 한을 품어왔고, 결국 1972년 구교도와 영국이 정면으로 충돌해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유혈참극이었다.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원했던 데이미언은 조약 수용을 거부한다. 반면 테디는 비록 불완전한 독립이지만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라면서 수용을 종용한다. 아일랜드의 정치적 장래를 둘러싸고 벌이는 두 형제의 노선갈등은 급기야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지경으로 비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일랜드의 역사에 눈을 돌려야 한다. 데이미언과 테디의 비극은 아일랜드 전체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두 거목이었던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는 런던조약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좀처럼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둘은 내전까지 치르고야 만다. 런던조약 당시 아일랜드 협상 대표로 나섰던 마이클 콜린스는 현실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에이먼 드 발레라는 조약 수용을 거부하고 하원을 탈퇴하는 강수를 뒀다. 독립투쟁 시절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하고야 만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와 에이먼 드 발레라의 대립과 갈등은 그 자체로 극적이었고 또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스틸컷

대영제국의 압제와 여기서 벗어나자마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아일랜드의 비극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수적인 식민지배에 허덕이다 간신히 벗어났지만 독립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라가 두 동강 나고, 그것도 모자라 동족끼리 죽여야 했던 한민족의 비극과 겹친다. 그래서인지 데이미언과 테디의 비극은 인간으로서 드는 연민의 감정을 훌쩍 뛰어 넘어 묘한 동질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영화 도입부분에서 한 아낙네는 구슬픈 가락으로 영국군의 가혹행위로 숨진 미하일의 넋을 위로한다. 그 가락은 아일랜드 출신 시인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Robert Dwyer Joyce, 1836~1883)의 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가락을 붙인 것이다. 이 영화 제목도 바로 조이스의 시에서 따왔다. 여기서 ‘바람’은 대영제국의 압제, 흔들리는 보리밭은 압제에 신음하는 아일랜드의 은유다. 
그녀를 향한 오래된 사랑
나의 새로운 사랑은 아일랜드를 생각하네
산골짜기의 미풍이 금빛보리를 흔들 때
분노에 찬 말들로 우리를 묶은 인연을 끊기는 힘들었지
그러나 우리를 묶는 침략의 족쇄는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네  
그래서 난 말했지
이른 새벽 내가 찾은 산골짜기
그 곳으로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와
황금빛 보리를 흔들어 놓았네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잔잔하면서 애수어린 가락에서 아일랜드 민중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슬픔을 엿본다. 또 그 가락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피곤한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 한민족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된 한(恨) 마저 꿈틀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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