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의 한 교단에서 운영하던 연금재단이 고금리 대부업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논란이 일고 있다. 연금재단에서는 관련 의혹에 대해서 격앙된 어조로 부인하고 있지만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의혹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연금을 불입했던 목회자들은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대부행위(신명기23장19-20)를 자신도 모르게 한 셈이 된다. 물론, 신명기에서 이방사람에게는 이자를 물려도 된다는 단서가 제시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이 사실에 괘념치 않을 수 있지만, 오늘날 목회자에게는 누가 이방사람인지를 따져볼 일이다. 게다가 ‘고리대금업’이었으니 연금을 불입한 목회자들까지도 공범자 의식을 가져야 될 형편이다.
이런 의혹이 재단 운영자들의 주장대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들로서는 무리수를 두게 할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연금제도 자체가 안정적인 수급은 물론 가능한 많은 수익의 기대를 담보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적정한 수익모델을 개발하지 못할 경우, 운영자들은 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전에 아무리 치밀하고 철저한 계산을 했다하더라도 투자가 실패할 가능성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으므로, 분산투자로 계륵 같은 이익들을 긁어모으기 위해 천지사방을 발로 뛰어다니거나, 아니면, 그야말로 좋은 ‘운’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고위험성의 투자를 감행한 뒤 노심초사하든지의 기로에 서 있을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결국, 연금제도 자체는 운영자로 하여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세기3장6절)에로 손을 뻗게 만들고야 마는 속성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일면 연금 회원들은 대체로 운영자들에게 적정한 수익 모델을 개발할 전문적인 식견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또는 적정한 투자처를 물색하지 않았다고 질책한다. 혹은 세상 앞에서 목회자의 위신을 손상시켰다고 책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요구, 질책, 책망의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리 투자에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사람이라도 투자 상황을 전반적으로 통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국내외 투자처가 많지 않은 상황은 연금재단 운영자의 능력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투자의 절차가 고의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있지 않다면 투자 집행과정상의 예측불가능한 문제점에 대해서까지 윤리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굳이 거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의 시대에 있어서”(누가16장8절) 어떤 경로로든 최대의 수익을 구하려는 신자유주의적 관념과 본질상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요구와 질책과 책망은 논란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일반인들의 연금제도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연금제도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신학적인 토대에서 진행되어야 옳다는 말이다. 물론, 연금재단에서는 연금의 운용을 위해 수익 모델을 모색할 때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고민을 거칠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의 논란은 이러한 고민이 얼마나 더 철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를 유심히 관찰할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관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되새겨야만 할 것이다. 그 ‘먼저’하는 행위에 신학적 고민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신학적 고민을 통해 투자처를 변경한 사례로서 지난 8월15일에 폐회된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의 결정을 언급할 수 있다.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는 그간 화석연료 산업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해서 재생가능에너지 산업에 재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안정적인 수익처를 포기하고 새로운 투자처를 물색하는 과정의 손익계산을 따지면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화석연료 산업이 사실상 기후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시점에서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실천하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 반성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연금재단이 할 수 있는 일들도 많다. 우선, 연금제도의 회원들이 불입된 연금에 대해 1%의 비율이라도 적게 받는 수급방식에 합의하는 것은 어떤가? 신자유주의적 경제관념에 따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겠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 실천의 관점에서 보자면 즐거운 손실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여유 자금으로 연금불입중단자를 일정 기간 지원하여 회생을 독려하거나, 중소규모 교회의 운영이나 건축을 지원하거나,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하거나, 사회빈곤층의 악성 채무를 대신 변제해주는 등의 사업은 영적 결실이 큰 일들이지 않는가? 물론, 지원할 사안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를 예방할만한 엄정한 관리규칙이 설립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즐거운 손실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해이마저도 교정하는 힘이 있다. 즐거운 손실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신학적 결단의 열매인 것이다.